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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352화 (352/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52화

베르딕의 방문(4)

“너 정말로 떠날 거야?”

“…….”

질문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에 슬쩍 옆을 살펴봤다. 엘프리드는 복잡한 표정으로 울타리 너머의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괜히 말을 꺼내 심란하게 했나?’ 하는 걱정이 들 때쯤. 굳게 닫혀 있던 엘프리드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옳은 일인지, 또 뭐가 제일 중요한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냐?”

“하하. 정말로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으면 좋겠네요.”

그는 잠시 힘없는 미소를 보였다.

“농장에 오기 전만 해도 제게는 강해지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어요.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수련에 매달렸고,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죠.”

“으음. 확실히 그때는 그랬지.”

처음 농장에 왔을 때.

그는 과하게 예민하고, 공격적인 데다가 무언가에 쫓기듯 수련에 집착했었다.

“그때는 제가 너무 여유가 없었어요. 형제들보다 점점 뒤처진다는 생각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근데 여기에 와서 생각이 많이 변했어요.”

“…….”

“힘들게 농장일을 하다 보니, 점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면서.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알겠더라고요. 이곳에 계속 남겠다고 한 것도 조금 더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서예요. 물론 농장 식구들과 지내는 게 즐거웠기 때문도 있었고요.”

엘프리드는 과거를 회상하며 흐릿하게 웃다가, 금세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어제 큰형님을 만나고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곳에서 너무 어리광부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저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목표는 아직도 큰형님이거든요.”

“어리광이라니! 너는 농장일이 아무리 바빠도 수련은 절대 안 빼먹잖아. 너처럼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단순히 위로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엘프리드는 실제로 매일매일 수련을 빼먹지 않았다. 농장일이 너무 바빠서 시간이 부족한 날은 잠을 줄여서라도 수련 시간을 채웠다.

그렇게 꾸준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속으로 존경심이 생길 정도였다.

물론 검술 수련을 같이하자고 매달릴 때마다 자주 도망치긴 했지만…….

열심히 노력했다는 말에 엘프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베르딕 가문 사람들에게는 아주 평범한 일이에요. 한참 어린아이들도 이정도 수련은 전부 하고 있으니까요.”

“으으…… 나는 매일 그렇게 수련하면 절대 몸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

“하하! 익숙해지면 할 만하다니까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젯밤에 조용히 고민을 해봤는데.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곳에서 지내는 생활은 너무 즐겁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목표했던 곳에서 아예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

“으음…….”

엘프리드의 얼굴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다. 나는 오히려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엘프리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무 끙끙대면서 고민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

“네가 진심으로 생각해서 내놓은 선택이라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예전의 엘린과는 완전 달라졌으니까. 그리고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리던, 나와 농장 식구들은 너를 응원할 거야.”

“시현 선배…….”

엘프리드는 감동한 표정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걱정과 근심으로 어지러웠던 엘프리드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리고 이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근데 시현 선배, 저 없이도 괜찮으시겠어요? 나중에 농장일이 너무 버겁다고 뒤에서 저 욕하시는 거 아니에요?”

“짜식이! 너 없을 때도 나 혼자 농장일 거뜬하게 다 했어. 내가 이 농장 최고참인 거 몰라?”

“하하핫!”

“내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네가 하고 싶은 것만 잘 생각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고마워요, 시현 선배.”

“고맙긴…… 얼른 올라가자. 사람들이 우리 기다리고 있겠다.”

“네!”

이야기를 마친 우리는 조금은 홀가분해진 얼굴로 그곳을 떠나갔다.

* * *

시간은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

클라디온과 약속했던 날이 되었다.

어젯밤.

농장 식구가 전부 모여 시끌벅적한 송별회도 끝냈지만, 배웅하기 위해 나온 모두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떠날 준비를 끝낸 엘프리드는 멍한 눈빛으로 산과 하늘을 바라봤다.

-우우우우웅!

차원도약 마법진에서 마력의 진동이 일어나고 밝은 빛과 함께 사람의 형상이 하나둘 흐릿하게 나타났다.

마법진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지난번에 봤던 베르딕 가문의 장남, 클라디온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생각지 못했던 또 한 명의 익숙한 마족이 함께했다.

“어…… 카엘 어르신?”

“할아버님?”

“모두 오랜만이구나.”

여유로운 미소의 남자아이가 천천히 손을 흔들며 등장했다.

베르딕 가문의 전대 가주, 그리고 엘프리드의 할아버지인 ‘카엘 스켈드 베르딕’이었다.

다른 농장 식구들도 그를 알아보자마자 얼른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반면에 카네프는 ‘저 늙은이가 여긴 왜?’라고 중얼거렸다.

그 덕분에 베르딕 가문 쪽 사람들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다행히 카엘이 신경 쓰지 말라는 손짓을 보내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일행들을 대표해서 카엘을 맞이했다.

“카엘 어르신.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 같은 늙은이에게 인제 와서 별일이 있겠느냐? 죽었다는 소식만 없다면 잘 지냈다는 뜻이겠지.”

