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57화
엘프리드의 결심(5)
“저 녀석…… 제법인데?”
카네프가 아주 드물게 누군가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연스럽게 농장 식구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사장님, 방금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엘린이 계속 밀리고 있던 거 아닌가요?”
“아무래도 술 도둑 영감이 제대로 알려줬나봐.”
카네프가 말하는 ‘술 도둑 영감’.
바로 스승님, 벨리온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스승님은 나뭇가지로 대충 상대해 준 것밖에 없는데 도대체 뭘 제대로 알려줬다는 거예요? 좀 알아듣게 자세히 말해주세요.”
“맞아요, 카네프 님. 혼자만 알고 계시지 말고 저희도 좀 알려주세요.”
“카네프 아저씨, 얼른!”
리아네와 릴리아도 차례로 카네프를 닦달했다. 그의 얼굴에는 귀찮음이 가득했지만, 결국 주변 성화에 못 이겨 설명을 시작했다.
“술 도둑 영감은 그 누구보다 베르딕 검술을 많이 겪어봤을 거야.”
카네프는 카엘 쪽을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는 괴물 영감탱이의 호적수라 불렸던 존재니까. 그리고 최고 수준의 베르딕 검술을 가장 치열하게 겪어본 만큼, 상대법이나 약점에 대해서도 꿰뚫어 봤을 거야.”
벨리온과 카엘.
지금까지도 마계에서 전설처럼 여겨지는 두 사람. 서로의 검술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아는 베르딕 검술의 약점을 엘린에게 알려준 거지. 직접 몸으로 느끼는 방식으로 말이야.”
“오오…….”
“역시 스승님!”
모두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안드라스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엘린 군에게 베르딕 검술의 약점을 알려준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방식을 사용했을까요? 단순히 약점을 알려주는 거라면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 많았을 텐데요.”
“네 말대로 약점을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은 많지. 하지만 이기는 법을 찾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을 거야.”
“예?”
카네프는 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너무나 당연한 거 아냐? 비슷한 실력일 때나 약점이 의미가 있는 거지. 막말로 내 약점을 너한테 알려주면, 너 나한테 이길 수 있겠냐?”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기죠.”
안드라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즉시 대답했다.
“바로 그거야. 약점을 아는 것 보다 중요한 건. 그걸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린 거지.”
“그럼 카네프 님은 지금 엘린 군이 상대의 약점 활용을 잘 이요하고 있다는 겁니까?”
“맞아. 아주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채앵! 챙!
엘프리드와 클라디온의 검이 쉴 새 없이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누구도 쉽게 우세를 점치기 힘들 정도로 치열한 대결이 계속 이어졌다.
주도권을 잡고 있는 쪽은 클라디온이지만, 그 주도권을 활용해 공격을 시도할 때마다 엘프리드가 제대로 허점을 찌르고 들어왔다.
엘프리드가 지독하게 느껴질 만큼 끈덕지게 따라붙자, 여유롭던 클라디온의 얼굴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끈덕지게 따라붙으며 상대의 흐름을 끊는 모습은 바로 벨리온이 보여준 것과 아주 흡사했다.
엘프리드가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기뻐할 만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카네프 님.”
“왜?”
“스승님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의 흐름을 끊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엘린은 저렇게 싸울 수 있는 거죠?”
내 질문에 맞춰 다시 한번 더 모두의 시선이 카네프에게로 향했다.
카네프는 여전히 귀찮아하면서도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술 도둑 영감이 말한 대로 상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 흐름에 맞춰 약점을 찌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엘린은 좀 더 쉬운 방법을 택한 것 같아.”
“쉬운 방법이요?”
“그래. 상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아예 상대의 흐름에 자신을 맞춰 버린 거지.”
나는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다.
“예? 그런 게 가능해요?”
“보통은 불가능하지. 상대의 흐름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면 오히려 제 실력을 내기 힘들어지니까.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지지.”
카네프는 검지로 두 사람을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서로 똑같은 검술을 똑같은 집안에서 똑같이 수련 받은 형제. 이제 뭐가 특별한 건지 감이 와?”
“아……!”
“그런 부분이 있었군요.”
나와 안드라스는 금방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알아듣지 못한 은율이는 카네프에게 달라붙어 팔을 흔들었다.
“그게 뭔데? 카네프 아저씨, 더 자세히 설명해 줘!”
“끄응, 그러니까 애초에 저 두 사람은 애초에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똑같은 검술을 똑같이 수련했으니, 상대적으로 쉽게 흐름을 따라할 수 있는 거지.”
이제 흐름을 알 것 같다는 말.
엘프리드는 처음부터 이 부분을 노리고 대결을 시작한 게 틀림없었다.
“그럼 이대로만 하면 엘린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거죠?”
“확실히 엘린 녀석에게 승산이 생긴 건 사실이야. 하지만 대결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확률도 떨어지겠지.”
“왜, 왜죠?”
“서로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는 해도. 상대의 흐름을 억지로 따라하는 건 한계가 있어. 당장의 승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체력이 먼저 떨어지는 쪽은 분명 엘린 쪽일 거다.”
