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370화 (370/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70화

다시 찾아온 손님(4)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해보았지만,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할머니, 은월족 마을…….

이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은율이를 데려가고 싶다는 아니스의 뒷말만 크게 머릿속을 울렸다.

달라진 내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아니스가 다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물론 은율이를 억지로 데려간다거나 저희가 맡겠다는 게 아니에요. 저는 어머니에게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손녀를 만나게 해주고 싶을 뿐이에요.”

“으음…… 그렇군요.”

다행히 지난번처럼 은율이를 내놓으라고 떼를 쓸 생각은 없어 보였다.

부탁하는 태도부터 굉장히 조심스러웠고, 말하는 내내 계속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의 부탁은 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은율이의 할머니가 살아계셨었구나…….

자세한 소식을 들은 건 은율이의 엄마, 아빠뿐. 할머니에 대해서는 이번에 처음 들었다.

“혹시 마을에 은율이의 친척이 더 남아 있나요?”

내 물음에 아니스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가까운 친척은 저와 어머니뿐이에요.”

그렇다면 아니스를 제외하고, 할머니란 분이 은율이의 유일한 혈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이 조금 더 무거워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 은율이를 바라봤다.

은율이는 나미라의 간식을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말로 간식에 푹 빠져 있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만약에 은율이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꽤 먼 거리인 데다가, 저들의 손에만 은율이를 덜렁 맡길 순 없었다.

보호자인 내가 무조건 따라 나서야 하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함께 갈 일행도 필요할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응접실 창문 밖으로 다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뒤쪽에 있던 안드라스가 창문가로 다가가 바깥의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창밖을 살피던 안드라스의 표정이 빠르게 심각해졌다.

“아니스 님.”

“네?”

“혹시 여러분들과 함께 온 일행이 따로 더 있습니까?”

“일행이요? 아, 아뇨. 저와 숙부님, 그리고 나미라까지 이렇게 세 명이 끝인데…….”

“흐음…… 그렇습니까? 그럼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더 있나 보군요.”

“안드라스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안드라스는 창밖을 가리키며 내 물음에 대답했다.

“지금 수비대원들이 누군가와 또 대치를 하고 있습니다. 멀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은월족 손님분들과 연관 있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 설마?!”

다우르는 찢어질 듯 크게 눈을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옆에 있던 아니스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저희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숙부님.”

“알았다.”

“죄송해요, 시현 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서 할게요. 나미라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아니스는 짧게 양해를 구한 뒤, 순식간에 다우르와 함께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남아 있던 나미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희도 따라가죠.”

“알겠습니다.”

“조금 답답했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나미라 씨. 괜찮으시면 은율이랑 잠시 놀아주실래요?”

“물론이죠. 작은 아가씨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나미라에게 은율이를 부탁한 다음 빠른 발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안드라스와 엘프리드도 내 뒤를 따랐다.

* * *

저택 앞에 모여 있던 영주민들은 이미 해산한 상태였고, 수비대원들과 그들의 대장인 레빌이 정체불명의 방문자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굉장히 신기했다.

은월족과 비슷하게 여우귀와 꼬리를 가졌지만, 털색이 은색이 아니라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털색이 은빛이 아니라 붉은빛인데. 저 사람들도 은월족인가요?”

이럴 때는 역시 빠지지 않은 안드라스.

이번에도 그는 막힘없이 설명을 쭉 늘어놨다.

“은월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은 은빛 털을 가진 모습을 많이 떠올리지만. 은월족 내에는 저렇게 붉은빛 털을 가진 자들도 있습니다. 듣기로는 붉은빛 털을 가진 은월족은 거칠고 호전적인 성격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당연히 나도 은월족은 다 은빛 털인줄 알았는데…….

으음? 그러고 보니 은율이의 눈동자에 살짝 붉은빛이 있었지 않나?

머릿속으로 은율이를 떠올리던 나는 앞쪽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설마 우리를 미행한 건가요?”

“흥! 그 아이의 위치를 순순히 알려줬다면, 우리도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스와 붉은빛 은월족 사이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은율이…… 아니, 미우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끝났어요. 당신들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신녀의 건강이 악화된 지금! 그녀의 뒤를 이을 존재가 필요해.”

“…….”

“신녀의 피를 이은 그 아이가 말이야!”

이야기를 전부 알아듣지는 못해도, 저 붉은 은월족이 무엇을 원하는 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마치 아니스 일행이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때와 상황이 비슷해 보였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스무 명이 훌쩍 넘는 저들의 기세가 매우 사납다는 점이었다.

주변을 둘러싼 수비대원들의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험악해졌다.

일단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내가 상황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는 아니스 옆으로 내가 나섰다.

그녀와 언쟁을 주고받던 붉은 은월족이 힐끗 나를 바라봤다. 얼굴에는 ‘넌 뭔데 끼어드느냐?’ 라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입을 떼기 전에 아니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분은 카디스 영지의 주인. ‘시현 님’이세요.”

“……!”

붉은 은월족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기분 나쁘게 나를 훑어보며 살짝 의심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쩝. 내가 영주님처럼 안 보이기는 하지…….

붉은 은월족은 기세가 한풀 꺾인 모습으로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대가 정말로 이곳의 영주가 맞소?”

“네, 맞습니다. ‘시현 레프미어 카디스’라고 합니다.”

“흐음. 내 이름은 ‘쿠나흐’! 멋대로 영지에 발을 들인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오. 우리가 할 일만 끝마친다면 조용히 물러나겠소.”

