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350화 (350/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50화

베르딕의 방문(2)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동안 뒤쪽에서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엘프리드와 우르키가 막 수확한 딸기를 한가득 손에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딸기 수확이 잘 된 것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 싱글벙글했다.

“딸기 수확 도와주는 건 다 끝났어?”

내 질문에 엘프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오늘 수확은 여기서 끝내고. 나머지 딸기밭은 내일 수확하기로 했어요.”

“오늘 끝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오래 걸린 모양이네?”

“생각보다 수확량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둘 다 수확하느라 고생했어. 나도 딸기 바구니 좀 들어줄까?”

“별로 안 무거워요.”

“저도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괜찮다는 두 사람에게서 억지로 딸기 바구니 하나를 뺏어 들었다. 바구니 안에는 새빨갛게 잘 익은 딸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건 농장에 가져가려는 거지?”

“네. 가장 신선할 때 농장 식구들끼리 나눠 먹어야죠.”

“시현 선배님. 이번에 수확한 딸기는 왠지 더 맛있을 것 같아요.”

딸기를 좋아하는 우르키는 벌써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흐음.

확실히 이번에 수확한 딸기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맛있어 보이네. 이것도 새로운 요정계 영향 때문인가?

바구니 안에 딸기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때.

-쑤우우욱!

“그거 딸기야?”

“으아앗?!”

“헉!”

“……!”

그림자 속에서 테르잔이 불쑥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너무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딸기 바구니를 놓칠 뻔했다.

엘프리드와 우르키도 몸을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한발 뒤로 물러났다. 반면에 테르잔은 아주 평온하게 딸기 바구니를 들여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으으, 테르잔 님.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는 건 하셔도 괜찮은데. 제발 나오실 때 인기척 좀 내주시면 안 될까요? 매번 이런 식이면 심장에 너무 안 좋을 것 같은데요.”

“왜 심장에 안 좋아?”

“당연히 그렇게 갑자기 나오시면 깜짝 놀라니까요.”

“은율이는 이렇게 나오는 걸 좋아하던데.”

그녀의 말대로 은율이는 이 독특한 등장 방식을 마음에 들어 했다. 특히 자신의 작은 그림자에서 빠져나오면 굉장히 기뻐할 정도였다.

여담으로.

테르잔이 농장 식구 중에서 가장 빨리 친해진 사람이 은율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인데, 예상과는 다르게 은근히 죽이 잘 맞았다. 같이 놀고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가까워졌다.

“저는 은율이랑 다르다고요. 그러니까 제발 인기척 좀 내주세요.”

“응, 알았어…… 딸기 먹어도 돼?”

테르잔은 내 딸기 바구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웬만하면 참으라고 하고 싶었는데, 너무 눈빛이 간절해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세요. 대신 조금만 드셔야 해요. 나중에 농장 식구들 다 모여서 같이 나눠 먹을 거니까요.”

“응.”

그녀는 바구니에 얼른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잘 익은 딸기를 하나 꺼내 반쯤 베어 물었다. 감정이 없는 흐릿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부르르 떨리는 몸으로 감상을 대신했다.

“맛있으세요?”

“응응. 너무 맛있어. 이렇게 달고 새콤한 열매는 처음 먹어봐.”

확실한 반응에 나와 엘프리드, 우르키까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길러낸 딸기를 칭찬받는 건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딸기를 더 먹고 싶어 얼른 농장으로 가자고 재촉하는 테르잔과 함께 우리는 딸기 바구니를 가지고 농장 건물로 향했다.

멀리서 농장 건물이 시야에 들어올 때쯤.

갑자기 테르잔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그녀의 행동을 보고 내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농장 쪽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진다. 그것도 꽤 많은…….”

“예?”

그녀보다는 약간 늦었지만, 엘프리드와 우르키도 뭔가를 감지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 뭐지?

나도 모르게 발걸음 속도가 빨라지며 성큼성큼 농장 쪽으로 다가섰다.

농장 건물 앞에 낯선 무리.

무장한 병사와 기사들이었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강렬한 기백. 잘 훈련된 듯한 절도 있는 모습.

무엇보다 병사가 듯 깃발의 문양과 기사의 고급스러운 휘장에서 귀족 가문 소속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많지 않은 인원으로 보아, 싸우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좋은 의도가 있을지는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시현 님, 드디어 오셨군요.”

건물 현관문 앞에 있던 리아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정체불명의 방문자들을 힐긋거리며 물었다.

“리아네 씨. 갑자기 저 사람들은 뭐예요?”

“그게…….”

“당신이 카디스 영지의 주인입니까?”

리아네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목소리의 주인 쪽으로 향했다.

훤칠한 키의 남자 마족.

아마도 병사와 기사들의 주인이라고 예상되는, 아주 날카로운 인상의 귀공자였다.

으음…… 근데…….

