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69화
다시 찾아온 손님(3)
나는 기억을 더듬어 여자의 이름을 간신히 떠올렸다.
“그러니까…… 아니스 씨?”
“제 이름 기억해 주셨네요? 영광이에요, 카디스 영주님.”
“하하하.”
은월족 아니스가 기쁘다는 듯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양옆을 살폈다. 저번에 함께 왔었던 남자 은월족과 여우 수인도 있었다.
그들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였다.
“영주님, 저분들은……?”
라구스가 조심스럽게 나서서 세 사람에 대해 물었다. 그 당시에 농장에 없었던 레빌과 로커스도 손님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다른 분들은 처음보시겠네요. 멀리서 찾아오신 은율이의 가족분들이세요.”
“아! 은율 아가씨의?”
“모두 경계를 풀어라. 영주님의 중요한 손님이시다!”
라구스는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레빌은 재빨리 수비대원들에게 경계를 풀 것을 지시했다. 순식간에 수비대원들이 물러서며 주변에는 널찍한 공간이 형성됐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이든 은월족 남자, 다우르가 민망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흠흠, 저희 때문에 괜한 수고를 끼친 것 같군요.”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영지의 행사가 있다 보니, 수비대원들이 조금 민감하게 반응했나 보네요.”
폐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은월족’이라, 우리 쪽에 미리 방문을 알리는 것도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불쑥 찾아오는 건 당연히 예의가 아니지만, 그런 것까지 따져가며 이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들은 은율이의 친족이었으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까요?”
“초대해 주신다면 저희야 감사할 따름이죠.”
“따라오세요. 새롭게 지어진 저택의 첫손님이 정해진 것 같네요.”
“어머! 이렇게 멋진 저택의 첫손님이라니, 정말 영광이네요.”
주변에 있던 영지민들의 웅성거림을 뒤로한 채, 나는 은월족 손님들을 데리고 저택으로 향했다.
나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저택으로 손님을 안내한다는 게 굉장히 기분이 묘했다.
추가로.
은월족 일행이 저택 앞 조각상을 보고 감탄을 터뜨리는 바람에 한 번 더 수치스러움을 느껴야만했다.
한동안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저 조각상을 없앨까?’라는 생각이 가득해졌다.
* * *
은월족 일행들은 곧바로 2층 응접실로 안내됐다.
이곳을 이렇게 빨리 사용하게 될 줄이야…….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에 당황스러울 만도한데, 아델라와 리아네는 아주 차분하게 손님맞이를 준비했다.
-콕, 콕.
“왜? 미루야?”
“아저씨. 저 사람들이 은율이 가족들이야?”
“응, 맞아.”
“와아…… 저 언니랑 은율이 좀 닮은 것 같아.”
미루는 아니스를 몰래 가리키며 속삭였다. 그녀는 은율이와 숙모, 조카의 관계이니, 닮았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실제로도 닮은 부분이 많기도 했고.
은월족에 관심을 보이던 미루는 차와 간식을 가져온 아델라의 손에 끌려 나갔다.
“저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편하게 말씀 나누십시오.”
“나는 1층 집무실이나 더 살펴봐야겠네.”
라구스와 로커스도 눈치껏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한쪽은 은월족 일행들. 그리고 그 반대편에 나와 은율이가 자리를 잡았고, 우리 뒤로는 엘프리드와 안드라스가 호위를 하듯 양쪽으로 서있었다.
“…….”
방 안에는 살짝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특히 은율이가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소극적이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불안해하거나 무서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명절날 잘 모르는 친척어른을 만나 쭈뼛대는 느낌?
세 사람이 예전에 농장에 방문했을 때. 그렇게 호의적인 분위기도 아니었고, 은율이와 많은 교감을 나눈 것도 아니었으니. 이런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내기 위해 아니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은율아 안녕? 나 기억나?”
“……응”
은율이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스는 그 작은 대답만으로도 아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다행이네. 귀여운 조카가 숙모를 잊어버렸을까봐 걱정 많이 했거든.”
“…….”
은율이는 뭔가 부끄러워졌는지 얼굴을 붉히며 내 팔 뒤로 숨어들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방안에는 훈훈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나는 은율이가 긴장을 풀 수 있도록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줬다.
“괜찮아, 은율아. 저분들 모두 은율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오셨대.”
“우웅…….”
오늘따라 낯을 많이 가리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서 저택 이곳저곳을 구경 다녔었는데.
한 번 내 팔 뒤로 숨어든 은율이는 쉽게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아직 은율이에게 있어 저들의 존재는 많이 낯설고 어색한 모양이었다.
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여우 수인이 메고 있던 보따리에서 뭔가 주섬주섬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새하얀 천을 벗겨내자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는 하얀색의 둥그스름한 무언가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는데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떡’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영주님, 작은 아가씨. 제가 직접 만든 간식인데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이름이 ‘나미라’라고 했었지?
