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78화
은월족 마을(5)
내가 카네프와 속삭임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라휼의 얼굴에는 그다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는 우리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혹시 우리에게 요청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시오.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 협조해드리겠소.”
상대 쪽의 시원시원한 태도에 나도 숨김없이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저희가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은율이를 할머니와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 찾아온 거예요.”
“으음…… 그 아이의 이름이 ‘은율’인가 보구려.”
“그분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리고 손녀를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까지요.”
“…….”
지금껏 거침없이 이야기하던 라휼이 처음으로 대답이 길어졌다. 그는 한동안 고민하는 얼굴로 자신의 수염을 몇 번 쓸어내리더니, 이내 심각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아이의 할머니, 그분께서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계시오?”
“아니스 씨에게 들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신녀님이라고…….”
“그렇소. 수호신님의 뜻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은월족을 보호해 주는 존재라오.”
라휼은 우리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중요한 분이시니 만큼. 아무나 그분을 만나 뵐 수 없소. 특히 외부인이라면 더더욱 어려운 일이오. 거기다 지금 신녀님의 건강 상태가 많이 우려되는 수준이라.”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카네프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 대단하신 신녀님이 직접 손녀를 만나고 싶다잖아. 뭐가 그렇게 복잡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어차피 네가 여기 대장로라며? 그럼 네가 허락하면 되는 문제 아니야?”
“신녀님에 관한 문제라면 아무리 대장로라고 해도 절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소. 모든 마을 장로의 동의가 있어야 일의 진행이 가능하오.”
카네프의 조금 공격적인 말들에도 라휼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설명했다. 답답해하는 카네프를 대신해 내가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은월족 내부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도 이미 들었어요. 저희는 그런 문제에는 전혀 관심 없어요. 그저 은율이를 할머니와 만나게 해주고 싶을 뿐이에요.”
“으음…….”
“그 일만 끝나면 저희는 조용히 떠날 거예요. 영지를 침입했던 일도 다시 문제 삼지 않을게요.”
나는 라휼을 설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조금은 효과가 있었는지 라휼이 반응을 보였다.
“신녀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일단 장로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소.”
“어떻게 해야 하죠?”
“지금 장로들이 신녀님의 건강과 함께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이 포로 협상 문제요. 그 문제에 대해 카디스 영주가 원만한 해결을 약속해 준다면, 신녀님과의 만남을 어느 정도 수긍해 줄 것 같소.”
안드라스가 예상했던 대로 은월족은 포로 협상에 꽤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포로 협상은 은월족에게 압박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굳이 그 협상으로 이익을 얻을 생각 따윈 없었다.
포로 협상을 빌미로 은율이가 안전하게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좋은 거래라고 생각됐다.
슬쩍 카네프 쪽을 바라보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은율이가 할머니를 무사히 만날 수 있다면, 은월족에서 원하는 대로 포로 협상이 진행될 거예요. ‘카디스’라는 이름을 걸고 약속드릴게요.”
이름을 걸겠다는 말에 라휼도 덩달아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대의 뜻은 잘 알겠소, 카디스 영주. 다시 한번 마을의 장로들과 이야기를 나눠 본 다음, 결정된 내용을 빠르게 전해드리겠소.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아마 좋은 결과가 있을 거요.”
라휼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라휼을 우리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장로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떠나갔다.
나와 카네프는 뒤에 들어온 은월족 남자를 따라 리아네와 은율이가 쉬고 있는 곳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아까 지나왔던 복도를 걸으며 카네프에게 슬쩍 물었다.
“은율이의 할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요?”
“나야 모르지. 그 대장로라는 녀석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카네프는 뭔가 찝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뭔가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단 말이야.”
* * *
우리는 금방 리아네와 은율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은율이는 링, 카샤, 토리. 은월족 세 명의 아이들과 재밌게 놀고 있었다.
바깥 세상에 대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은지, 아이들은 은율이에게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나외 리아네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간간이 이야기를 나눴고, 카네프는 구석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시간이 흐르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점차 어두워졌다.
“악! 늦었다. 엄마한테 혼나겠어.”
“우리는 이제 가볼게. 은율아, 내일 또 놀자!”
“안녕, 아조씨!”
은월족 아이들은 시간이 늦었다며 떠나갔다.
나는 은율이를 데리고 건물 밖까지 나가 아이들을 배웅해 줬다.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은 은율이를 안아 들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마을 건물들에 불빛이 하나둘씩 켜졌다. 그때쯤 우리는 정성스럽게 차려진 저녁 식사를 대접받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한동안 아무도 우릴 찾지 않았다. 편안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조금씩 불편해져 갔다.
이야기는 잘 되고 있을까?
으음, 오늘 안에는 만나기 힘드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문을 두드리며 익숙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으로 안내받으면서 헤어졌던 아니스였다.
“아니스 씨.”
