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67화
다시 찾아온 손님(1)
농장과 카디스 영지에 완연한 봄 날씨가 찾아왔다.
마지막 꽃샘추위까지 사그라들고 숲과 들판 곳곳에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이 가득해졌다.
겨울 동안에 웅크리고 있던 영지 주민들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겨울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했다.
특히 너구리 영감은 겨울 동안 벌꿀 맥주에 들어갈 벌꿀이 부족해 걱정이 많았는데, 꿀벌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서 매우 기뻐했다.
이렇게 영지에 활기가 넘치는 가운데.
최근 영지 주민들의 얼굴에 들뜬 표정이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카디스 영지에 새로운 영주 저택 완공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건설을 시작했던 영주 저택은 겨울에 접어들기 전에 꽤 많은 진행률을 보였지만, 겨울의 혹독한 날씨 탓에 진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건설 책임자와 일꾼들이 완공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무리하게 건설을 진행하려 했었다.
나는 저택의 완성보다는 건설 일꾼들의 안전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만류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저택 건설의 진행이 지지부진 했었다.
길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천천히 날이 풀리면서 건설 작업이 다시 시작됐다. 건설 책임자와 일꾼들은 겨울에 일하지 못한 만큼, 더 열심히 마무리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드디어!
모두가 기다려왔던 영주 저택의 완공식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 * *
“아빠! 빨리, 빨리!”
베이지색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은율이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잡은 손을 타고 들뜬 은율이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휙휙! 돌아가는 여우꼬리.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은율이를 진정시켰다.
“뛰지 말고 천천히 가야지. 그러다 새 옷 더러워지면 어쩌려고. 그 원피스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그치만. 빨리 구경하고 싶단 말이야.”
“도착하면 실컷 구경하게 해줄 테니까. 조금만 천천히 가자. 알았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나긋나긋하게 타일렀다. 다행히 은율이는 금방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걸을 때마다 온몸을 들썩이는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도 영주 저택이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리아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은율이가 엄청 기대가 큰가 봐요.”
“그러게요. 겨울 동안에도 언제 완성되냐고 꽤 여러 번 물어봤었거든요. 마무리 작업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에는 어찌나 기대를 하든지…….”
“시현 님은 기대 안 되세요?”
“저요? 저도 뭐…… 아예 기대가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죠?”
사실 처음에 저택을 짓는다고 했을 때는 좀 회의적이었다.
일단 내 소유의 저택이지만, 농장일 때문에 지내는 건 앞으로도 농장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거기다 귀족들의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에 별로 관심도 없었다.
차라리 그 예산과 인력으로 영지에 필요한 시설을 짓는 게 어떨까? 하며 개인적인 의견을 냈는데. 주변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키며 곧바로 무시됐다.
-영주님! 영지에 영주님이 머무를 공간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래도 예산이랑 인력이 아까운데…….
-예산과 인력은 바르바토스 가문과 슈나르페 가문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기로 했습니다.
-…….
-혹시 저택 건설에 부족한 부분이 생긴다면. 저뿐만아니라 모든 영지 주민들이 발벗고 나서 도울 테니, 영주님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웬만하면 내말을 부정하지 않는 라구스도 이 부분만큼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게 시작된 영주 저택의 건설.
처음에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완공식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기대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완공식 참여를 위해 깔끔하고 격식 있는 옷도 챙겨 입었다.
은율이의 손을 잡고, 리아네와 나란히 걷던 내 눈에 멀리 영주 저택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는 이미 많은 영지 주민들이 나와 완공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시현 님.”
“어서오세요, 시현 선배.”
미리 도착해 있던 안드라스와 엘프리드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 뒤로 익숙한 얼굴의 마족 몇몇이 뒤따랐다. 영주 저택 건설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책임자들이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정말 고생많으셨어요.”
“허허, 별말씀을. 오히려 영주님께서 여러 가지로 신경 써주셔서 어렵지 않게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지었습니다. 꼭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영주 저택을 짓기 위해 정말 많은 이들이 도움을 보탰다. 마음 같아서는 일일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지만, 여건상 그럴 수는 없으니. 대표로 책임자들에게 대신 그 마음을 전했다.
책임자들과 인사를 끝낼 때쯤.
라구스와 로커스가 우리 쪽으로 합류했다. 두 사람 모두 신경을 쓴 듯한 깔끔한 복장이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수비대장 레빌과 크록이 몰려든 인파를 통제하고 있었다. 워낙 바빠 보여서 그 두 사람과는 짧게 눈인사만 나눠야했다.
완공식은 간단하게 진행됐다.
처음은 라구스가 나서서 영주 저택을 처음 짓게 된 계기와 과정을 설명하며, 카디스 영지의 새로운 구심점이라며 거창한 말을 갖다 붙였다.
