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53화
엘프리드의 결심(1)
“저는 여기에 남도록 하겠습니다.”
농장에 남겠다는 엘프리드.
자연스럽게 클라디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이곳에 있고 싶습니다.”
“질 나쁜 장난을 치려거든 당장 그만두거라.”
“장난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이곳에 남고 싶어요.”
엘프리드는 또박또박한 말투로 다시 한번 더 자기 뜻을 밝혔다.
클라디온을 포함한, 베르딕가 인물들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돌발행동에 당황스러운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농장 식구들 모두 ‘설마?’ 하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엘프리드. 단순한 변덕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려는 것이냐?”
“단순한 변덕이 아니에요. 오랜 시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에요.”
“오랫동안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 겨우 이곳에서 시간 낭비를 계속하겠다니. 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 인정할 수 없다. 잔말 말고 얼른 가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라!”
“시간 낭비가 아니에요! 저는 이곳에 있으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계속 가문에 있었다면 절대 배우지 못했을 것들이에요.”
첫날과는 다르게 엘프리드는 압박감에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클라디온은 조금 더 싸늘해진 눈빛으로 물었다.
“가문에 있을 때 목표 했던 것들은 전부 포기한 것이냐?”
“스스로 정했던 목표를 포기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 목표는 이곳에서도 충분히…….”
“헛소리!”
“…….”
“나는 처음부터 너를 이곳에 보내는 일을 반대했었다. 이런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도대체 뭘 배울 수 있다는 건지…… 더 이야기 들어볼 것도 없다. 강제로라도 너를 가문으로…….”
“그만하거라.”
두 사람의 감정이 더욱 격해지려던 순간.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엘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등장에 두 사람 모두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다 큰 녀석들이 서로 자신의 말만 앞세워 고집이라니. 쯧쯧! 부끄럽지도 않으냐?”
“…….”
“…….”
따끔한 말로 타이른 카엘은 엘프리드 쪽을 먼저 바라봤다.
“엘프리드.”
“네, 할아버님.”
“이곳에 남겠다는 결정은 다른 사람의 이견이 아니라, 네가 스스로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 맞느냐?”
“맞습니다.”
“이제 어린 나이도 아니고. 본인이 있어야 할 곳 정도는 스스로 정해야지.”
엘프리드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에 클라디온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할아버님!”
“내 말에 틀린 곳이라도 있느냐?”
“저는 아버지에게 동생을 데려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건 엘프리드의 결정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내가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이제 엘프리드도 스스로 있어야 할 곳을 정할 때라고.”
“저는 단순한 치기에서 비롯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르딕 가 일원으로서 책임감 없는 동생의 행동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흐음. 너는 엘프리드의 행동이 책임감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카엘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엘프리드 쪽을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엘프리드?”
“……?”
“네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우리에게 증명할 수 있겠느냐?”
“그건…….”
-덥석!
엘프리드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당연하지! 증명?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고.”
“카, 카네프 님?”
카네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클라디온을 향해 도발적인 시선을 보냈다.
“어이, 베르딕 애송이. 아까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뭐다 하면서 우리를 무시했지? 여기서 일하는 게 얼마나 빡빡한 줄 알아? 아마 상상도 못 할 거다.”
“…….”
“저기 영감탱이 말대로 이 녀석이 증명해낸다면, 너는 아까 한 말에 대해서 책임져야 할 거야.”
뒤에 있던 농장 식구들도 기세를 타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아! 엘린 오라버니랑 우리를 무시한 거 후회할 거야!”
“다른 가문의 일이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저도 엘린 군이 이곳에서 헛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엘린 님은 무슨 일이든 항상 열심히 최선을 다하셨어요. 그 노력들은 분명 헛된 게 아니에요.”
“저는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예전 일들은 잘 몰라요. 그래도 제가 아는 엘린 선배님이라면 분명 틀리지 않았을 거예요.”
엘프리드는 고개를 돌려 농장 식구들 쪽을 바라봤다. 우리는 환한 미소와 함께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우리의 기운을 받은 엘프리드의 얼굴에 다시 한번 굳은 결의가 드러났다.
“할아버님.”
“그래, 말해 보아라.”
“저는 이곳으로 처음 보내졌을 때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그때처럼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호오?”
카엘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생겨났다.
“스스로 내린 결정에 대해 책임질 각오도 돼 있겠지?”
“물론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너 스스로 증명해 보아라. 베르딕 가문의 방식대로 말이야.”
말을 끝마친 카엘을 손가락을 들어 클라디온을 가리켰다.
“일주일 뒤. 두 사람의 대결로 모든 걸 결정하겠다.”