“저녁은 맛있게 드셨나요?”
“네, 맛있게 잘 먹었어요.”
한차례 싱긋 웃은 그녀는 밝은 얼굴로 설명을 계속했다.
“한 시간 전쯤에 장로 회의가 있었어요. 거기서 시현 님이 요구했던 내용을 주제로 논의가 있었는데, 다행히 요청을 받아들이는 거로 결론이 났어요.”
“정말인가요? 그럼 은율이가 할머니를 만날 수 있나요?”
“맞아요. 제가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결정이 났어요. 아마 포로 협상의 압박이 유효했나 봐요.”
내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다행이네요. 그럼 언제 그분을 만나 뵐 수 있죠?”
“지금 당장 준비하셔야 할 것 같아요.”
“예에?? 지금 당장이요?”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아니스는 조금 민망해진 표정으로 변명했다.
“어머니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보니 만남이 허락된 시간이 한정적이에요. 조금만 양해해 주세요.”
“알겠어요. 그럼 준비할게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데…….
당황스럽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늦은 시간인 데다가, 여행의 피곤함으로 졸고 있는 은율이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은율아, 일어나볼래?”
“우웅…….”
“지금 할머니 만나러 갈 거야.”
“할…… 머니? 지금?”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말에 흐릿했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은율이는 잠을 쫓기 위해 손으로 눈을 열심히 비비적거렸다.
카네프와 리아네도 우리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이 녀석들 잠깐만 얼굴 보게 해주고 생색을 내려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게 어디에요.”
그때 아니스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건 은율이랑 시현 님뿐이에요. 두 분은 여기서 계속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뭐?”
“우, 우리는 못 가요?”
“시현 님이 어머니를 만나는 것도 논란이 많았어요. 몇몇 장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겨우 허락을 받아낸 거예요.”
카네프는 불쾌한 감정을 담아 아니스를 째려봤다.
무시무시한 기세에 아니스의 몸이 벌벌 떨렸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카네프를 진정시켰다.
“진정하세요, 사장님. 아니스 씨가 결정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은율이를 따라가는 건 저 하나로 충분해요.”
“저놈들이 너랑 은율이만 있는 동안에 헛짓거리하면 어쩌려고?”
의심하는 카네프에게 아니스가 결백함을 호소했다.
“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어머니에 관한 일이라면 은월족 그 누구라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어요.”
“아니스 씨를 한번 믿어 봐요.”
“쳇…… 그래도 여기서 기다리는 건 안 돼. 나랑 리아네가 따라갈 수 있는 데까지는 따라갈 거야.”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바로 안내해드릴게요.”
아니스는 곧바로 안내를 시작했다.
우리는 쉬고 있던 건물을 빠져나와 대여섯 명 정도 되는 경비병과 합류했다.
일행은 경비병을 앞장세워 마을 중심부 쪽과 반대된 방향으로 걸어갔다.
지나가는 건물들이 점차 줄어들면서 주변의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경비병들이 손에 들고 있는 호롱불만이 길을 밝혀주는 유일한 빛이 되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구름이 짙게 드리워 달과 별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괜히 불길하다는 생각이 떠오르던 그때.
-흠칫!
나는 기이한 기운을 느끼고 몸을 멈춰 세웠다. 본능적으로 그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둠 때문에 깜깜한 풍경.
눈을 찡그리며 겨우겨우 흐릿한 형체를 식별했지만,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특별한 무언가는 없었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숲.
그리고 그 사이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전부였다.
“시현 님? 무슨 일이세요?”
아니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갑자기 멈춰선 나를 살폈다.
“아, 죄송해요. 근데 저기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뭐죠?”
“저곳은 수호신님을 모시는 제단이 있는 곳이에요. 가끔 마을에 큰 행사가 있으면 신녀님이 제단에서 의식을 올리기도 해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아, 아뇨. 그냥…….”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수호신 제단에서 꺼림칙한 느낌이 났다고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아니스는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다시 경비병들을 앞세워 안내를 계속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서 계속 뒤쪽을 힐끗거렸다.
그냥 기분탓이었나?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는데…….
흐릿하게 보이던 오솔길은 몇 걸음 걷자마자 금방 어둠에 파묻혀 버렸다. 마음속에 남은 찝찝함을 애써 무시하며, 앞으로 만나게 될 신녀, 아니 은율이의 할머니와의 만남에 집중했다.
뒤쪽에 마을 중심 쪽 건물들의 빛이 흐릿하게 보일 때쯤.
앞쪽에서 경계가 한창이 경비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경비병이 담벼락 주변을 돌아다니며 삼엄한 경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높은 담벼락과 많은 경비 인력에 비해 그 안쪽에 지켜지고 있는 건 평범한 규모의 건물 한 채가 전부였다.
나는 그 건물이 신녀의 거처라는 걸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