“하하, 농담으로 듣겠습니다. 그것보다 어르신이 누추한 이곳에는 무슨 일로?”

“손자의 일도 있고. 네 얼굴도 보고 싶어서 겸사겸사 와봤어. 그동안 잘 지냈느냐?”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는 카엘과 일상적인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평범한 대화였지만, 카엘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동안 못난 손자를 맡아주느라 고생했어. 원래는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에게 부탁한 일인데. 네가 오히려 더 많은 역할을 한 것 같아.”

“헹! 나한테 짐 맡기듯 떠넘길 땐 언제고…….”

카네프의 비아냥에도 카엘은 여유롭게 대응했다.

“오히려 저놈에게 영향을 안 받은 게 다행인 것 같아. 정말 여러모로 너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

“별말씀을…… 저도 엘린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는걸요.”

나와 카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클라디온은 곧바로 엘프리드 앞으로 다가섰다.

“떠날 준비는 끝냈느냐?”

“…….”

“작별인사는 이미 끝마쳤을 거라 생각한다. 돌아가면 아버님과 가문의 어르신들에게 인사드려야 할 테니, 곧바로 준비하도록 해라.”

그가 뒤에 신호를 주자. 병사들이 재빨리 다가와 준비한 짐을 챙겼다. 엘프리드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할아버지…….”

작은 여우 소녀가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섰다.

“오, 은율이구나. 못 본 사이에 많이 커졌구나.”

카엘은 은율이를 발견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둘은 여전히 할아버지와 손녀보다는 어린 남매와 같은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운 게냐? 혹시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 못살게 굴기라도 했느냐? 이 할아버지가 대신 혼내줄까?”

“이 망할 영감탱이가! 내가 왜 은율이를 못살게 굴어!”

“지, 진정하십시오, 카네프 님!”

“차, 참아요, 카네프 아저씨.”

잔뜩 뿔이 난 카네프를 슈나르페 남매가 막아섰다. 카엘은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할아버지.”

“그래, 은율아. 말해 보아라.”

“엘린 오빠. 안 데려가면 안 돼?”

“저기 엘프리드를 말이냐?”

“응.”

은율이는 나에게 주로 사용하는 초롱초롱 눈빛을 카엘에게 보냈다. 거기에 슬픈 울먹임도 함께 담겨 있어 너무나도 애처롭게 느껴졌다.

“허허, 은율이는 엘프리드가 계속 농장에 남아 있길 원하느냐?”

“여기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 나랑도 잘 놀아주고. 그리랑 피니도 잘 놀아줘.”

“그리? 피니?”

“여기 농장에서 키우는 새끼 그리핀이야. 엘린 오빠가 산책을 잘 시켜줘서 둘 다 엄청 좋아해.”

“그런 일도 있었구나.”

카엘은 다시 한번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은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은율이의 부탁을 들어주고는 싶은데. 그렇게는 못 할 것 같구나.”

“왜? 저기 사장님처럼, 할아버지가 제일 대장이잖아. 엘린 오빠한테 가지 말라고 하면 안 돼?”

“예전에는 내가 저 아이를 강제로 이곳으로 보냈지만, 지금은 내가 나설 수 없단다.”

그는 나와 은율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조금 진지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은율아. 언젠가는 너도 아빠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거란다.”

“내가?”

“그래. 지금은 까마득하게 느껴질지도 몰라도. 금방 그 순간이 찾아올 거란다. 그때는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단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나설 수 없을 것 같구나.”

“……!”

분명 은율이에게 한 말인데. 순간 내 가슴이 뜨끔! 하는 느낌을 받았다.

카엘이 말하는 그 순간이 찾아오면, 저렇게 차분히 지켜봐 줄 자신이 없어서일지도 몰랐다.

“할아버지가 하는 말.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

“은율이에게는 아직 어려울 수도 있겠구나.”

“우웅…… 잘은 몰라도 왠지 할아버지 말대로 해야 할 것 같아. 아빠랑 같이 기다릴게.”

“허허! 못 본 사이에 겉모습만 큰 게 아니라, 마음가짐도 훨씬 더 의젓해졌구나. 조금만 더 있으면 금방 어른이 되겠어.”

“헤헤!”

카엘의 칭찬에 은율이가 부끄러워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나는 은율이의 손을 잡아주며 카엘을 바라봤다.

만약에 내 생각이 맞다면 그는…….

“그동안 동생이 신세를 졌습니다. 이 빚은 언젠가 베르딕 가문의 이름으로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클라디온은 우리에게 딱딱한 감사 인사를 남긴 뒤, 엘프리드에게 손짓했다.

“그럼 돌아가자.”

“…….”

“왜 가만히 있느냐? 얼른 움직여야 한다는 내 말 못 들었느냐?”

“큰형님…….”

엘프리드의 눈동자에 잠시 수많은 감정의 일렁임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짧은 반짝임과 함께 고요함이 찾아왔다.

인상을 찌푸린 클라디온이 앞으로 나서려던 순간.

엘프리드는 결연한 표정과 눈빛으로 형을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큰형님.”

“뭐?”

“저는 여기에 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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