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46화
위기의 요정계(4)
요정 여왕은 내 앞으로 다가와 망설임 없이 두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시선을 맞추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제가 하는 말을 잘 따라주셔야 해요.」
“네.”
「일단 최대한 잡념을 지우고 마음의 평온을 유지해 주세요. 시현 님의 마음이 불안정할수록, 새로운 요정계를 형성하는 데 부담이 커질 거에요.」
그녀가 평온한 마음을 유지해달라고 했지만, 지금 주변 상황을 생각해 보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머리 위에는 균열이 불길한 기운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었고, 주변에는 요정들의 비명과 고함이 난무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마음이 술렁이는 걸 막기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점점 커지는 균열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 요정 여왕의 말에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하게 집중을 유지하고 계시면. 제가 시현 님의 힘을 끌어들일 거예요. 그때 저의 의지를 거부하지 말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주세요.」
“제가 할 일은 그게 끝인가요?”
「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진행할게요.」
어…….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
겨우 그 정도로 될까? 라는 의문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지만, 자세한 내용을 꼬치꼬치 캐물을 여유는 없었다.
머리 위의 거대한 균열이 금방이라도 요정계의 하늘을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그럼 시작할게요.」
“…….”
요정 여왕은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킨 뒤,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시현! 힘내라, 뾰!」
「부탁드릴게요, 뾰!」
「여왕 님, 시현 님, 제발 성공해 주세요, 뾰!」
규리와 아기 요정들의 응원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의식을 집중할수록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점점 멀게 느껴졌다.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라고 했지?
평온…….
평온…….
평온한 감정을 떠올리려고 하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익숙한 풍경이 떠올랐다.
-부우우우우!!
넓고 푸른 초원에 울려 퍼지는 야쿰의 울음소리.
중간중간에 작은 야쿰들의 귀여운 울음소리도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초원 너머 멀리 보이는 농장 건물.
그 앞에서는 귀여운 여우 소녀와 친근한 마족들이 손을 흔들었다.
점점 긴장이 풀리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입가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잔잔한 미소가 생겨났다.
그렇게 농장을 떠올리며 평온함을 유지하는 동안, 요정 여왕이 붙잡은 두 손에서 간질간질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주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고 했지.
나는 손에서 느껴지는 그 기운을 끌어당기듯 몸쪽으로 받아들였다. 요정 여왕의 기운은 양팔을 타고 순식간에 온몸을 뒤덮었다.
-파아아아앗!!
「와아앗!!」
귓가에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완전히 집중한 상태의 나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저 온몸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뜨거운 기운과 눈꺼풀 너머로 쉴 새 없이 번쩍이는 빛무리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시간의 흐름도 잊어버리고, 조금씩 의식이 흐릿해지려던 그때. 머릿속으로 여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현 님은 정말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군요. 조금만 더 일찍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아쉬움을 드러내며 말끝을 흐렸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기운을 품고 계셔서, 제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네요. 걱정하신 부작용 같은 건 없을 테니 안심하세요.」
끄응…….
그래서 새로운 요정계를 만드는 일은 잘되는 건가?
가장 궁금한 질문을 당장 하고 싶었지만, 독한 마취약을 맞은 것처럼 계속 힘이 빠져나가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런 나의 답답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정 여왕은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저희에게 도움을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
「도움을 받은 처지에서 정말 염치없지만…… 저 대신 요정계를 부탁드릴게요. 시현 님이라면 잘 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무슨…….
「다음에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요정 여왕의 마지막 말이 작은 울림을 남기고 점차 희미해졌다. 곧이어 내 의식도 하얀 잉크가 퍼지듯 뿌옇게 흐려졌다.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리기 직전.
환한 미소 짓는 여왕이 보인 것 같았다.
* * *
“…….”
-우우웅.
-햘짝, 햘짝.
얼굴에서 느껴지는 축축하고 간지러운 느낌에 의식이 되돌아왔다.
천천히 눈을 뜨자 흐릿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앞에 보인 건.
요정계의 분홍색 하늘도, 불길한 균열도 아닌.
우중충한 분위기의 숲이었다.
-햘짝!
“으음…… 너는?”
-와앙! 와앙!
내가 몸을 일으키며 아는 척을 하자, 귀여운 새끼 마수가 반갑게 울었다. 포션을 나눠줬던 그 새끼 마수였다. 그 옆으로 다른 새끼 마수들도 쪼르르 모여들었다.
“으응. 그래. 귀여운 녀석들. 건강해 보이네.”
한 마리씩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를 알아보기도 전에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웠다.
-킁! 드디어 돌아온 것이냐?
