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58화
겨울의 끝, 새로운 시작(1)
“으음…….”
쓰러져 있던 엘프리드가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다. 격렬한 대결의 후유증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앓는 소리를 냈다.
“엘린, 괜찮아? 정신이 들어?”
“시현…… 선배? 끄응, 저는 괜찮아요.”
엘프리드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잠시 멍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뭔가를 떠올리고 흠칫 몸을 떨었다.
“아! 대결은…… 제가 지고 말았네요…….”
그의 얼굴에 허탈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많이 응원해 주셨는데. 기대에 응하지 못해 죄송해요.”
“아냐! 우리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나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엘프리드를 위로했다.
“맞아, 엘린 오라버니. 진짜 다 이겼는데. 너무 아까웠어!”
“원래 쉽지 않은 대결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엘린 군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검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정말 대단한 대결이었어요.”
은율이도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여우 귀를 쫑긋거렸다.
“엘린 오빠 너무 멋있었어. 막! 이렇게 검이 빠르게 움직이는데 번쩍번쩍 했어.”
은율이가 나름 진지하게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대결 장면을 묘사했다. 귀여운 그 모습에 엘프리드도 작게 미소 지었다.
모두 위로와 응원의 말을 건네던 와중.
-스으윽.
무표정한 얼굴의 카네프가 조용히 옆으로 다가섰다.
“카네프 님…….”
“…….”
“일주일 동안 열심히 도와주셨는데…… 이기지 못해서 죄송해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엘프리드.
우리는 혹시 카네프가 이상한 말이라도 할까봐 조마조마하게 지켜봤다.
-툭. 툭.
카네프는 손을 올려 엘프리드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생각했던 것 보다 잘했어.”
“……!”
“저놈에게 한 방 먹여주지 못 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일주일 동안 고생한 보람은 있네.”
“카네프 님…….”
“그래도 대결에서 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의 패배를 마음속에 새겨둬라. 그래야 나중에 더 성장할 수 있을 테니.”
그는 의외로 정상적인 칭찬과 조언으로 엘프리드를 격려했다. 예상치 못하게 따뜻한 카네프의 모습을 우리는 멍하니 지켜봤다.
“드디어 일어났느냐?”
베르딕 가의 두 사람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카엘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클라디온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걱정 마라.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카네프는 다시 엘프리드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린 다음, 두 사람의 앞으로 나섰다.
음?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거지…… 설마?
“엘프리드. 어디 크게 다친 곳은 없느냐?”
“괜찮습니다, 할아버님.”
“어이, 영감탱이. 우리 농장 직원은 괜찮으니까 신경 꺼.”
카네프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카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놈은 왜 또 뿔이 났느냐?”
“엘린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거기 두 사람은 이제 돌아가.”
“허허, 엘프리드의 거취는 대결을 통해 결정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누구 맘대로? 나는 그렇게 하라고 한 적 없는데.”
카네프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사악하게 웃었다. 같은 편인 내가 봐도 정말 악당이 지을 법한 미소였다.
“이건 엘프리드가 스스로 원해서 한 일이었다. 녀석의 의지를 무시할 생각이냐?”
“아∼ 몰라! 아무튼, 저 녀석은 내 허락 없이 아무데도 못가. 데려가고 싶으면 강제로 해보든가.”
‘막무가내’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카네프는 두 사람의 앞을 막고, 서서히 기세를 끌어올렸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실력행사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카네프를 말려야 할지, 말지 고민하던 그때.
완전히 몸을 일으킨 엘프리드가 앞으로 나섰다.
“카네프 님.”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물러나주세요.”
“하지만…….”
“부탁드릴게요.”
“…….”
엘프리드가 진지한 얼굴로 부탁했다. 카네프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생각보다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카네프가 자리를 비키면서 엘프리드가 카엘과 클라디온 앞에 섰다.
“대결의 결과는 저의 패배에요. 일주일 전에 약속했던 대로 농장을 떠나 가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흐음. 이렇게 돌아가도 괜찮겠느냐?”
“조금 아쉽긴 하지만…… 스스로의 말과 행동에 책임지겠다고 한 만큼. 할아버님과 큰형님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카엘의 물음에 엘프리드는 시원섭섭함을 담아 대답했다.
“그래? 그럼 너는 여기에 계속 남도록 해라.”
“……예?”
“방금 나와 클라디온의 말을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너는 계속 여기에 남거라. 이게 우리의 뜻이다.”
“하지만…… 하지만 원래 약속은 대결에서 지면 가문으로 돌아가는 게…….”
당황하는 엘프리드를 보며 카엘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허허! 원래 약속은 그게 아니지 않느냐? 내가 보여 달라고 했던 건 단순한 대결의 승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결정을 책임질 각오와 그것의 증명이었지.”
“…….”
“엘프리드. 비록 이번 대결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너의 성장과 흔들림 없는 마음은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느냐?”
카엘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클라디온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실력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저에게 유리했던 대결입니다. 하지만 엘프리드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실력을 보여줬습니다. 할아버님의 말대로 엘프리드…… 제 동생은 자신의 각오와 마음가짐을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클라디온은 잠시 말을 끊고 뒤쪽에 있던 우리를 바라봤다.
