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351화 (351/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51화

베르딕의 방문(3)

“거기다 이런 패배자의 모습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

클라디온의 선을 넘는 발언에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껏 몸을 젖히고 있던 카네프도 무표정한 얼굴로 슬쩍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물론 가장 크게 반응한 사람은 엘프리드였다. 크게 몸을 경직시키면서, 양손과 다리를 파르르 떨었다.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농장의 손님이면서, 엘린의 형인 사람과 웬만하면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으나. 엘린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죄송한데. 아무리 친형제 사이라고 해도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당장 엘린에게 사과하시죠?”

“제가 틀린 말을 했단 말씀입니까?”

클라디온은 오히려 뻔뻔하게 되물었다. 이번에는 카네프가 나서서 대답을 이어나갔다.

“당연한 거 아냐? 네가 뭘 봤다고 패배자니 뭐니 지껄여? 그리고 저 녀석이 농장 일을 얼마나 잘하는데. 딸기 수확하는 일도 여기서 제일 잘할걸?”

“하핫!”

카네프의 말에 클라디온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눈에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그게 패배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벌을 받기 위해 이곳에 보내졌다고 해도, 어떻게든 다시 가문으로 돌아오려고 발버둥 쳤어야 했습니다. 베르딕 가문의 자손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에서 시간 낭비라니!”

“그렇게 패배자, 패배자 거릴 거면. 뭣 하러 데리러 왔어? 그냥 여기서 평화롭게 지내도록 놔두지?”

“아버님의 명령입니다. 동생을 이곳으로 보내셨던 할아버님도 이번 일에 동의하셨습니다.”

“그 영감탱이 완전 자기 맘대로…….”

가문의 주인인 엘프리드의 아버지와 카엘을 언급했다. 베르딕 가문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두 사람의 결정이니, 외부인인 우리가 끼어들기도 어려웠다.

“큰 형님.”

지금껏 가만히 있었던 엘프리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말해 보아라.”

“아버님과 할아버님의 명령이라면 당연히 따라야겠죠. 가능하다면 마지막 정리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이곳에 오랫동안 신세를 졌던 만큼, 폐를 끼치지 않게 마무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엘린! 너 정말로…….”

“괜찮아요, 시현 선배.”

엘프리드는 서글프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뭐라 더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살짝 고개를 흔들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끝이냐?”

“네, 큰 형님.”

클라디온은 조용히 엘프리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틀.”

“…….”

“가문에는 내가 말해놓을 테니. 이틀 동안 잘 마무리 짓도록 해라.”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형님.”

“이틀 뒤에 다시 오겠다.”

-벌떡.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말과 형식적인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건물을 빠져나와 이끌고 온 부하들을 데리고 곧장 떠나갔다.

남겨진 세 사람이 있는 방에는 한동안 침묵이 계속 맴돌았다.

“에이씨! 저 재수 없는 놈 때문에 낮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이게 뭐야.”

카네프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릿느릿 입구 쪽으로 향한 그는 문고리를 잡고 무심하게 물었다.

“너는 그걸로 괜찮은 거야?”

“…….”

엘프리드는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다시 낮잠 자러 간다. 저녁 먹을 때 깨워.”

카네프는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한 사람이 더 떠나가고.

나와 엘프리드만 남은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나도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속으로 끙끙 앓았다.

결국.

리아네가 방문을 열 때까지 엘프리드와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뭔가 찝찝하고 답답한 기분을 품에 안은 채, 방으로 돌아가는 엘프리드를 마냥 지켜봐야 했다.

* * *

그 날 저녁.

엘프리드가 농장을 떠난다는 소식은 금방 사람들에게 퍼졌다.

“엘린 오라버니, 정말 가문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야?”

“하하, 그렇게 됐네. 애초에 벌을 받기 위해 여기에 왔는데. 생각보다 너무 오래 머무르긴 했지.”

“에에∼ 너무 아쉽다.”

“괜찮아. 앞으로 계속 못 보는 것도 아닌데 뭘.”

릴리아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해졌다. 엘프리드는 가벼운 미소를 보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너무 아쉽네요. 엘린 선배님에게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내가 도움은 무슨…… 앞으로는 우르키, 네가 시현 선배 좀 많이 도와줘.”

“꼭 그렇게 할게요.”

함께한 시간에 비해 사이가 굉장히 돈독했던 우르키와도 이야기를 나누며 아쉬움을 달랬다.

“제가 없었던 사이에 베르딕 가문에서 다녀갔군요. 그것도 엘린의 큰형이 직접 찾아왔었다니.”

“저도 깜짝 놀랐어요, 안드라스 씨.”

“엘린이 가문으로 돌아가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조금 갑작스럽긴 하군요. 뭔가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런 건 못 들었어요. 농장에 있는 게 시간 낭비라면서 기분 나쁜 말만 잔뜩 늘어놓고 돌아갔거든요. 원래 베르딕 가문 사람들은 다 저렇나요?”

내가 볼멘소리를 내자 안드라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예법은 비슷할지라도 그 분위기는 귀족 가문마다 다른데. 그중에서도 베르딕 가문은 가문 일원들에게 엄격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가문에 대한 충성심과 자존심이 대단합니다.”

“으음…… 엘린이 처음 농장에 왔을 때를 생각하면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그래도 동생에게 패배자니 뭐니 하는 건 좀 심한 거 아닌가요?”

