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65화
봄이 찾아오면(4)
-악덕 사장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농장 직원들의 권리를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여럿이 동시에 내는 우렁찬 외침이 농장 건물 내부까지 울려 퍼졌다.
창밖에는 농장 식구들이 한데 모여 이마에는 구호를 적은 머리띠, 손에는 피켓을 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야. 쟤네들 지금 밖에서 뭐 하는 거냐?”
“파업 시위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파업 시위?”
나는 카네프에게 ‘파업’과 ‘시위’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자마자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일도 안 하고 저기서 저러고 있는다고?”
“근데 이게 또 애매한게. 일은 다 끝내놓고 저기서 저렇게 시위하고 있는 거라…….”
“뭐야? 파업은 일을 안 하는 거라며?”
“원래 그게 맞긴 한데. 저기 있는 농장 사람들 전부 오늘 일과는 다 끝내놓고 시위를 시작해서요.”
보통의 파업 시위는 업무 시간을 무시하면서 생산 활동을 멈추는데. 지금 시위하고 있는 농장 식구들은 자신의 정해진 일과를 전부 끝낸 뒤에 파업 시위를 하고 있었다.
사실상 ‘파업’은 의미없고.
그냥 시위만을 하고 있는셈.
“근데 왜 갑자기 시위를 시작하는 건데?”
카네프의 물음에 내가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최근에 시작한 다이어트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다이어트? 잠깐! 그건 네가 억지로 시킨 거잖아. 그런데 왜 저놈들은 악덕사장을 운운하는 거야? 욕할 거면 널 욕해야지.”
“그러게요. 일단은 사장님이 이곳의 책임자이기도 하고. 평소에 업보를 많이 쌓아두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딱히 좋은 사장님은 아니셨잖아요?”
“…….”
“…….”
카네프가 씨익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 뒷목 쪽을 강하게 압박하며 으르렁거렸다.
“죽을래? 진짜 악덕사장이 뭔지 보여줘?”
“하.하.하! 당연히 농담이죠, 농담. Just Kidding!”
필사적으로 웃으며 내게로 향하는 분노를 무마시켰다. 다행히 카네프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거둬들이면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참 나. 이상한 걸 배워와서는…….”
그는 시위 참가자들의 면면을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천족들이나, 엘린은 딱 봐도 억지로 참여한 것 같고. 주동자는 저쪽인가?”
다이어트 체제가 시작된 이유 삼인방.
그 세 명이 중심이 되어 지금의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은율이는 저기 왜 있는거야?”
시위 참여자 중에는 자그마한 피켓을 열심히 흔드는 귀여운 여우 소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마에는 빨간색 머리띠를 하고 열심히 ‘각성하라!’를 외치고 있었다.
“저렇게 표정이 싱글벙글한 걸 보니. 아마도 함께 놀이를 하는거라 생각하나 봐요.”
애초에 은율이는 자기가 외치고 있는 구호, ‘각성’의 의미도 잘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거기다 피켓에는 ‘각성하라!’ 문구가 알록달록 크레파스로 적혀 있었고, 주변에는 꽃 그림과 요정, 귀여운 마수 그림도 그려져있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시위 피켓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시위하는 은율이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았다. 나름 열심히 시위 피켓을 흔드는 모습이 은근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을 본 카네프가 ‘이녀석 또 시작이네……’라는 한심한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철저히 무시하고 은율이를 화면에 담는 데 집중했다.
저렇게 귀여운데 어쩌겠어?
카네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시위의 열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저대로 계속 시위하게 둘 수는 없잖아. 네가 사는 곳에서는 이럴 때 어떻게 대응하는데?”
“저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보통은 서로 이야기를 나눠서 합의점을 찾아나서죠. 협의가 쉽지 않을때는 시위가 무한정 길어지기도 하고요.”
“협의? 그냥 무력진압하는 게 편하지 않나? 나같으면 그렇게 할 것 같은데.”
‘악덕사장’이라 불리는 건 싫어하셨으면서.
생각하시는 발상은 완전 ‘악덕사장’ 그 자체인데요?
카네프의 ‘무력진압’ 발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속으로 꾸욱 눌러담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크게 보면 고용주, 직원 모두 한 배를 탄 사이잖아요. 서로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타협하는 게 최선이죠.”
“쩝. 알았어. 뭘 원하는 건지 직접 들어보면 되는 거지?”
카네프는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을 한 채 현관문으로 향했다. 나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앗! 나왔다, 악덕사장!”
릴리아가 우리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카네프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그만 시끄럽게 굴고. 원하는 게 뭔지 말해봐. 일단 들어줄 테니까.”
생각보다 협조적인 카네프의 태도에 몇몇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잠시 서로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더니, 대표로 안드라스가 나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여기서 일하는 농장 직원으로서 기본 권리를 존중받고 싶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둬. 원하는 것만 간단히 말해.”
“흠흠. 일단 다이어트라는 이유로 원치않는 식단 강요를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간식 금지도 해제해 주세요.”