내 입장에서는 조금 낯부끄러웠지만, 듣고 있는 영지민들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나도 어젯밤에 짧게 준비한 기념사를 읽었는데.
몇몇 나이 많은 영지민들이 눈물을 줄줄 쏟아내는 바람에 굉장히 당황스러우면서, 조금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생각보다 거창했던 완공식이 끝나고. 준비된 두 명의 수비대원들이 저택의 대문을 개방했다.
“들어가시죠, 영주님.”
건설 책임자의 안내에 따라서 나와 일행들이 대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영지민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나는 환호를 보내는 영지민들에게 어색하게 웃어주며 대문 안쪽으로 향했다. 손을 잡은 은율이와 다른 일행들도 내 걸음에 맞춰 뒤따랐다.
대문에서 저택으로 이어지는 길이 하얀 벽돌로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커다란 마차도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길 옆으로는 푸른 잔디와 조경물들이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눈길을 끈 건…….
“혹시…… 저 조각상…….”
“아! 보셨군요.”
건설 책임자는 흥분한 표정으로 조각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영주님을 본떠 만든 조각상입니다!”
“…….”
“마계에서 아주 이름 있는 조각가님에게 어렵게 부탁해서 만들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
살아생전에 나를 본떠서 만든 조각상을 보게 될 줄이야…….
한 손은 쭉 앞으로 내뻗고, 나머지 한 손은 뒷짐을 진 자세. 진지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눈동자. 전체적으로 위엄 넘치는 분위기.
거기다 좀 더 다부지고, 묘하게 잘생겨진 내 조각상을 보고 있으려니. 굉장히 기분이 묘했다.
“큭큭큭…….”
“크흡! 정말 멋있어요, 큭, 시현 선배.”
내 성격을 아는 농장 식구들은 웃음을 참느라 정신이 없었고.
“와아! 아빠 엄청 멋있다.”
“정말 대단합니다. 조각상에서 영주님의 위엄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은율이와 라구스는 진심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덕분에 건설 책임자의 표정이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던 나에게 안드라스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카네프 님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시지요.”
“……그건 그렇네요.”
그 악랄한 사장님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또 얼마나 놀려댔을지…….
으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충격의 조각상을 애써 무시하면서 저택의 입구로 향했다.
건설 책임자가 한발 먼저 앞으로 나서며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었다.
열린 문 너머로 저택의 내부 모습이 보여졌다.
“와아…….”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사방으로 확 트인 공간이 우리를 맞이했다. 아름답게 배치된 조명과 넓은 공간감이 웅장한 느낌을 줬다.
내가 너무 번쩍이고, 사치스러운 치장은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기에. 이전에 방문했던 귀족 저택의 화려한 느낌은 없었지만, 오히려 수수하지 않고 절제된 우아함을 잘 표현된 것 같았다.
건설 책임자는 반응을 살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1층의 방들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따라 와주십시오.”
우리는 건설 책임자를 따라 1층의 방들을 하나씩 살폈다.
저택의 1층에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접객실과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침실, 커다란 식당, 그리고 옆에는 부엌이 딸려 있었다.
농장의 것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시설이 아주 좋았다. 이런 쪽으로 관심이 많은 리아네가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저택 1층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라구스와 로커스의 집무실이었다.
행정관, 재정관 업무를 맡은 두 사람은 지금까지 별도의 업무 공간 없이 영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영주 저택을 지으면서 두 사람을 위해 업무 공간을 따로 만들어주었다.
“여기가 라구스 행정관의 집무실입니다.”
건설 책임자가 문을 열자 차분한 분위기의 집무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큰 사이즈의 집무실은 아니었지만, 업무에 필요한 물품과 가구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사무 용품과 의자의 경우에는 내가 직접 지구에서 가져온 물건들이어서 현대의 사무실 책상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게 만들었다.
나는 멍한 표정을 짓는 라구스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라구스 씨, 마음에 드세요?”
“제가…… 이런 곳에서 일해도 될지…….”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죠. 좁은 책상에 서류들이 잔뜩 쌓여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거든요.”
“영주님…….”
감동을 받은 라구스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그는 시선을 돌려 책상 위에 올려진 명패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라구스의 이름과 행정관이라는 직책이 새겨져 있었다.
라구스는 이곳이 자신의 집무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이름이 새겨진 명패를 손으로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로커스의 집무실도 라구스 집무실 못지않게 잘 꾸며져 있었다.
“흐음…… 나쁘지 않네.”
로커스는 겉으로 별다른 감흥이 없는 척 행동했지만, 자신의 집무실이 썩 마음에 드는지 입꼬리가 계속 위로 솟구쳤다.
영지를 위해 열심히 일한 두 사람에게 뭔가 제대로 보상을 해준 것 같아서 나도 마음이 뿌듯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