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73화
다시 찾아온 손님(7)
-시현아?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니?
걱정이 담긴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냐. 은율이랑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어휴, 나는 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해서 깜짝 놀랐잖니.
“미안해, 엄마.”
은월족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금방 고개를 흔들며 단념했다.
이곳의 상황을 잘 모르는 어머니에게 괜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별일 없는 거지?
“으응. 진짜 괜찮아.”
잠깐 이상했던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는지, 그 뒤에도 어머니는 내게 괜찮냐고 수차례 다시 물어보았다. 나는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얼버무렸다.
어머니의 걱정이 가라앉았을 때쯤.
나는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엄마.”
-응?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엄마가 이제 은율이를 못 만난다면 어떨 것 같아?”
스마트폰 너머로 놀란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살짝 흥분한 듯, 어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얘는 정말 오늘 왜 이러니? 갑자기 이상한 질문이나 하고.
“그,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엄마는 어떨 것 같아?”
-뭘 어떻긴! 이렇게 예쁜 손녀를 못 만난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앓아누울 거다!
어머니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과격하게 은율이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
-매일매일 너한테 은율이 사진 받아보는 게 내 삶의 낙이잖니.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스마트폰 가지고 사진관에 가니까 사진을 바로바로 뽑아주더라. 예쁜 사진들만 따로 모아서 예쁘게 앨범도 만들어 놨어.
“하핫, 언제 그런 걸 만들었어.”
은율이 사진으로 앨범 만드는 어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져, 입가에 진한 미소가 생겨났다.
신나게 앨범 자랑을 하던 어머니는 돌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에휴.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어. 은율이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난 건 우리에겐 정말 축복이지만…… 은율이를 못 만나는 진짜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고.
“…….”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저 작고, 가여운 것이랑 생이별한 가족들은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울지…….
안타까움이 섞인 어머니의 중얼거림에 나는 가슴이 뜨끔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시현이 너도 항상 은율이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챙겨줘야 한다. 어디선가 은율이를 걱정하고 있을지 모르는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응, 알았어. 은율이 챙기는 건 걱정하지마.”
-그리고…….
“……?”
스마트폰 너머로 살짝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은율이랑 애들은 언제 데려올 거니? 계속 농장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요즘 통 안 찾아왔잖니.
끄응…….
아무래도 마지막 이 이야기가 본론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쩔쩔매며 어머니에게 변명을 늘어놨다.
“어, 엄마. 진짜 핑계를 대는 게 아니라. 정말 바쁜 일이 많았거든. 농장 일도 많았고…… 그리고 내가 영주님이잖아. 영지에 일도 많아서…….”
-거기 영주님은 매일 일만 하고 쉬지도 않는다니? 그리고 영지일은 네가 아니라 저번에 만난 사슴분이랑, 머리가 노란분이 다 하신다며?
어머니는 라구스와 로커스를 언급하며 나를 압박했다.
실제로 그 두 사람에 비해 내가 처리하는 업무는 많지 않았기에 뭐라 변명을 할 수 없었다.
-이러다 은율이가 할머니 얼굴도 잊어버리겠어.
“아, 알았어. 이번 일만 정리되면 꼭 은율이랑 애들 데리고 찾아갈게.”
아이들과 곧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몇 차례 확인하고 나서야,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서운한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은율이한테 할머니가 사랑한다고 전해줘. 그리고 농장 분들한테 대신 안부 전해주고.
“응.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통화가 종료된 다음.
방문 앞 통로에 적막함이 찾아왔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동안 복도에 기대서서 방금 전에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복도 끝 창문.
그곳으로 높이 뜬 달의 달빛이 쏟아져 들어올 때쯤. 나의 눈동자에 결심의 빛이 반짝였다.
* * *
다음 날.
간단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농장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제 영주 저택에 없었던 식구들도 이미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모두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마자 카네프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항상 귀찮아하던 것과 비교해 굉장히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모두 이야기는 대충 들었지?”
카네프는 스윽 주변을 둘러본 다음, 내게 시선을 보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아직도 결정을 못 한 건 아니지?”
“결정했어요.”
모두의 시선이 내 입으로 쏠렸다.
“역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위험한 건 저도 알지만,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은율이를 할머니와 만나게 해주고 싶어요.”
나는 스스로 내린 결정을 담담하게 말했다.
몇몇은 인상을 찌푸렸고, 몇몇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또 몇몇은 표정을 밝게 하며 내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그 누구도 내 결정에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심하게 반대할 거라 생각했던 카네프도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아마도 은율이를 위하는 마음은 여기 있는 모두가 비슷했기에. 내 결정을 조금이나마 공감해 주는 것 같았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안드라스가 나서서 대화를 이끌었다.
“그렇게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니, 빠르게 준비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죄송해요, 안드라스 씨.”
