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54화
엘프리드의 결심(2)
-쿠당탕.
“으아악!”
땅바닥을 뒹구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변에 자욱하게 피어나는 흙먼지 너머로 끙끙 앓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살벌한 광경에 저절로 몸이 떨려왔다.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걱정이 담긴 내 물음에 안드라스가 얼굴을 흐리며 대답했다.
“카네프 님이 한번 하겠다고 하셨으면 누구도 못 말립니다. 그리고 일단 엘린 군도 계속 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으니, 지금은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으음…….”
“시현 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네프 님이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처럼 보여도, 아마 엘린 군의 상태를 충분히 살피고 있으실 겁니다.”
“그, 그런가요?”
-쿠당탕탕!
나와 안드라스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엘프리드는 다시 한 번 더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화려하게 처박힌 그는 충격에 쉽사리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렇게 계속 누워 있을 거야? 서있는 시간보다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아서야 수련이 제대로 되겠어?”
“끄응…… 아닙니다.”
“클라디온이라는 녀석은 지금 네가 상대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강할 거야. 겨우 이 정도에 빌빌댈 거면 여기서 당장 포기해.”
“괜찮습니다. 계속 해주십시오.”
엘프리드는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도 두 눈동자에 투지를 불태웠다.
카네프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살벌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투지는 살아 있나 보네. 그럼 이번엔 조금 더 단계를 올려볼까?”
-꽈아앙!!
그 뒤로 수련장에는 묵직한 충돌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주변에 울려 퍼지던 소음이 잠잠해졌을 때.
그곳에는 완전히 뻗어버린 엘프리드를 카네프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쓰러진 엘프리드에게 안드라스가 급하게 달려가 상태를 확인했다. 조금 떨어져 상황을 살펴봤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없는 듯 보였다.
안드라스는 헐렁한 소매에서 포션을 하나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유리병 입구를 엘프리드 입에 꽂아 넣고, 마치 주유하듯 포션을 주입시켰다.
“이 정도가지고 벌써 뻗어버리다니…… 쯧쯧.”
“사장님, 힘 조절 좀 더 하셔야하는 거 아니에요? 이러다 대결을 펼치기 전에 애 먼저 잡겠어요.”
카네프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힘 조절 한 거야. 그 베르딕 애송이의 수준을 생각하면 지금 정도로는 택도 없는 수준이라고.”
“그 정도예요?”
“녀석은 괴물 같은 영감탱이가 버티고 있는 가문의 후계자야. 절대 만만한 수준일리가 없지.”
“…….”
“거기다 재수 없이 구는 것과는 별개로, 은연중에 드러나는 기세가 만만치 않아 보였어. 가문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는 재능이라는 것도 단순한 소문은 아닐 거야.”
카네프는 머리가 복잡하다는 표정을 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벅벅 문질렀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는 카네프에게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뭐…… 내가 예상한 것 보다는 엘린이 잘 버티고 있긴 한데. 아마 이것만으로는 쉽지 않은 대결이 될 거야. 단순히 실전 감각을 끌어올린다고 압도할 만한 상대가 아니거든. 거기다 이 대결은 엘린에게 너무 불리한 싸움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애초에 불리한 싸움이라니?”
“단순히 생각해 봐봐. 그 클라디온이라는 녀석과 엘린은 결국 같은 베르딕 가문의 검술을 익히고 수련한 놈들이야.”
“그렇죠.”
“같은 검술을 배운 사람들끼리는 약간의 실력 차이가 큰 벽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어. 서로 약점과 강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변수가 생기기 힘들고, 자연스럽게 실력 차를 뒤집기 어려운거야.”
“아…….”
카네프의 설명을 듣자마자 엘프리드에게 얼마나 안 좋은 상황인지 깨달았다. 대결에 변수가 적을수록 엘프리드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변수를 만들어 낼 방법이 없을까요? 왜 소설 같은 데서 보면 이런 위기상황에 필살기 같은 거 전수해 주잖아요. 그런 거 없어요?”
“애들 장난도 아닌데 필살기가 왜 나와? 그런 속편한 방법이 있으면 내가 벌써 해줬지. 나는 뭐 좋아서 애를 땅바닥에 처박는 줄 아나.”
“…….”
“아! 진짜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쩝…….”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엘프리드는 온 힘을 다해 대결을 준비하고 있지만, 단순히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듯했다.
“지금 엘린에게 가장 도움이 될 사람은 괴물 영감탱이밖에 없어. 베르딕 검술에 가장 능통하고, 누구보다 경험도 풍부하니까.”
“그런데 카엘 어르신에게 도움 받기는 어렵겠죠?”
“당연하지. 클라디온도 그 영감탱이의 손자야. 손자와 손자의 대결에서 어느 한쪽으로 끼어들고 싶지 않겠지.”
카네프와 내가 카엘 어르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그때. 엘프리드를 돌보고 있던 안드라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카엘 님 말고 한분 더 계시지 않습니까?”
“네?”
“베르딕 검술에 대해 능통하고, 누구보다 경험이 풍부하신. 그리고 시현 님이 잘 알고계신 분이요.”
으응?
내가 잘 알고 있는 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베르딕 검술을 잘 알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누구…….
“아앗?!”
나는 머릿속에서 누군가를 떠올림과 동시에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 * *
넓게 초원이 펼쳐진 곳에 요정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하!」
「시현이다, 뾰! 시현이 놀러왔다, 뾰!」
「안녕하세요, 시현 님! 어서오세요, 뾰!」
시현계에 완전히 적응한 요정들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꽃을 심고 있었다.
