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74화
은월족 마을(1)
“할머니…… 보러갈래?”
“…….”
은율이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은율이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렸다.
생각에 잠긴 은율이.
작은 여우귀가 움찔움찔거리고, 꼬리는 아래쪽을 향한 채 좌우로 휘휘 흔들렸다.
물끄러미 은율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평소 때라면 은율이의 표정을 곧잘 읽어냈겠지만, 이번만큼은 이 작은 여우 소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은율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하는 걸까? 아니면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껏 자신을 찾지 않았던 할머니에 대한 원망을 하고 있는 걸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 은율이가 굉장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양팔로 은율이를 꼬옥 감싸 안았다.
“괜찮아, 은율아.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어. 그리고 무슨 선택을 하던지 은율이 옆에는 꼭 아빠가 있을 거야. 약속할게.”
“응…….”
내 품에서 파르르 떨리던 작은 몸이 조금씩 진정됐다. 그 뒤로도 나는 한참동안 은율이를 안고 조용히 기다려줬다.
잠시 후.
여우귀가 먼저 쫑긋 세워지더니, 이어서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은율이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동그란 두 눈동자에 반짝임이 일어났다.
“나…… 할머니 만나러 갈래.”
“그래. 아빠랑 같이 다녀오자.”
어려웠던 은율이에게 물어보는 일도 끝났다.
남은 건 은월족 마을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게 준비하는 일뿐이었다.
* * *
은월족 마을 방문 계획.
계획의 대부분은 안드라스가 미리 짜놓은 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이 계획에 참여하는 농장 식구들은 크게 세 팀으로 나눠졌는데.
첫 번째 팀은 나와 함께 은율이를 데리고 은월족 마을에 방문할 인원.
두 번째 팀은 붉은 은월족 포로들을 이끌고 협상을 시도할 인원.
마지막 팀은 이곳에 남아 나머지 인원들을 대신해 농장을 돌볼 사람이었다.
농장에 남는 인원은 릴리아와 두 명의 천족이었다.
릴리아는 자신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같이 따라가겠다고 칭얼댔지만, 오빠인 안드라스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도 농장 일을 맡길 사람이 필요하다며 그녀를 잘 달래줬다.
그리고 졸지에 일을 전부 떠안게 된 아슈미르와 우르키에게도 미안함을 전했다.
“두 분한테는 정말 죄송해요. 어쩌다보니 또 이렇게 됐네요.”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저희 도움은 별로 필요 없을 거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런 것 치고는 저희를 알뜰살뜰 잘 부려먹으시는군요.”
“하하하…….”
뼈가 담긴 아슈미르의 발언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농장에 합류한 두 사람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아슈미르는 민망해하는 나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농담입니다. 애초에 저희들은 시현 님을 돕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니, 일을 맡기는 것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마십시오.”
기계처럼 딱딱하기만 했던 아슈미르가 농담이라니…….
그녀도 이곳에 와서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던 우르키도 양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의욕을 불태웠다.
“시현 님, 농장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 아슈미르 씨도 정말 고마워요. 이전에 신세진 것까지 포함해서 나중에 꼭 보답할게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마침 저희 쪽에서도 조만간 부탁드릴 일이 있을 겁니다.”
아슈미르와 우르키는 농장 일은 맡겨달라고 말하며, 중요한 일을 앞둔 우리를 응원해 줬다.
아슈미르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던 ‘조만간 부탁드릴 일’에 대해 의문이 잠시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넘겨들었다.
포로 협상을 위한 두 번째 팀은 발레리안, 안드라스, 그리고 엘프리드가 맡기로 했다.
발레리안은 이미 은월족 영역 근처로 이동해 협상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나머지 두 사람이 포로들을 이끌고 합류하기로 했다.
이들이 포로 협상에 합류한 이유는 간단했다. 세 사람 모두 마계에서 알아주는 가문의 출신인 만큼, 그 이름값을 빌려 유리한 협상을 진행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주변을 통치하는 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쉽다는 점에서도 세 사람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은월족 마을로 향하는 팀.
당연히 나와 은율이가 들어갔고, 마을로 안내해 줄 아니스와 다우르도 포함됐다.
예상과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아니스, 다우르와 함께 왔던 여우 수인 나미라가 영주 저택에 남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계획 준비가 진행되던 와중에 이곳에 남아 은율이의 성장을 계속 지켜보고 싶다며 이곳에 남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저는 작은 아가씨 부모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분들을 대신해서라도, 꼭 작은 아가씨와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싶어요. 허드렛일이라도 도울 테니 제발 이곳에 남게 해주세요.”
나미라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간절하게 말했다. 아니스와 다우르는 이미 그녀의 결심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두 사람 모두 그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어차피 영주 저택에 일할 사람이 더 필요했고, 짧은 시간 동안 그녀가 은율이에게 보인 진심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다시 계획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미라가 빠지고 나머지 두 사람이 은월족 안내를 맡게 됐다.
이게 끝이냐고?
그럴 리가…….
은월족 마을의 혼란한 정세를 감안해서, 정말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추가로 합류했다.