나 혼자 생각해서 내린 결정임에도, 그 책임은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뻔뻔하게 도움을 받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드라스는 푸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시현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여기 있는 모두가 오히려 섭섭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은율이에 관한 일이라면 시현 님이 부탁하지 않으셨더라도 모두가 기꺼이 나섰을 겁니다.”
“맞아요! 저도 시현 님 못지않게 은율이를 아끼는걸요.”
“여기에 서로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있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시현 선배.”
농장 식구들로부터 나와 은율이를 위하는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따뜻해졌다.
어제 힘들게 고민했던 문제들도 식구들의 응원을 받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훈훈한 미소를 짓는 가운데.
다시 한번 안드라스가 나서서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은월족의 영역은 굉장히 폐쇄적인 곳입니다. 아니스, 다우르와 함께한다면 접근이 어렵지 않겠으나, 너무 많은 인원이 따라간다면 오히려 경계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안드라스는 품에서 지도를 꺼내 모두 앞에 펼쳐보였다. 그리고 지도의 한쪽 귀퉁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이곳에서 리안이 은월족 지도자들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리안 씨가요?”
갑자기 언급된 발레리안의 이름에 내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어제 영지에 침입해서 포로로 잡힌 붉은 은월족들을 이용해 은월족과 협상을 할 생각입니다. 아무리 폐쇄적인 은월족이라도 이렇게 많은 포로라면 협상에 응해올 겁니다.”
“오오…….”
벌써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놓다니……!
나를 포함한 농장 식구들이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안드라스를 바라봤다. 안드라스는 조금 부끄러운 표정으로 헛기침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크흠! 우리 쪽에서 먼저 협상을 요청하겠지만, 사실 협상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
“진짜 목적은 은월족의 시선을 협상 쪽으로 돌리는 목적이죠. 포로 협상을 핑계로 그들의 영역 근처에 병력을 집결시킬 생각입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포로와 외부 병력으로 이목이 집중되겠죠.”
안드라스의 설명을 먼저 이해한 카네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포로 협상으로 이목을 끌면, 그 사이에 상대적으로 은월족 마을에 쉽게 들어갈 수 있겠군.”
“맞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예상치 못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 압박을 넣을 수도 있겠죠.”
“뭐…… 나쁘지 않은 작전이네.”
드물게 카네프의 입에서 칭찬이 흘러나왔다. 칭찬을 들은 안드라스는 내심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후로 안드라스는 계속해서 세부적인 작전을 설명했다. 작전은 짧은 시간동안 계획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아주 자세하게 짜여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안드라스는 지도와 사람들은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가장 중요한 건 역할 분배인데…….”
* * *
농장에서 작전 회의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영주 저택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아니스와 다우르는 우리의 결정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포로 협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잠시 두 사람의 표정이 흐려지긴 했지만, 금방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작전에 동의했다.
대화가 끝난 다음.
두 사람도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은월족 마을의 정세가 빠르게 변하고 있는 만큼, 우리도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나는 가장 중요한 일을 위해 움직였다.
영지 저택의 커다란 응접실.
그곳에서 어제 부쩍 친해진 은율이와 나미라가 정답게 실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미라의 손가락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손에 걸린 실들이 예쁜 모양을 만들어냈고. 그걸 지켜보는 은율이의 눈동자도 초롱초롱해졌다.
내가 인기척을 내며 응접실로 들어서자 은율이가 쪼르르 내게 뛰어왔다.
“아빠!”
“재밌게 놀고 있었어?”
“응! 나미라 아줌마가 실 놀이 하는 법 알려줬어. 엄청 신기해!”
흥분한 은율이의 여유꼬리가 휙휙 돌아갔다. 나는 은율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옆에 있던 나미라와 시선을 맞췄다.
“은율이랑 재밌게 놀아주셔서 고마워요.”
“아유, 별말씀을요. 작은 아가씨와 있을 수 있어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한걸요.”
환하게 웃은 나미라의 얼굴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저기 나미라 씨. 죄송한데 잠시만 은율이랑 둘이 있을 수 있게 해주실래요?”
“아! 물론이죠. 저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나미라는 은율이에게 한번 방긋 웃어준 뒤, 잰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내가 재밌게 놀아주던 나미라를 쫓아내서 마음에 안 드는지, 은율이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픽 웃음을 터뜨리며 은율이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가까운 의자에 앉으며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귀여운 여우 소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동그란 두 눈동자를 끔뻑거렸다.
“은율아.”
“응?”
“나랑 같이 할머니 보러가지 않을래?”
“할머니? 응응! 보러 갈래.”
은율이는 다시 신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들썩거렸다. 할머니라는 말에 너무나 기뻐하는 은율이가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흐릿하게 웃으며 ‘할머니’의 의미를 정정해 주었다.
“지구에 있는 할머니 말고.”
“……?”
“은율이의 엄마와 아니스 이모를 낳아준 할머니 말하는 거야.”
“…….”
“그 할머니…… 보러 갈래?”
밝았던 은율이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