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77화
은월족 마을(4)
넘어진 아이는 피부에 살짝 쓸린 흔적만 남았을 뿐, 다행히 큰 상처가 생기지는 않았다.
“훌쩍…….”
감정이 좀 가라앉은 은월족 아이는 코를 훌쩍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눈가에 그렁그렁 매달려 있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내 품이 꽤 편안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안겨 있음에도 아이는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어머, 금방 얌전해진 것 좀 봐. 역시 아이들은 시현 님을 정말 잘 따르네요.”
옆에서 지켜보던 리아네가 잠잠해진 아이를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카네프도 슬쩍 나와 아이를 쳐다보더니 ‘픽’ 하고 웃음 지었다.
나는 어깨가 살짝 으쓱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품에 안겨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안 아프지?”
“응…….”
“너는 이름이 뭐니?”
“……토리.”
“토리? 정말 예쁜 이름이네.”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으로 아직 표정은 어색했지만. 귀가 쫑긋거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은율이를 달래면서 터득한 스킬이 여기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스윽, 스윽!
옆에 있던 은율이가 내 옷을 잡아당겼다.
“아빠. 나도 볼래.”
“아, 잠깐만.”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춰 은율이가 토리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은율이는 적극적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관심을 표했다.
“와아. 진짜 작아. 아기야, 아기!”
토리를 보며 작다고 감탄하는 은율이.
내 눈에는 아기가 아기를 보고 감탄하는 것 같아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은율이는 내가 웃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토리를 쓰다듬었다.
원래 성격이 순한 편인지. 토리는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고 덤덤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이제 안 아파?”
-끄덕끄덕.
“기특하네. 내가 맛있는 거 줄까?”
“마싯는 거?”
토리는 ‘맛있는 거’라는 말에 처음 반응을 보였다. 은율이는 재빨리 자신의 가방을 뒤져 캐러멜 사탕 하나를 꺼냈다.
사탕의 포장지를 열자 풍기는 달콤한 내음.
그 기분 좋은 향기에 토리의 여우 귀가 뾰족하게 세워졌다. 그리고 은율이가 건네는 사탕을 덥석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사탕을 씹을수록 토리의 눈이 점점 커지면서 눈동자에 초롱초롱한 빛이 더해졌다. 작은 꼬리도 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휙휙 흔들렸다.
은율이는 뿌듯한 표정으로 토리에게 물었다.
“맛있어?”
“응! 너무 마시써!”
“헤헷, 다행이다.”
두 아이는 서로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꿀꺽…….
-꿀꺽…….
앞쪽에서 군침 삼키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려왔다. 아까 토리와 함께 있었던 은월족 아이들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캐러멜 사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도 먹을래?”
-끄덕끄덕!
-끄덕끄덕!
두 아이는 목이 걱정될 정도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우물우물, 은율이 너는 엄청 멀리서 왔구나.”
“응.”
“부럽다. 나도 마을 밖에 나가 봤으면…….”
자신의 이름을 ‘링’이라고 밝힌 은월족 여자아이가 캐러멜 사탕을 우물거리며 중얼거렸다. 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붉은색 털을 가진 남자아이, ‘카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바깥에는 이렇게 맛있는 사탕이 많은 거야?”
“으음…… 아니, 내가 사는 농장에만 있어. 농장에는 맛있는 딸기도 많아.”
“딸기?”
카샤는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링은 뭔가를 생각해 내고 놀라 펄쩍 뛰었다.
“아앗! 나 ‘딸기’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엄청 맛있는 거라고 어른들이 말하는 거 들었어.”
“정말? 딸기가 그렇게 맛있어? 이 캐러멜 사탕이라는 것보다도?”
어느새 은율이와 친해진 두 아이는 바깥세상을 주제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은율이도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은근히 즐거워 보였다.
리아네는 힐긋힐긋 아이들을 살피며 내게 속삭였다.
“어느새 저렇게 친해졌네요. 은율이도 새로 사귄 친구들이 마음에 드나 봐요.”
“그렇네요. 농장에는 은율이와 놀아줄 사람은 많아도, 또래 친구는 없으니까요.”
-꾸욱. 꾸욱.
“아조씨…….”
“응? 과자 더 먹을래?”
나는 리아네에게 작은 과자를 받아 토리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직도 내 품에 안겨 있는 토리는 아기새처럼 과자를 냉큼 받아먹었다.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아이인데.
토리는 조금의 불편한 기색도 없이 완전히 내게 몸을 맡기고, 맛있는 과자와 안락함을 즐기고 있었다.
뭐, 어때?
귀여우면 그만이지.
앞서서 안내하던 아니스와 다우르도 토리를 안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조금 당황스러워했다.
“시현 님은 정말 신기하신 분이네요. 아이들이 외부인을 신기해하는 걸 넘어, 이렇게까지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 건 흔하지 않거든요.”
“원래 저런 녀석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꼬드기는 게 특기거든.”
카네프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사장님. 말을 해도 하필 ‘꼬드기다’가 뭐예요.”
“왜? 딱 맞는 표현인데.”