“시현 님, 걱정마세요. 은율이와 시현 님은 제가 꼭 지켜드릴게요.”
“고마워요, 리아네 씨. 그런데…….”
“예?”
“정말 저 사람들 괜찮을까요?”
내 불안한 시선이 닿은 곳에는 두 사람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흐흐흥∼! 흐으응!”
테르잔은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무기들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보는 것만으로 살 떨리는 흉악한 무기들이 수없이 깔려 있었다.
꽤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으로 향하는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의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소풍을 떠나기 전날 아이처럼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시현, 시현!”
“네?”
“은월족 마을에서 한 마리 잡을 때마다 집값 추가해 주는 거지?”
“저기 테르잔 님…… 저희는 지금 싸우러 가는 게…….”
“그럼 생포 말고 조용히 암살하는 걸로…….”
“은율이가 무사히 할머니를 만날 수 있으면, 집값 따로 안내셔도 평생 저택에서 살게 해드릴 테니까. 제발 과격한 행동은 참아주세요.”
평생 저택에서 살게 해준다는 말에 테르잔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무기들을 하나씩 쓰다듬으며 ‘오랜만에 활약할 기회였는데…….’라며 아쉬워했다.
나는 제발 저 무기들이 절대 쓸 일이 없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강하게 빌었다.
테르잔도 충분히 무시무시했지만, 그 옆에 있는 사람에 비하면 정말 귀여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쯧…….”
모든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한 사람.
만약에 사람의 감정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 주변에는 아마도 ‘짜증’이라는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을 것 같았다.
“저…… 사장님?”
“왜!?”
“그렇게 짜증 내실 거면 그냥 농장에 계시죠?”
“시끄러!”
나는 깨갱하며 카네프의 곁에서 물러섰다.
원래는 그 누구도 카네프를 계획에 참여시킬 생각이 없었는데. 본인이 스스로 은월족 마을로 은율이를 데려가겠다고 나섰다.
그가 직접 나서겠다는 말에 나뿐만 아니라 농장 식구들 모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농장에서 빈둥대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뻔뻔한 말을 내뱉던 게 일상이었는데…… 꽤 번거로운 일을, 그것도 누구의 부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설 줄이야.
아까 농담을 하던 아슈미르 이상으로 놀라운 변화였다.
그렇다고 귀찮아하는 성격이 변한 건 아닌지라, 떠날 준비를 하면서 짜증은 있는 대로 다 부리고 있었다.
“으으. 저놈들 때문에…….”
“…….”
“크흠!”
아니스와 다우르는 카네프의 살벌한 눈빛을 받을 때마다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꼬리를 뒤로 숨기며 슬금슬금 내 옆으로 피신했다.
귀찮은 일은 죽어도 안하던 카네프가 이렇게 직접 나선 이유는 아마도 은율이 때문일 것이다.
겉으로는 아닌척하지만, 카네프가 은율이를 매우 아낀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것도, 위험한 곳으로 은율이를 보내는 것도 꽤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은율이를 신경 써주는 마음이 고맙고, 또 같은 편이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존재임에 틀림없기에. 저렇게 짜증을 부리고 있어도 나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더 크게 느껴졌다.
다만 걱정스러운 점이라면.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카네프와 테르잔. 이 두 사람이 함께했을 때. 어떤 후폭풍이 일어날지 두렵다는 것뿐이었다.
기분이 저기압인 카네프 때문에 딱딱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그때. 문을 열고 은율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빠!”
은율이는 나를 발견하고 쪼르르 달려왔다. 등 뒤에는 빵빵해진 캐릭터 가방을 메고 있었다.
“은율이도 준비 다 했어?”
“응. 나미라 아줌마가 도와줬어.”
싱글벙글한 은율이가 가져온 가방을 열어 내게 보여줬다. 안에는 갈아입을 옷가지와 세면도구 그리고 과자와 간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과자는 왜 이렇게 많이 넣었어?”
“같이 나눠먹을 거야.”
옆에 있던 리아네가 슬쩍 끼어들며 물었다.
“은율아, 나도 과자 나눠줄 거야?”
“응! 리아네 언니도 나눠줄게.”
“고마워, 은율아.”
은율이에게는 은월족 마을로 향하는 여행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이야기는 숨겼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은율이가 카네프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은율이가 다가오자마자 카네프의 얼굴에 가득하던 짜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장님! 사장님도 같이 가는거야?”
은율이는 기대감이 가득한 눈동자로 올려다봤다. 카네프는 흠칫 몸을 떨더니,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번에는 나도 같이 갈 거야.”
“와아!”
“내가 같이 가니까 좋아?”
“응! 사장님은 밖에 잘 안 나오니까, 같이 놀러가기 힘들잖아. 이번에 같이 갈 수 있어서 좋아. 사장님도 내 과자 나눠줄게.”
은율이는 과자가 가득한 가방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그 모습을 본 카네프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는 상체를 숙여 은율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헤헷.”
카네프의 은율이의 모습을 보며 나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