“그렇다는 말은…….”
“아마 본인도 잘 알고 있겠지.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내야 한다는 걸.”
나는 초조한 눈빛으로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는 곳을 바라봤다. 일그러진 엘프리드의 얼굴에서 끝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힘내라, 엘린.
너는 이겨낼 수 있어!
마음속으로 간절히 응원을 보내며.
곧 판가름 날 대결의 승패를 모두와 함께 조용히 지켜봤다.
* * *
“허억…… 허억…….”
카네프가 예상한 대로 엘프리드는 이미 체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검을 휘두르는 팔에서는 감각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대결 초반 클라디온의 흐름에 맞춘 다음. 벨리온에게 몸으로 익힌 약점을 공략하는 전략은 확실히 유효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클라디온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대결이 길어지면서 엘프리드는 여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반면에 클라디온은 숨만 약간 거칠어졌을 뿐. 아직 대결을 이어나갈 여력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마지막…… 마지막 승부를 걸어야 해!’
엘프리드의 눈동자가 순간 새파랗게 빛났다. 마지막 남은 힘을 전부 끌어 모아 마지막 일결을 준비했다.
‘여기서 승부를 보려는 건가?’
대결로 수많은 경험을 쌓은 클라디온은 금방 상대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여기서 상대해 주지 않고 버티는 게 쉬운 길이겠지만…….’
동생이 스스로를 증명하겠다고 나선 대결.
비겁하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각오를 다진 마지막 승부인 만큼, 형으로써 전력으로 받아주고 싶었다.
견제를 위한 의미 없는 부딪침이 이어지던 그때.
계속 틈을 노리던 엘프리드가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지켜보는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로 과감하게 몸을 들이밀며, 공격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
상대의 저돌적인 움직임에도 클라디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땅을 디디고 있던 발에 힘을 주며 맞대응을 준비했다.
두 개의 검이 서로를 노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승부를 건 엘프리드도, 피하지 않은 클라디온도 마지막 전력을 다했다.
-카아아아앙!!
이전에 없었던 큰 충돌음.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의 검은 땅바닥에. 또 누군가의 검은 상대의 목 언저리에 겨누어졌다.
“허억…… 허억…….”
“…….”
두 형제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허억…… 허억…….”
“……아쉬운 것이냐?”
“아뇨…… 허억…… 오히려 후련해요.”
“…….”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거든요.”
일그러져 있던 엘프리드 얼굴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너무나도 환한 그 미소를 클라디온은 멍하니 바라봤다.
“큰형님은 대단해요…… 역시 제…… 목표…….”
-스르륵!
엘프리드의 신형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탓!
클라디온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동생의 팔을 붙잡았다. 다행히 땅바닥에 그대로 처박히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으앗, 엘린!”
“엘린 군!”
“엘린 오빠!”
뒤쪽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순식간에 엘프리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
클라디온도 동생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농장 식구들은 그럴 틈도 주지 않고 엘프리드를 휙 낚아채갔다.
“허허, 고생했다.”
“할아버님…….”
카엘은 흡족한 미소를 띤 채 클라디온을 격려했다.
“어떠냐. 오랜만에 상대해 본 엘프리드는?”
“…….”
“나도 꽤 놀랐단다. 저런 방식으로 너를 상대할 줄이야. 아마도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았겠지.”
“저도…… 정말 의외였습니다.”
클라디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카엘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실력이 좋아졌더군요. 아마 이곳에 있으면서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실력도 실력인데. 네가 진짜 놀란 부분은 그게 아니지 않느냐?”
“하하. 할아버님에게는 정말 못 당하겠네요.”
클라디온은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에게 흐름을 맞추고 끈덕지게 약점을 파고드는 것. 준비한 전략 자체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걸 수행해내는 자세도 대단했습니다. 힘이 부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더군요.”
“너도 처음에는 살짝 당황할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이런 침착함과 끈질김…… 예전에 엘프리드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것들이었죠.”
카엘은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만약에 엘프리드가 계속 가문에 머물렀다면. 저런 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했겠죠.”
가문을 떠나기 전의 엘프리드는 과도할 정도로 실력 향상과 승부의 결과에만 매달렸다.
오로지 이기기 위한 수련만을 거듭하며 자신을 몰아붙였다.
과거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 있던 엘프리드였다면.
오늘 보여줬던 ‘상대의 흐름에 맞추는 전략’ 같은 건 절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패배했음에도 저렇게 환한 미소를 보이다니…….
오늘 엘프리드가 대결에서 보여줬던 모든 것이 클라디온에게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어떠냐, 클라디온?”
“…….”
“아직도 엘프리드가 이곳에서 시간낭비를 했다고 생각하느냐?”
“…….”
클라디온은 고개를 돌려 엘프리드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엘린, 엘린! 내 말 들려? 괜찮아?”
“으아악, 카네프 님! 그렇게 막 포션 쏟아 부으면 안돼요!”
“이러다 포션에 익사하겠어요!”
엘프리드는 농장 식구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디온의 얼굴에 살짝 쓸쓸함이 생겨났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며 허탈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