“아니, ‘친화력이 좋다’든지, ‘아이를 잘 돌본다’든지. 다른 좋은 표현들 많잖아요.”
“말만 통하면 됐지 뭘…….”
나와 카네프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일행은 마을의 중심부를 지나, 커다란 규모의 건축물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인원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카디스 영주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카디스 영주님.”
“환영합니다.”
기다리고 있던 인원들 모두 정중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환대해 주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조금 얼떨떨하게 인사를 받았다.
“들어가시죠. 안쪽에서 대장로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에 따라 무심코 건물로 들어서려다가 멈칫 발을 멈췄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나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봤다.
은율이와 새로 사귄 두 친구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같이 더 놀고 싶은데, 그냥 따라 들어가기는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 토리는 당당하게 내 품에 안겨 과자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저 아이들도 같이 따라가도 괜찮을까요? 방금 친해졌는데 이대로 헤어지는 건 아쉬울 것 같아서요.”
안내하던 은월족 남자가 흘깃 내 뒤쪽을 살폈다.
“아…….”
그는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금방 대답을 들려주었다.
“따로 아이들이 쉴 수 있는 방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대신 영주님께서는 바로 대장로님을 만나러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계속 같이 놀 수 있다는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품 안에 있던 토리를 리아네에게 맡겼다.
“리아네 씨. 대신 아이들 좀 부탁드릴게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토리는 내 품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며 잠시 칭얼거렸지만, 리아네가 과자를 입에 넣어주니 금방 잠잠해졌다.
“은율아. 친구들이랑 놀고 있어. 아빠 금방 다녀올게.”
“응.”
은율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나와 카네프는 안내를 받아 대장로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길게 이어지는 복도.
안내해 주는 은월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카네프에게 속삭였다.
“사장님. 생각보다 분위기가 편안한데요?”
“그럼 처음 만나자마자 무기라도 들이밀 줄 알았냐?”
“그건 아니라도. 조금은 껄끄러운 느낌일 줄 알았죠.”
“발레리안과 안드라스 녀석이 포로 협상으로 압박을 넣고 있을 거야. 아무리 막 나가는 녀석들이라고 해도 우리를 대놓고 노리지는 않을 거다.”
말하는 도중에 카네프는 눈동자에 스산한 빛을 내뿜었다.
“물론 저쪽에서 허튼 짓거리를 한다면, 이쪽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지만 말이야. 은월족이랑 제대로 붙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
“…….”
리안 씨, 안드라스 씨.
제발 힘내주세요!
나는 두 사람을 응원하며 이 평화로운 분위기가 계속되기를 기도했다.
“여기입니다.”
-드르르륵.
나무로 된 커다란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방 안에서 대장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 준 은월족 남자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다음,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장로’라는 표현에서 굉장히 높은 직책일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느낌과는 반대로 방 안의 풍경은 대체로 수수했다.
눈에 띄는 장식 같은 건 거의 없었고. 탁자와 의자, 가구 몇 개만 단출하게 놓여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소, 카디스 영주.”
탁자 끝쪽에 앉아 있던 노인이 자리에 벌떡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환영하오. 은월족 장로 중에서 대표를 맡고있는 ‘라휼’이라고 하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하게 앉으시오.”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대장로 라휼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그는 깊은 주름과 덥수룩한 수염이 난 노인이었다. 그리고 나이의 영향 때문인지. 은율이나 다른 은월족 사람들보다 꼬리의 털이 푸석푸석해 보였다.
방안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던 카네프가 별다른 인사도 없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무례한 행동이었음에도 라휼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차분히 대화를 시도했다.
“오랜만에 외부에서 찾아온 손님이라 이것저것 나누고 싶은 대화가 참 많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빠르게 본론부터 말하겠소. 카디스 영주께서 조금 양해해 주시구려.”
“저는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먼저 은월족 구성원 일부가 그대의 영지에 무단으로 침입한 일에 대해 사죄드리겠소. 잘못에 대한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은월족 전체의 뜻은 아니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소.”
라휼은 가장 민감한 문제를 빠르게 언급하며 사죄의 뜻을 밝혔다. 그는 확실히 숙이는 자세를 취하면서, 또 너무 비굴하지 않게 적절한 태도를 유지했다.
“피해보상은 카디스 영지 측에서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준비하겠소. 진행 중인 포로 협상도 최대한 적극적으로 응할 터이니, 모쪼록 카디스 영주의 자비로움을 보여주셨으면 하오.”
라휼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더 사죄의 뜻을 명확히 했다. 나는 겉으로 담담한 척 이야기를 들었지만, 의외의 반응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잘못을 전부 인정할 줄이야…….
슬쩍 카네프 쪽을 바라봤다.
카네프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조용히 속삭였다.
“뭔가 이상한데…….”
“그래도 우리한테 나쁜 상황은 아니잖아요?”
“모르지. 저 늙은이가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도.”
정말 이대로 일이 잘 풀리는 걸까?
나의 눈동자에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라휼의 모습에서는 전혀 의심스러운 점을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