“응응!”
리아네와 릴리아가 차례로 동조하고 나섰다.
“그 다이어트라는 걸 시현이 처음에 시작한 일이긴 하지만. 애초에 네녀석들이 겨울 동안 뒤룩뒤룩 살이쪄서 그런 거잖아.”
“뒤, 뒤룩뒤룩까지는 아니라고요!”
“맞아!”
카네프의 ‘뒤룩뒤룩’ 표현에 흥분한 두 사람과는 달리. 안드라스는 차분한 태도로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다이어트가 좋은 목적인 건 알겠으나. 그걸 농장 직원들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으음…….
안드라스 씨의 말도 일리가 있네.
어느정도 안드라스의 말에 수긍하는 나와는 달리, 카네프의 얼굴에는 점점 짜증이 차올랐다.
“이렇게 안하면 너희들이 말을 안 듣잖아. 그렇게 간식 먹지 말라고 했는데 계속 몰래 빼먹었으면서!”
“그, 그렇게 따지면. 카네프 님도 매번 시현 님 몰래 맥주 빼드셨잖아요!”
“나는 괜찮아. 여기 사장이니까.”
“독재자, 악덕사장! 우우우우!”
“우우우우!
리아네와 릴리아가 합동으로 야유 공격을 펼쳤다. 카네프의 얼굴에 짜증이 더해진 건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이것들을 확!”
“아앗! 안 돼요, 사장님!”
진짜로 악덕사장이 되려는 카네프를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그의 흥분을 먼저 가라앉힌 다음, 시위 참여자들에게 말했다.
“일단 무슨 의견인지는 알았으니까. 조금만 더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죠.”
이렇게 해서.
마계 농장 최초로 노사협상이 열리게 됐다.
* * *
커다란 테이블 주변으로 농장 식구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한쪽에는 나와 카네프.
반대쪽에는 나머지 농장 식구들이 자리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죄송해요, 리안 씨. 갑자기 이상한 부탁을 드려서…….”
“하하, 괜찮습니다. 다행히 일이 그렇게 바쁘지 않을 때라서요.”
일하는 도중에 연락을 받고 달려온 발레리안이 함께했다. 협상의 중재자 역할을 맡기기 위해 급하게 섭외했다.
“그건 그렇고. 농장에서 이런 자리가 열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습니다. 뭔가 굉장히 신선해서 재밌네요.”
발레리안은 지금의 상황 자체가 즐거운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저도 참 신기하기는 하네요. 제가 노사협상을…… 그것도 사측 입장에 자리하게 될 줄이야. 저도 농장에 노동자로 고용된 입장인데…….”
카네프가 콧방귀를 뀌며 내 말을 일축했다.
“누구는 안 그런 줄 알아? 나도 따지고 보면 고용된 입장이야. 그렇다고 마왕성에 있는 마왕을 불러올까?”
“그건 아니죠…….”
이 농장의 소유주는 마왕님.
그렇다고 다이어트를 하네, 마네 하는 문제에 마왕님을 모셔오는 건 좀…….
“근데 사장님은 제가 농장 식구들에게 다이어트 시키는 거 싫어하시지 않으셨어요?”
“원래는 싫어했지.”
“근데 왜……?”
카네프는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저 녀석들 시위하는 모습을 보니까 억지로 다이어트 시키고 싶어졌어. 감히 날 악덕사장이라고 불러?”
약이 오른 카네프는 이미 다이어트의 본래 취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나와 발레리안은 사악한 그의 미소를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발레리안은 테이블에 착석한 사람들을 짧게 둘러본 다음,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제1회! 마계 농장의 노사 협상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는 꽤 능숙하게 협상의 시작을 알렸다.
“저는 진행자로서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겁니다. 양측 모두 제 진행에 따라주시길 부탁드리면서. 일부러 진행을 방해하는 행동을 하거나, 과격한 행동을 할 시에는 퇴장을 당하실 수도 있으니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과격한 행동’이라는 부분에서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몰린 건,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시위를 통해 부당함을 주장한, 농장 직원 측에서 먼저 의견을 말해주시죠.”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와 달라진 것 없이 직원 대표로 안드라스가 나섰다.
“저희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직원 개개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강제적인 다이어트를 중단했으면 합니다. 당연히 간식 통제도 없어져야겠죠.”
“옳소!”
“와아아!”
안드라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농장 직원 측에서 호응이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농장 측의 의견도 들어보겠습니다.”
발레리안의 진행에 따라 이번에는 내가 발언을 하게 됐다.
“제가 시작한 다이어트가 약간 강제적인 부분이 있음은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겨울 동안에 크게 체중이 변한 몇몇 직원을 걱정해서 한 일입니다. 절대 개개인을 억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 시현 씨는 다이어트를 중단할 생각이 없으시다는 건가요?”
“물론이죠. 모두의 건강한 농장 생활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의견차이가 확실해지면서.
테이블을 두고 갈라진 양쪽 사이에 긴장감이 팽팽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