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72화
다시 찾아온 손님(6)
응접실에 침묵이 흘렀다.
조명만 조금 더 어두웠다면, 영화 속 취조실이 생각날 만큼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두 은월족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도 깊어졌다.
카네프처럼 매섭지는 않더라도, 그 안에 의구심을 조금씩 키워나가고 있었다.
힘겨운 표정의 아니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은율이가 신녀가 되면 곤란하다는 이야기……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에요.”
“으음…….”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탄식 섞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은율이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어요. 도망친 신녀 후계자의 자식인 데다가, 붉은 은월족의 피도 이어받았으니까요.”
“그럼 은율이가 은월족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뜻인가요?”
“…….”
조금은 신경질적인 내 질문에 아니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카네프의 예상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애꿎은 은율이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더불어 아니스와 다우르에게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나 말지……. 그냥 멀리서 찾아온 친척처럼 귀여운 조카와 좀 놀아주고 덕담이나 해줄 것이지…….
아니스는 내 표정을 읽고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놨다.
“모두가 은율이를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저와 숙부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은율이를 걱정하고 보고 싶어 해요.”
“아니스의 말대로요. 정치적인 이유로 은율이를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은월족 중 일부일 뿐이라오.”
다우르도 그녀의 말에 동조하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은율이를 보고 싶다고 한 건, 그런 복잡한 문제와 전혀 상관없어요. 어머니는 오히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은율이를 데려오지 않으려 하셨어요. 안전한 곳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면서요…….”
아니스는 물기 젖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안타까운 상황에 나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카네프의 냉랭한 표정도 조금은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가시 돋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나쁜 의도가 없었다는 건 잘 알겠어.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은율이를 은월족 마을로 데려가는 건 너무 위험해 보여. 마을에 있는 놈들이 은율이한테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그건…….”
“저 붉은 은월족들이 미행해 오는 것도 몰랐다면서? 은율이를 마을로 데려갔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때도 몰랐다고 변명만 할 거야?”
“…….”
카네프의 빈정거리는 태도에 아니스는 발끈한 표정만 지을 뿐, 딱히 반박은 하지 못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카네프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카네프는 푹신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더는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스는 시선을 돌려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간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부탁했다.
“시현 님. 어머니의 몸 상태가 정말 심각해요. 어쩌면 은율이가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그대가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카와 내가 목숨을 다해 은율이를 지키겠소. 그러니 우리의 부탁을 너무 나쁘게만 생각지 말아주시오.”
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두 분의 말씀은 전부 잘 들었어요. 부탁하신 일에 대해서는…… 금방 결정을 내리기 힘들 것 같아요. 일단은 손님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멀리서 이곳까지 찾아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잠시 쉬고 계세요.”
나는 대화의 끝을 알리며 쉴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겠다 말했다. 두 사람은 아쉬운 기색을 애써 감추며, 정중한 태도로 배려에 감사함을 표했다.
* * *
“작은 아가씨, 여기에요 여기!”
“꺄하하하하!”
창문 밖에서 은율이와 나미라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제 저렇게 부쩍 친해졌는지, 나미라는 아주 자연스럽게 은율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그 옆에는 리아네와 테르잔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술래잡기를 하며 저택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즐거워하는 은율이를 창문너머로 지켜보는 사이, 내 입가에도 흐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카네프의 목소리에 나는 창문 쪽에서 시선을 뗐다. 뒤돌아보니 카네프, 안드라스, 엘프리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입가에 희미했던 미소도 덩달아 굳어졌다.
“으음……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카네프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나를 다그쳤다.
“모르긴 뭘 몰라? 당연히 그 둘의 부탁은 거절하고, 잡아놓은 붉은 뭐시긴가 하는 놈들이랑 같이 내쫓아야지. 안 그래?”
그는 안드라스와 엘프리드에게 동의를 구하듯 대화를 넘겼다. 그에 떠밀리듯 엘프리드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어…… 음, 저도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은율이를 데려가겠다고 영지까지 무단으로 침입한 놈들이에요. 은월족 마을에 그런 놈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데. 위험하게 은율이를 그곳으로 보낼 수 없어요.”
“그렇지! 그게 당연한 거지!”
엘프리드의 말에 카네프가 흡족해하며 맞장구쳤다. 한편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안드라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확실히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거기다 아니스, 다우르. 저 두 사람이 붉은 은월족의 미행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걸 보면 큰 영향력을 가진 신녀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은월족 마을의 정세가 빠르게 불안정해지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안드라스 역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은월족 내부의 상황을 파악해 보려 시도는 하고 있지만, 워낙 폐쇄적인 집단이라 정보 수집이 쉽지 않습니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려면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으음…….”