어딘가 얼굴이 엄청 낯익은데? 혹시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인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낯익음에 긴가민가하면서, 일단 상대의 질문에 대답했다.

“예, 제가 카디스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신지……?”

“저는 베르딕 가문의 장남, ‘클라디온 뤼엔 베르딕’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디스 영주님.”

“아…… 저도 반갑습니다.”

베르딕…… 베르딕?

거기는 분명…….

잠깐의 혼란스러움을 지나.

‘베르딕’이라는 성을 쓰는 누군가를 퍼뜩 생각해냈다.

“아!”

엘프리드 리온 베르딕!

엘린이 태어난 가문이잖아?!

* * *

일단 간단한 인사를 끝낸 뒤.

곧바로 베르딕 가문의 장남, 클라디온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예고 없는 방문이긴 했지만, 엘프리드의 가족을 푸대접할 수는 없었다.

리아네는 곧바로 손님 대접을 준비했고, 나와 엘프리드는 클리디온을 안내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아직 밖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대신 부탁했다.

으음.

이럴 때 안드라스 씨가 있어야 좀 안심이 되는데.

이곳에 귀족 예법에 조금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처음 보는 귀족을 상대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보통 이럴 때면 안드라스가 옆에서 서포트를 잘해줬는데. 오늘은 아미 양과 데이트가 있는 관계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믿음직스러운 안드라스를 대신해 내 옆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

한 명은 당연히 엘프리드.

그리고 그 반대쪽엔…….

“흐아아암∼! 늘어지게 잘 자고 있었는데. 왜 또 손님이 들이닥치고 난리야. 저놈의 차원도약 마법진을 부숴 버리든가 해야지…….”

낮잠을 자다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카네프가 자리했다.

“사장님…… 손님 앞에서 그런 발언은 좀…….”

“내가 뭐?”

“계속 이러시면. 사장님 몫의 벌꿀 맥주. 전부 테르잔 님께 드릴 거에요?”

나는 농장의 새로운 술 귀신을 언급하며 카네프를 가볍게 협박했다.

“쳇…….”

다행히 효력이 있었는지. 카네프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아예 이곳에서 나가줬으면 제일 좋았을 텐데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카네프를 가볍게 제압하고 슬쩍 클라디온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무례한 발언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약간 어색한 분위기에 슬쩍 엘프리드 쪽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상대는 친형제니까 좀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엘프리드의 표정을 보자마자, 내 기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

그는 눈에 띌 정도로 표정을 어둡게 하고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분명 형제와 만난 상황일 텐데 반응이 굉장히 안 좋았다. 언뜻 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상하지 못한 엘프리드의 반응에 당황하는 사이.

먼저 카네프가 불쑥 말을 꺼냈다.

“베르딕 가문에서 왔다고?”

“그렇습니다, 카네프 님.”

클라디온은 자연스럽게 카네프를 상대했다. 이미 그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귀족의 영지를 방문할 때는 미리 연락해서 양해를 구하는 게 예의 아닌가? 베르딕 가문 정도면 다른 귀족 눈치는 안 봐도 된다는 거야?”

대놓고 비꼬는 듯한 말투에도 클라디온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위치는 카디스 영지가 맞지만. 실제로 농장의 주인은 마왕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미 마왕성에 이곳의 방문을 알리고 찾아온 겁니다.”

설명을 들은 카네프의 얼굴이 와락 찡그려졌다. 뭔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카네프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것을 느끼고. 내가 먼저 나서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하, 미리 알려주셨다면 대접에 좀 더 신경 썼을 텐데. 참 아쉽네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베르딕 공자님께서는 무슨 용무로 이곳에 오신 거죠? 혹시 동생분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직접 보러 오셨나요?”

클라디온의 시선이 옆에 있던 엘프리드 쪽으로 향했다.

“…….”

“…….”

동생에게 한차례 무심한 눈빛을 보낸 그는 금방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 와중에 엘프리드는 클라디온과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동생이 이곳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

“저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동생을 다시 가문으로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을 뿐입니다.”

“예? 엘린을 데려가겠다고요?”

나도 모르게 높아진 목소리를 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애초에 벌을 받기 위해 이곳으로 보내진 겁니다. 저 아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은 베르딕 가문입니다.”

“그게 맞긴 한데…… 너무 갑작스럽네요. 이렇게 미리 연락도 없이 데리러 오실 줄 전혀 몰랐거든요.”

“지금껏 동생이 신세 진 것에 대해서는 따로 보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닌데…….”

나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옆쪽을 바라봤다. 엘프리드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기 베르딕 공자님. 엘린 본인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들어보셨나요? 그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는 게…….”

“본인의 의사 말씀입니까? 그럴 필요는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 있는 건 시간 낭비처럼 보이거든요.”

“…….”

시간 낭비라는 표현에 나는 순간 벙찐 표정이 됐다. 그리고 클라디온의 이어진 말에 내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졌다.

“거기다 이런 패배자의 모습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