거대한 크기의 마수가 나를 내려다봤다.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위압감에 움찔 몸이 떨렸다. 그래도 적대감이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고 평범하게 반응했다.
“응. 돌아왔어.”
-내 자식들에게 축복을 내릴 요정 여왕은 어떻게 됐지?
“어…… 그게…….”
마수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니까.
요정 여왕을 돕기 위해 뭔가 한 것 같긴 한데…….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마지막 기억들이 가물가물했다. 요정 여왕이 마지막에 했던 말들도 대부분 기억나지 않았다.
설마…….
내가 요정계에 갔던 것도 꿈은 아니겠지?
정확하지 않은 기억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거대한 마수가 불쑥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바짝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킁, 킁킁!
“뭐, 뭐야?”
-뭐지? 너에게서 느껴지는 요정의 기운이 더욱 진해졌다. 거기다 이 느낌은…… 요정 여왕?
“뭐?”
-너에게서 여왕의 기운이 진하게 느껴진다. 설마 요정계로 넘어가서 여왕을 잡아먹기라도 한 거냐?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야? 당연히 아니지!”
마수의 말도 안 되는 추측을 단번에 부정했다. 내 단호한 태도에도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나를 살폈다.
-타다닷!
“시현 님!”
“시현 님!”
“아, 여러분들!”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니. 농장 일행들과 바르단, 테르잔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 옆에 딱 붙어 있는 마수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말을 걸었다.
“시현 님, 괜찮으십니까?”
“네, 안드라스 씨. 저는 괜찮아요.”
“요정 여왕과의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쩝, 그게 말이죠…….”
이번에도 설명에 어려움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지금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이 불안하게 보였는지 일행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동시에 내 옆에 있는 마수를 신경 쓰느라 계속 불안하게 시선을 힐끗거렸다.
반면에 거대 마수는 다가온 내 일행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부스럭. 부스럭.
-쑤욱!
내 상의 주머니에서 작은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원래의 작은 모습으로 돌아온 규리였다.
“규리야!”
「끄으응! 머리가 어지럽다, 뾰!」
규리는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매만진 다음 날개를 움직여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여왕님? 아니. 시현인가, 뾰?」
“얘는 또 왜 이래…… 규리야, 정신 차려! 나야 나. 임시현!”
규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이상하다, 뾰! 왠지 모르게 시현한테서 여왕님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뾰!」
“……?”
-저 요정의 말대로다. 분명 너에게서 요정 여왕의 기운이 느껴진다. 너 정말로 여왕을 잡아먹은 건…….
“아, 진짜! 내가 요정 여왕 잡아먹은 거 아니라고!”
나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살짝 높아진 목소리 때문에 내 근처에 있던 새끼 마수들이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끼힝…… 끼힝…….
-끼힝…….
“아아. 괜찮아. 너희들한테 화낸 거 아냐.”
다시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새끼 마수들을 달래줬다. 보들보들한 털뭉치들을 한 마리씩 쓰다듬어주면서 동시에 거대 마수를 찌릿! 노려봤다.
-크릉…….
녀석은 작게 콧소리를 내며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자기 자식들이 소중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때.
「앗! 시현, 시현!」
갑자기 규리가 다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가 싶어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왜 또?”
「새끼 마수들, 새끼 마수들 좀 봐봐, 뾰!」
내가 새끼 마수들에게 시선을 돌리기 전에. 다른 쪽에서 먼저 격한 반응들이 튀어나왔다.
-이건?!
“말도 안 돼…….”
“시현 님이 어떻게?!”
거대 마수, 테르잔과 바르단.
각자 셋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시선은 내가 쓰다듬고 있는 새끼 마수들에게 집중됐다.
녀석들이 왜…….
응? 이건 갑자기 뭐지?
조금 전까지는 평범했던 새끼 마수들이었는데 어느새 녀석들 주변에 은은하고 신비한 반짝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신비한 기운 때문인지 녀석들의 눈동자가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직접 자신의 새끼들을 살핀 거대 마수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크릉! 이건 틀림없다. 요정 여왕의 축복이다.
“요정 여왕의 축복?”
새끼 마수들을 살리는 데 필요하다고 했던 ‘요정 여왕의 축복’. 거대 마수는 뜬금없이 축복을 언급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왕이 없는데 어떻게 축복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
-방금 네 녀석이 직접 축복을 걸어주지 않았느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거대 마수와 테르잔, 바르단은 한없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확히 내 양손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내 손이 뭐…… 응?”
직접 내 손을 확인한 나는 끝까지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새끼 마수들을 감싸고 있던 신비한 기운.
그 신비한 기운이 내 양손에서 강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