세 사람의 의견이 완벽하게 한쪽으로 쏠렸음에도 나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카네프가 다시 답답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은율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데, 아직도 그게 고민이야?”
“저도 은율이가 위험해지는 건 죽어도 싫어요. 하지만 은율이의 얼마 남지 않은 혈육이잖아요. 이번이 그 혈육을 만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요.”
“끄응…….”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카네프도 뭐라 다그치지 못했다. 안드라스와 엘프리드도 각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은율이를 딸로 받아들인 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그리고 은율이의 보호자로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노력만 가지고는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했다.
어린나이에 겪어야했던 비극적인 이별…….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행복한 미소를 짓지만, 이 기억은 은율이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 평생 안고가야 할 아픔이었다.
그리고 은율이를 기다리고 있다는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카네프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차피 은율이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계속 이대로 행복하게 지내면 되는 거 아닌가.”
“나중에……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요? 그래서 그때 할머니를 보지 못할 걸 슬퍼하고, 후회한다면요?”
“…….”
“우리는 은율이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해도. 나중에 은율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원망 받을 수도 있겠죠.”
방 안에 있는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은율이를 좋아하고 아끼는 만큼, 나중에 원망 받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너무나도 무섭게 들렸으리라.
마음 같아서는 나도 아니스와 다우르의 부탁은 무시하고. 이곳에서 은율이와 평화로운 일상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은율이를 위한 선택이 아닌, 편해지고 싶은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어려운 길이더라도.
훗날 은율이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고 싶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결국, 주변이 어둑해지고, 술래잡기가 끝날 때까지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원래는 오늘밤 새로운 저택에서 하룻밤 지낼 예정이었지만, 은율이를 데리고 도망치듯 농장 건물로 되돌아갔다.
저택에서 머물고 있는 두 은월족을 보면 더 마음만 심란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은율이를 데리고 조금은 일찍 잠자리를 준비했다.
내가 하루 종일 영주 저택에 있느라 심심했던 새끼 그리핀, 신수 슈슈와 놀아주는 사이. 은율이는 기특하게 혼자 양치와 세수를 하고 귀여운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쏘옥.
잠옷을 입은 귀여운 여우 소녀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헤헤, 아빠.”
“다 씻었어? 양치질 꼼꼼하게 했지?”
“응. 꼼꼼하게 했어.”
“기특하네 우리 딸. 그럼 아빠랑 자러갈까?”
“응!”
나는 은율이를 번쩍 들어 안아 침대 쪽으로 향했다. 먼저 은율이를 눕혀주고, 춥지 않게 베개와 이불을 정리해 준 다음 나도 그 옆에 누웠다.
은율이는 오늘 구경했던 영주 저택과 은월족 사람들에 대해 정신없이 떠들었다.
꽤 재미있었는지 이야기하는 내내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혹시 붉은 은월족 때문에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리아네와 나미라 덕분에 잘 넘어간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미라 아줌마랑 술래잡기 하면서…… 우웅…… 나중에 맛있는 간식을…….”
이야기가 점점 횡설수설해지더니, 은율이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천사처럼 잠든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매일매일 보는 모습이지만, 볼 때마다 사랑스럽고 마음이 뿌듯해지는 기분이었다.
조용히 은율이를 지켜보고 있던 그때.
갑자기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이 울렸다. 나는 황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터치했다. 다행히 은율이는 잠에서 깨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현아, 혹시 자고 있었니?
스마트폰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안 잤어. 은율이만 먼저 재웠어.”
-아! 혹시 나 때문에 은율이 깨운 거니?
“괜찮아, 괜찮아.”
나는 영상통화로 전환해 카메라로 자고 있는 은율이의 모습을 비췄다. 스마트폰 너머로 어머니의 숨죽인 감탄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어머, 어머. 어쩜 이렇게 자는 모습도 예쁠까? 내 손녀는 가면 갈수록 예뻐지네.
“흐흐, 그치?”
한동안 어머니와 함께 은율이의 자는 모습을 구경하다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엄마, 근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으응. 너랑 은율이 잘 있나 싶어서 전화해 봤지. 별일 없니?
“…….”
평소 같았으면 별일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을 텐데, 오늘은 목이 콱 막힌 것처럼 대답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