푸근한 느낌을 주는 그녀는 간식이 담긴 상자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둥그런 간식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감촉.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모습까지.
겉으로 봤을 때는 내가 알고 있는 떡과 매우 흡사했다.
고소한 향기까지 솔솔 올라와 입에는 자연스럽게 침이 고였지만, 손에 든 간식을 쉽사리 입으로 가져갈 수 없었다.
혹시……? 하는 불안감을 쉽게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반대편에 앉아 있던 아니스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내밀었다. 그리고 내가 들고 있던 간식에 일부분을 떼어내 자신의 입속으로 가져갔다.
“우물우물. 드셔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저도 나미라가 만든 간식을 정말 좋아해서 계속 꺼내먹고 싶었는데, 꼭 작은 아가씨에게 줘야한다면서 나미라가 못 먹게 했거든요.”
아니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금방 뭔가를 눈치채고 살짝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계속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나도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간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텁, 우물우물.
으음……? 오오!
생각보다…… 아니, 진짜 너무 맛있었다.
처음에는 쫀득한 떡의 질감과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안쪽 내용물이 터져 나오면서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팍! 터져 나왔다.
약간 달콤한 과일 향과 새콤한 맛의 조화. 거기다 고소하고 쫀득쫀득한 떡의 식감까지. 안쪽에서 터져 나오는 맛과 향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정말 맛있네요!”
“그쵸? 나미라가 만든 간식은 최고라니까요.”
“호호,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나는 상자 안에서 간식 하나를 더 꺼내서, 은율이가 먹기 좋게 손으로 잘라줬다. 뒤에 있던 안드라스와 엘프리드에게도 하나씩 건네줬다.
조금 흐렸던 은율이의 얼굴이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드리운 것처럼 순식간에 밝아졌다.
“와아! 맛있어!”
은율이가 마음에 들어 하자 나미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와…… 안드라스 선배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안드라스와 엘프리드도 간식을 맛보자마자 감탄하기 바빴다.
너무 간식이 맛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간식이 담긴 상자 쪽으로 향했다. 상자 안에는 네 개를 빼먹고 딱 두 개가 남아 있었다.
나눠 먹기에는 넉넉지 않은 양.
그렇다면 주인은 정해져 있었다.
“자, 은율아. 더 먹을래?”
“응!”
힘차게 대답한 은율이는 잠시 멈칫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근데 아빠는 안 먹어도 돼?”
“나는 괜찮아.”
은율이는 뒤쪽에 있던 안드라스와 엘프리드도 쳐다봤다. 두 사람도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크흠, 아침을 많이 먹어서……”
“나, 나도 괜찮아. 은율이 많이 먹어.”
“안드라스 씨랑 엘린도 괜찮다니까. 남은 건 은율이가 먹어.”
“헤헷. 알았어.”
남은 두 개의 간식은 은율이 앞에 놓여졌다. 안드라스와 엘프리드는 아닌 척하면서도 눈동자에 아쉬움이 가득해졌다.
심지어 건너편에 앉아 있던 다우르도 입맛을 쩝쩝 다실 정도였으니.
그만큼 나미라가 만들어온 간식은 정말 맛있었다.
나도 아쉬움이 조금 남긴 했지만 행복해하는 은율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금방 마음이 뿌듯해졌다. 참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보다.
나미라의 간식 덕분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풀렸다. 나는 은율이에게 간식을 조금씩 먹이면서, 손님들에게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세 분은 무슨 일로 카디스 영지에 찾아오신 건가요? 여기까지 오시려면 꽤 먼 거리를 이동하셔야 하는 걸로 아는데.”
은월족이 살고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해도 이곳까지 쉽게 찾아올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질문의 대답은 아니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은율이를 만나러 온 것도 있지만. 사실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부탁이요?”
“네.”
아니스의 눈빛이 신중해졌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설명을 기다렸다.
“지금 은월족 마을에 계시는 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은 상태예요. 원래 정정하셨던 분이셨는데 최근에 몸 상태가 많이 나빠지셨어요.”
“아니스 씨의 어머니라면…….”
굵직한 목소리의 다우르가 불쑥 끼어들었다.
“은율이에게는 할머니가 되시는 분이지요.”
“으음…….”
은율이의 할머니…….
나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왠지 이들의 부탁이 가볍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스는 잠시 나와 은율이의 눈치를 살핀 뒤,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분께서 은율이를 보고 싶어 하세요.”
“…….”
나는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했다. 아니스의 이야기를 더 듣지 않아도 부탁이 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건강이 나쁘다는 분이 이렇게 먼 거리를 직접 찾아올 수 없으니, 그분이 은율이를 만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아니스의 입에서 내가 예상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저는 제 어머니가 계신 곳, 은월족 마을로 은율이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