“귀족 가문에서는 형제끼리 사이가 안 좋은 경우가 꽤 흔한 일입니다. 오히려 저와 릴리아 같은 경우가 드문 편에 속하죠.”

“에휴…….”

안드라스의 자세한 설명에도 나의 답답함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빠.”

“응?”

“엘린 오빠. 이제 농장에서 떠나는 거야?”

은율이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은율이를 무릎 위에 올리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엘린 오빠가 안 갔으면 좋겠어?”

“응. 그리고 그리랑 피니도 슬퍼할 거야.”

“그렇겠네.”

새끼 그리핀들은 나와 은율이 다음으로 엘프리드를 많이 따랐으니까.

나는 울적한 마음을 숨기며, 슬퍼하는 은율이를 달래줬다.

“엘린 오빠가 돌아가더라도, 농장에 자주 찾아오라고 할게. 은율이를 많이 좋아하니까 분명 그렇게 할 거야.”

“응…….”

은율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최대한 웃으려고 하면서도, 자꾸 얼굴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옆에 있던 안드라스도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날 저녁 식사 시간에는 떠나가는 엘프리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아쉬움에 계속 끊어지지 않던 대화는 자연스럽게 송별회 이야기로 이어졌다.

떠나기 하루 전날인 내일.

우리는 농장에서 조촐하게나마 송별회를 열기로 했다.

* * *

“오늘은 안 도와줘도 되는데…….”

“하하, 괜찮아요. 어제도 말했다시피 마무리는 제대로 하고 가야죠.”

엘프리드는 농장을 떠나기 하루 전날에도 딸기밭 수확을 도왔다.

모두가 오늘 같은 날은 좀 편하게 있으라고 권했지만, 오히려 본인이 강경한 태도로 거절했다.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일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헛헛해지는 것 같았다.

“아…… 이제 엘프리드 님은 본래 태어났던 가문으로 돌아가시는군요.”

“에? 잘생긴 마족 오빠 이제 못 보는 거예요?”

엘프리드가 떠난다는 이야기에 라구스와 미루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됐네요,”

“너무 아쉽군요.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마을 주민들 모두 제대로 작별인사를 전했을 텐데요.”

“잘생긴 마족 오빠가 검술 알려주는 일은 이제 못 하겠네요. 마을에 남자애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엄청나게 실망할 거예요.”

수인들에게 마족은 항상 껄끄러운 대상이지만, 농장 식구들에 한해서는 예외였다.

딸기밭에서 마족과 수인이 스스럼없이 함께 일하는 건 이제 특별하지도 않은 광경이었다.

남은 딸기밭 수확을 재빨리 끝낸 수인들은 우르르 엘프리드에게 몰려들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엘프리드 님.”

“가문으로 돌아가셔도 건강하세요.”

“나중에 놀러 오시면 항상 최고로 맛있는 딸기를 준비해놓겠습니다.”

수인들은 각자의 아쉬움과 고마움을 담아 작별인사를 건넸다.

엘프리드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들의 인사를 하나씩 받아주었다.

“뒷정리는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엘프리드는 끝까지 남아서 도우려고 했지만, 억지로 등을 떠미는 수인들에 밀려 조금 일찍 농장으로 돌아가게 됐다.

나는 엘프리드와 나란히 길을 걸으며 평소처럼 대화를 시작했다.

“이제 정말로 겨울이 끝나가는 것 같네. 아까 보니까 벌써 꽃봉오리가 필 것 같더라니까.”

“그렇네요. 지독하게 눈보라 칠 때는 언제 겨울이 끝나나 싶었는데. 어느새 봄이 코앞이네요.”

“정말 시간 빠르다, 빨라.”

“…….”

“…….”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대화가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시시콜콜한 잡담이 끊임없이 쏟아졌을 텐데. 오늘따라 하고 싶은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농장이 가까워졌다.

-부우우우우우!!

멀리서 들려오는 야쿰의 울음소리.

문득 엘프리드와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길을 벗어나 야쿰이 잘 보이는 울타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너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야쿰 엄청 무서워했잖아. 기억나?”

“기억나고 말 것도 없죠. 지금도 무서운 건 마찬가지니까요.”

“왜? 요즘에는 축사에도 잘 들어가잖아? 이제는 조금 귀엽게 느껴지지 않아?”

내 은근한 물음에 엘프리드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익숙해진 거죠. 그리고 매번 말하지만, 마계에서 야쿰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현 선배뿐이라니까요.”

“아…… 옛날 생각난다. 너 처음에 와서 엄청 재수 없었을 때. 아꿍이가 달려든 것 때문에 기절했었잖아.”

“으으. 제발 그 이야기는 이제 좀 잊으세요. 언제까지 계속하실 거예요?”

“언제까지 하긴. 이건 평생 안줏감이지. 예전에도 말했었지? 나중에 너 손자, 손녀한테도 다 이야기할 거라고.”

엘프리드는 ‘정말 지독하네.’라고 중얼거리다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따라서 나도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울타리에 양손을 올려놓은 채 조용히 야쿰들을 바라봤다. 엘프리드도 뒤편에 서서 나란히 시선을 보냈다.

그러다 내가 먼저 무심하게 한마디를 꺼냈다.

“너…… 정말로 떠날 거야?”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