아마 겨울이 끝날 때쯤이면 요정들의 웃음소리뿐만 아니라, 향긋한 꽃향기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나는 공손한 자세로 앉아 누군가의 눈치를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크흠…….”
“…….”
“그러니까 네 말을 정리하자면. 카엘의 손자가 또 다른 카엘의 손자를 이길 수 있게 나보고 도와달라는 말이냐?”
“네, 맞습니다.”
“허허! 이것 참…… 별 해괴한 부탁을 다 받는구나.”
“제발 도와주세요, 스승님. 지금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스승님밖에 없어요.”
나는 벨리온을 향해 간곡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부탁을 받은 벨리온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카엘의 손자를 가르쳐달라니…… 썩 내키진 않는데.”
“왜, 왜죠?”
“그 녀석과 나는 서로의 등을 맡겼던 전우이면서, 서로의 검술을 인정하는 호적수였다. 그 녀석의 검술을 이어받은 손자를 내가 가르친다는 게 좀 찝찝해.”
“완전히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며칠 도움을 받는 것뿐이잖아요.”
“그것도 그렇고. 애초에 네 녀석도 마음에 안 들어.”
“네?”
“제자라는 놈이 자기 필요할 때만 스승을 찾아오고 말이야. 지금 제일 가르침이 필요한 건 너야, 너!”
“…….”
벨리온은 섭섭함을 잔뜩 드러내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나도 찔리는 부분이 있는지라 움찔 몸을 떨었다.
그래도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는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다시 벨리온에게 말을 걸었다.
“에이, 스승님 왜 그러세요. 설마 삐지신 거예요?”
“그래, 삐졌다 이놈아.”
“섭섭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워낙 정신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스승님을 잘 챙기지 못한 것 같아요.”
“…….”
“앞으로는 절대 잊지 않고 자주 찾아뵐게요. 스승님이 좋아하시는 맥주랑 간식도 잔뜩 챙겨오고요.”
그러면서 주변에 있던 아기 요정들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아기 요정들은 벨리온 곁으로 날아들어 어깨를 조물조물 주무르기 시작했다.
「벨리온 님! 저희가 어깨 주물러 드릴 테니까 화푸세요, 뾰!」
「시현 님은 절대 약속을 어기실 분이 아니니까 한 번만 믿어주세요, 뾰!」
“크흠, 큼!”
조금은 기분이 풀렸는지 벨리온의 섭섭한 기색이 조금 사라졌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더 부탁의 말을 꺼냈다.
“스승님. 한 번만 도와주세요. 네?”
“흐음…… 지금까지 한 말 모두 거짓말은 아니겠지?”
“물론이죠! 제 딸, 은율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할게요.”
내가 은율이까지 직접 언급하며 다짐하자, 벨리온의 얼굴에 살짝 흡족한 기색이 돌았다.
“크흠! 일단 그 녀석을 데리고 와봐.”
“도와주시는 거예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카엘의 손자를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건 역시 껄끄러워. 그래도 약간이나마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것 같으니까 일단 데려와 봐.”
“잠시만요!”
벨리온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급히 농장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엘프리드와 함께 시현계로 되돌아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엘프리드는 안드라스의 오른쪽 어깨에 시체처럼 들려진 상태였다.
“뭐야? 저 만신창이인 놈이 카엘의 손자라는 거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벨리온 님. 금방 깨우겠습니다.”
안드라스는 어깨에 있던 엘프리드를 땅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이번에는 포션 두 병을 꺼내 차례로 입 안에 흘려보냈다.
“커헉…… 컥!”
다행히 엘프리드는 의식을 되찾고 벌떡 일어섰다.
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자세를 잡았다.
“정신이 드냐?”
“네, 벨리온 님.”
“상황은 대충 제자를 통해 전해 들었다. 꽤 뛰어난 실력을 가진 형제와 대결을 해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벨리온은 한동안 엘프리드를 이러 저리 살펴보다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에 떨어져있던 적당한 길이의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들었다.
“공격해 봐.”
“네?”
“어떤 식이든 상관없다. 이 나뭇가지를 꺾겠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공격해 봐라.”
엘프리드는 벨리온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방 잡생각을 떨쳐 버리고 자세를 취했다.
-타앗!
바닥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엘프리드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계속 카네프와 수련을 한 탓인지, 처음부터 아주 매서운 공격이 벨리온을 향해 쏟아졌다.
-스으으윽…… 툭!
“어……?”
나뭇가지가 엘프리드의 검을 살짝 건드리자, 정확했던 공격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빗나갔다. 엘프리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재차 공격을 이어나갔다.
-스으으윽…… 툭!
이번에도 벨리온의 나뭇가지가 검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으윽?!”
-태애앵. 태앵.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물론이고, 엘프리드가 쥐고 있던 검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엘프리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땅바닥에 떨어진 검과 벨리온의 나뭇가지를 응시했다.
나와 안드라스도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봤다.
-휘익, 휘익!
벨리온은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가볍게 휘두르며 말했다.
“아까 제자에게도 말했지만, 나는 너를 가르칠 생각이 없다. 해줄 수 있는 건 이 나뭇가지로 대충 상대해 주는 것뿐.”
“…….”
“하지만 만약에 네가 이걸 통해 뭔가 깨닫게 된다면. 그때는 너의 형제와 엇비슷하게나마 겨뤄볼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