* * *
카엘과 클라디온.
그리고 베르딕 가문의 사람들은 다시 농장을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농장 식구들은 우르르 엘프리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엘프리드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결정을 바꿔서 죄송해요. 어제는 모두 모여서 송별회도 열어주셨는데…….”
“그 정도로 뭘!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오히려 잘했어.”
“시현 오라버니 말이 맞아. 이대로 훌쩍 떠나 버렸으면 정말 아쉬웠을 거야.”
“어제는 맛있는 거 많이 먹었으니, 오랜만에 회식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맞아요.”
사람들은 엘프리드가 민망하지 않도록 위로의 말을 한마디씩 건넸다.
“엘린 오빠! 그럼 이제 안 가도 되는 거야?”
“응.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당분간은 내 발로 농장을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와아아!”
은율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크게 기뻐하더니, 그대로 엘프리드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엘프리드도 은율이를 번쩍 안아 들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즐기던 와중.
누군가의 뚱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어이, 어이. 모두 다 그렇게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왜 그러세요, 사장님? 설마 엘린이 농장에 남은 게 마음에 안 드세요?”
“그 말이 아니라. 아직 제일 중요한 게 남았잖아.”
카네프의 말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한풀 꺾였다. 그의 말대로 엘프리드가 농장에 남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존재했다.
일주일 뒤에 벌어지는
엘프리드와 클리디온의 대결.
“엘린 너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잘 알지?”
“…….”
“상대는 베르딕 가문의 장남, 훗날 가문을 이을 후계자야. 직접 상대해 보지 않아서 잘은 몰라도, 아까 기세를 내뿜는 걸 보면 만만치 않아 보였어.”
카네프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드라스도 설명을 덧붙였다.
“카네프 님의 말대로입니다. 저 역시 직접 그 실력을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베르딕 가문의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재능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아까 그 녀석 살벌한 눈빛 봤지? 아마 적당히 상대할 생각은 전혀 없을 거야.”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한풀 꺾인 것도 모자라 완전히 어둡게 변해 버렸다.
클라디온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면 엘프리드는 꼼짝없이 가문으로 끌려갈 상황이었다.
잠시 기뻐하던 사람들의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 그래도 당사자인 엘프리드가 밝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까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요. 큰형님과의 대결. 분명 쉽지는 않겠지만, 저도 무기력하게 질 생각은 없으니까요.”
엘린 녀석.
언제 이렇게 늠름해졌지?
요 며칠 새에 엘프리드는 정말 많이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봤던 나, 안드라스, 리아네가 대견스럽게 쳐다보는…….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말. 진심이야?”
카네프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
“방금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설마 거짓말이야?”
“아뇨! 당연히 진심으로 한 말이죠.”
“그럼 우리 농장의 명예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거지?”
“……예?”
“아까 네 형이 하는 말 못 들었어? 이곳에서 하는 일이 모두 시간 낭비라잖아. 이 농장을 무시하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안 그래?”
“어. 음…… 그게…… 그렇죠.”
엘프리드는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걸 느끼면서도, 뭔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카네프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깃들었다.
“나는 말이야. 자기 잘났다고 우쭐대는 놈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어. 그놈들의 잘난 콧대를 제대로 꺾어놓지 못하면 밤에 잠이 안 올 정도거든.”
나왔다!
사장님 특유의 삐뚤어진 성격!
이미 카네프를 오랫동안 겪은 사람들은 저 사악한 미소를 보며 불안에 떨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좀 촉박하긴 해도. 그 녀석에게 한 방 먹이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일주일 뒤에 그 녀석이 당황하는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되는데? 큭큭!”
-덥석!
“카, 카네프 님?”
카네프는 엘프리드의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엘프리드는 어미의 입에 물린 새끼 고양이처럼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당장 특훈이다. 일주일 동안 제대로 해보자.”
“자, 잠깐만요.”
“큭큭.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마음. 일주일 동안은 절대 변하지 말라고.”
“으아아! 시현 선배! 안드라스 선배! 은율아!”
엘프리드는 뒤늦게 불안함을 느끼고 온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먹잇감을 붙든 카네프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스으으윽!
“헉! 테르잔 님?”
갑자기 그림자에서 테르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카네프와 엘프리드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큰일났네…….”
“예? 뭐가 큰일이라는 거죠?”
“단장의 일주일 특훈은 나도 버티기 힘들거든.”
“그, 그 정도 인가요?”
“으음. 그래도 성과는 꽤 있을 거야.”
“…….”
“살아만 있다면.”
테르잔의 마지막 말이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핼쑥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이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엘린.
제발 일주일 동안 무사히 버텨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