“제 생각과는 다르게. 엘프리드가 이곳에서 지냈던 시간은 가치가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증명해낸 만큼, 동생을 억지로 가문에 데려가야 할 이유는 없겠죠.”
“이게 나와 클라디온의 생각이다.”
“그럼…….”
아직도 당황한 엘프리드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우물거렸다. 대신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율이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카엘 할아버지! 그럼 엘린 오빠 여기 계속 있는 거야?”
기대감에 부풀어 꼬리를 휙휙 흔드는 은율이.
귀여운 여우 소녀를 보며 카엘은 한껏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그래. 여기서 계속 지내도 된단다.”
“와아아아!”
“엘린!”
은율이와 나를 시작으로 흥분한 농장 식구들이 모두 뛰쳐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엘프리드를 둘러싸고 축하의 말을 쏟아냈다.
“고생했습니다, 엘린 군.”
“저는 해내실 줄 알았어요.”
“정말 다행이야, 엘린 오라버니.”
처음에는 멍한 표정이던 엘프리드의 얼굴에도 점차 미소가 생겨났다. 나중에는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기뻐하며 감사를 표했다.
“모두들 도와준 덕분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기뻐하는 엘프리드와 농장 식구들을 보며 카엘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클라디온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런 그들 옆으로.
카네프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섰다.
“쩝…… 이럴 거면 좀 더 빨리 말하라고, 영감탱이.”
“허허허!”
카엘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카네프의 얼굴이 더더욱 구겨졌다.
* * *
대결이 마무리되고.
카엘과 클라디온은 조용히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갔다.
떠나기 전에 클라디온은.
“소란을 피워서 죄송했습니다. 앞으로도 제 동생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동생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내게 전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공손해진 태도였다.
“그렇게 할게요. 가끔 농장에 찾아오세요. 엘린도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시간을 내서 꼭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은 클라디온과 대화를 나누는 게 어색했지만, 그래도 좋게 좋게 마무리하며 클라디온과 카엘을 배웅했다.
그렇게 한차례 소동이 마무리 되고.
농장에는 다시 평화로운 일상이 찾아왔다.
최근 일주일 동안은 엘프리드의 대결을 준비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그 동안 농장 주변은 많이 변해 있었다.
겨울 막바지의 꽃샘추위도 사그라들고.
농장의 주변에는 포근한 봄 느낌이 물씬 풍겨오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웅!
겨울 동안 보기 힘들었던 꿀벌들도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 벌꿀 맥주에 들어갈 벌꿀이 거의 다 떨어졌었는데, 다행히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부우우우.
-부우우우.
겨울 내내 축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야쿰들도 조금씩 활동량을 늘리며 봄을 준비했다.
아마 조금 더 날이 풀리면 큰뿔이를 따라 싱싱한 풀을 뜯으러 떠날 것처럼 보였다.
「꺄하하하! 이제 따뜻하다, 뾰!」
「온실 밖으로도 마음껏 다닐 수 있다, 뾰!」
따뜻해진 날씨에 요정들은 온실을 벗어나 자유롭게 주변을 돌아다녔다.
시현계로 이전한 요정계로 인해. 딸기밭뿐만 아니라, 농장 주변 어느 곳에서든 요정의 웃음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신난 건 요정뿐만이 아니었다.
아기 야쿰들부터.
그리와 피니, 규리, 은율이까지.
농장 주변을 신나게 돌아다니며, 겨울에 마음껏 놀지 못했던 답답함을 풀어냈다.
“드디어 봄이구나…….”
나도 포근한 봄을 온 몸으로 느끼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봄이 반가운 것도 있지만, 혹독했던 겨울을 잘 이겨냈다는 안도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농장과 카디스 영지.
겨울을 준비할 때는 정말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었다.
아마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편안히 봄을 맞이할 수 없었을 거다. 모두 힘으로 어려움을 잘 이겨낸 것 같아 정말 뿌듯했다.
흐뭇하게 봄 풍경을 즐기고 있던 그때.
「시현 님.」
「시현 님.」
귀여운 느낌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요정 여왕을 모시던 두 아기 요정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무슨 일이야?”
「요정계의 문제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뾰!」
「잠시 저희와 함께 가주시면 안 될까요, 뾰?」
쩝.
농장과 카디스 영지도 모자라. 이제는 요정계까지 내가 신경써야 하다니…….
나도 모르게 계속 큰일에 휘말리는 것 같아 신기하면서도,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래? 그럼 같이 가볼까?”
「감사합니다, 뾰!」
「감사합니다, 뾰!」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아기 요정들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들을 따라 시현계로 넘어가려는데, 누군가 나의 다리를 덥석 붙잡았다.
“아빠!”
“은율아?”
“지금 요정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거지?”
“응. 잠시 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올게.”
내가 다리에서 떨어뜨려놓으려 하자. 은율이는 반대로 내 다리를 더욱 꽉 붙잡았다.
“나도 갈래!”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