쿠나흐는 말은 일견 예의를 갖춘 것처럼 들렸지만, 속 내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영지에 무단으로 침입한 것부터 큰문제인데, ‘조용히 물러나겠다.’라는 표현으로 은연중에 협박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 쪽 사람들의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수비대원들의 기세도 점점 더 험악해졌다.

나도 속이 뜨거워짐을 느꼈으나 평화로운 영지에서 싸움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감정을 최대한 담지 않으려 노력하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영지에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입니다. 죄송하지만 조용히 물러나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아주 중요한 문제라오. 먼 길을 찾아왔으니 원하는 것만 가져갈 수 있게 해주시오.”

쿠나흐는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뻣뻣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보다 못 한 아니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물러서세요! 마왕성에서 인정을 받은 귀족과 분쟁을 일으킬 생각인가요?”

“킁! 뭐, 그리 대단치 않아 보이는 영지인데 너무 호들갑떠는군. 후미진 영지에서 일어난 사소한 다툼 정도로 마왕성은 나서지 않을 거다.”

대단치 않아 보이는…… 후미진 영지?

쿠나흐는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내가 아무리 평화로운 해결을 좋아해도 상대가 이 정도로 무례하게 나온다면 참기 힘들었다. 아니, 참아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안드라스와 엘프리드, 영지에 속한 모두의 눈에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저런 발언은 그냥 넘어갈 수 없겠군요. 아무리 은율이의 고향에서 왔다고 해도 말입니다.”

“안 그래도 몸이 찌뿌둥했는데 잘됐네. 시현 선배, 설마 말리려는 건 아니지?”

“시현, 명령만 내려줘. 우리 수비대원들이 갈고닦은 실력을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수비대장 레빌은 존댓말을 까먹을 정도로 흥분하며 으르렁거렸다. 당장에라도 쿠나흐에게 뛰쳐나갈 기세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인내심을 발휘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조용히 물러나세요. 당신들이 원하는 그 아이. 절대 데려갈 수 없을 겁니다.”

쿠나흐가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호오? 은월족 아이를 알고 계셨소? 이러면 이야기가 쉬워지겠군. 당장 그 아이를 내놓으시오.”

“……손님으로서 대접은 끝났습니다. 물러나지 않겠다면 침입자로 간주하겠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군. 억지로 입을 열게 하는 수밖에 없겠어.”

“쿠나흐!”

“쿠나흐 대장! 이게 무슨 짓인가!”

아니스와 다우르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상황은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마주보고 있던 양쪽 모두 곧바로 전투 준비에 들었다.

“모두 전투 준비! 영주님을 지켜라!”

수비대원들이 무기와 방패를 꺼내들고 진형을 갖췄다. 레빌이 자신한 만큼 절도 있고 빠른 동작이었다.

나는 아니스와 다우르를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두 분은 휘말리지 않게 뒤로 물러서세요.”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

“……물러서세요. 이야기는 나중에.”

아니스와 다우르의 잘못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두 사람의 방문이 이 상황의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니까.

대치한 수비대원들과 붉은 은월족들.

수는 수비대원 쪽이 훨씬 많았지만, 붉은 은월족들도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일촉즉발.

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러갔다.

“얘들아! 은월족의 힘을 제대로 보여…… 커헉?!”

“잡았다.”

“대, 대장님?!”

어둠 속에서 나타난 테르잔이 순식간에 쿠나흐를 제압했다. 그리고 테르잔은 제압한 쿠나흐를 짐짝처럼 어깨에 메고 휙 날아올랐다.

-털썩!

“끄억!”

테르잔은 쿠나흐를 내 앞에 던져놓았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와 쿠나흐를 번갈아 쳐다봤다.

“테르잔 님. 이게 도대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예?”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저택을 가리켰다.

“집값.”

“…….”

“음…… 부족했나 보네. 잠깐 기다려봐.”

내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그녀의 신형이 다시 흐릿해졌다. 동시에 붉은 은월족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뭐야?!”

“끄악!!”

“유령이다! 유령!!”

마치 주인에게 쥐를 한 마리씩 잡아오는 고양이처럼. 테르잔도 제압당한 붉은 은월족을 하나씩 툭툭 던졌다.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테르잔의 사냥을 지켜보던 가운데. 안드라스가 나를 부르며 통신 아티팩트를 건넸다.

“시현 님. 농장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네? 농장에서요?”

아티팩트를 건네받자마자 특유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아래쪽에서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기운이 일어나는 거야? 낮잠 자다가 뒤숭숭해서 일어났잖아.

“아. 사장님.”

-오늘 저택 완공식인가 뭔가 아녔어?

붉은 은월족의 적대적인 기세가 멀리 떨어진 카네프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저…… 그게 아니라…….”

“네 이 녀석! 나에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굉장히 싸가지 없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아씨.

저 눈치 없는 녀석! 가만히 좀 있지…….

“당장 은월족의 아이를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이 볼품없는 영지, 그대로 박살 내놓을 것이다!”

-…….

“…….”

“내말 안 들리느냐! 당장 은월족 아이를…… 으으읍!”

나는 재빨리 쿠나흐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능 좋은 통신 아티팩트는 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해 버린 뒤였다.

-시현…….

싸늘한 카네프의 목소리.

나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안드라스와 엘프리드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갔다.

“네, 사장님.”

-저 싸가지 없는 목소리 놈이…… 설마 은율이를 데려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순간 저 멀리 떨어진 농장 쪽에서 천둥이 치는 것처럼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직도 버둥거리는 쿠나흐를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 녀석들…….

완전 망했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