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84화
수호신과 신녀(6)
은율이를 깨울 방법이 있다는 말에 나는 눈을 빛냈다.
“은율이는 지금 평범하게 잠든 상태가 아니에요. 아마 수호신님은 무의식 깊은 곳에 은율이의 의식을 가둬뒀을 거예요.”
“무의식 깊은 곳…… 그럼 어떻게 그곳에서 은율이의 의식을 깨우죠?”
“직접 은율이의 의식 세계로 들어가야 해요.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어요.”
“은율이만 깨우면 수호신을 막을 수 있는 거죠?”
내 질문에 미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심각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수호신님은 어떻게든 우리를 방해하려고 할 테니까요. 거기다 의식 세계에 잘못 갇히게 되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녀는 이 방법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리려 했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정도의 위험은 충분히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얼마나 위험한지는 상관없어요. 은율이를 되찾을 수만 있으면 뭐든지 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설명해 드릴게요.”
우리는 제단에 누워 있는 은율이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았다.
“제가 가진 신녀의 힘으로 시현 님을 의식 세계로 보내드릴 거예요. 시현 님은 그곳에서 은율이가 다시 깨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게 끝인가요?”
“아마 수호신님의 방해가 있을 거예요. 더 도움을 드리고 싶지만, 의식 세계 안에서는 시현 님 혼자 이겨내셔야 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바로 시작해 주세요.”
“그럼, 여기에 손을…….”
은율이의 이마 위에 미르나와 내가 손을 포갰다.
“최대한 마음을 비우고 집중하세요. 의식 세계에 완전히 진입할 때까지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미르나와 손을 포갠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내 손을 지나서 은율이의 이마 쪽으로 향했다.
-큭, 쿨럭!!
심한 기침 소리와 함께 비릿한 피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미르나에게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걸 깨닫고 눈을 뜨려는 순간.
“집중하세요!!”
“……!”
“시간이 얼마 없어요. 지금은 은율이를 구하는 데만 전념해야 합니다.”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강한 집념이 느껴졌다. 나는 반쯤 열린 눈을 다시 감았다. 잠시 흔들렸던 기운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집중…….
집중…….
은율이를 구해야 한다는 것만 머릿속으로 되뇌며,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는 곳에 의식을 집중했다.
“부탁드립니다…….”
미르나의 들릴 듯 말 듯한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 * *
“으음…….”
주변이 환해지는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떴다는 표현은 조금 어색한 설명이려나. 실체가 없이 의식만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라, 주변을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해 보였다.
“아아, 은율이! 은율이를 찾아야 해!”
뒤늦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닫고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끝없이 펼쳐진 흰색 공간.
나는 마치 바다를 떠다니는 느낌으로 이곳저곳 은율이를 찾아 헤맸다.
혹시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려고 할 때쯤, 멀리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은율아? 은율아!”
-쫑긋!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보다 먼저 반응하는 여우귀.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은율이임을 확신하고 열심히 그곳으로 향했다.
“은율아, 아빠 왔…….”
-콰아앙!!
“으윽!”
별안간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사방에서 벽이 가로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벽 때문에 더 이상 은율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없었다.
“쯧! 귀찮게 여기까지 따라올 줄이야.”
“너는……?”
스르륵 모습을 드러내는 한 사람.
여우를 닮은 얼굴에 중성적인 느낌을 가진 은월족이었다.
“미르나 신녀의 힘을 빌려 이곳까지 온 거겠지? 가만히 있었으면 좀 더 삶을 이어나갔을 텐데. 쓸데없이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허비해 버리는군.”
“여우신?”
“맞아. 너는 이름이 ‘시현’이라고 했던가. 평범한 인간 주제에 겁도 없이 여기까지 따라왔네?”
“네가 그러고도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어? 얼른 은율이를 풀어줘!”
내가 악을 쓰는 모습이 재밌다는 듯, 여우신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오랜 세월 동안 은월족 전체를 지켜준 대가가 저 꼬맹이 하나면, 아주 괜찮은 거래 아닌가?”
“이런 미친…….”
나와 여우신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웅크리고 있던 은율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까 내 외침이 들린 게 틀림없었다.
“은율아! 여기야, 여기!”
“그만 소리쳐. 어차피 이제 소용없으니까.”
여우신은 뭔가를 계속 찾으려는 은율이를 보며 와락 인상을 구겼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이참에 잘됐어. 여기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으면 되니까.”
“뭘 하려는 거지?”
“여기서 가만히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고.”
여우신의 모습이 허상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은율이의 눈앞에 두 개의 사람 형상이 나타났다. 그중 여자는 은빛, 또 한 명의 남자는 붉은빛 털을 가진 은월족이었다.
“은율아. 잘 지냈니?”
“많이 보고 싶었지?”
“아…….”
저 사람들은……?!
오래전 은율이와 교감을 나눴을 때, 희미한 기억 속에서 보았던 다정한 부부.
저 두 사람은 은율이의 친부모가 틀림없었다.
“많이 힘들었지?”
“정말 미안해, 은율아.”
“아빠…… 엄마…….”
다정한 목소리로 은율이를 위로하는 두 사람.
그 뒤로 음흉한 여우신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안타깝게도 은율이는 아빠, 엄마에게 시선을 뺏겨 여우신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은율아, 안 돼! 그 사람들은 여우신이 만들어 낸 가짜야!”
목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외쳐봤지만, 내 목소리는 은율이에게 닿지 못했다.
“…….”
은율이는 눈앞에 부모님을 보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왜 그러니, 은율아?”
“뭔가 찾고 있는 거니?”
“……아까 아빠 목소리가 들렸어.”
“하핫, 아빠는 여기에 있잖니?”
“그래. 내가 은율이의 아빠야.”
두 사람은 너무나도 다정한 표정과 목소리로 계속 은율이를 안심시켰다.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단다. 아빠랑 엄마랑 같이 계속 여기서 지내는 거야.”
“여기 은율이가 좋아하는 과자도 잔뜩 가져왔어. 한번 볼래?”
여자 은월족이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평소에 은율이가 좋아하는 과자들이 가득했다.
“아빠는 은율이가 좋아할 장난감, 인형을 원하는 대로 만들어 줄게.”
“그러니까 은율아. 우리랑 같이 이곳에서 영원히 지내는 거야. 자! 얼른 이리 오렴.”
“…….”
은율이는 주춤주춤 두 사람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은율이가 가까워질수록 여우신의 음흉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딱 한 걸음.
은율이는 딱 한 걸음만 남겨두고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얼른 이리 오렴.”
“은율아?”
손짓하는 두 사람 앞에서 은율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 나는 지금 큰 농장에서 지내고 있어. 엄청나게 큰 야쿰도 있는데. 아기 야쿰들은 정말 귀여워. 특히 아꿍이가 제일 귀여운 것 같아.”
“……?”
“……?”
“농장 식구들 중에서는 리아네 언니가 가장 날 잘 챙겨줘. 일이 안 바쁠 때는 밖에 놀러 나가거나, 무릎베개하고 낮잠도 많이 재워줘. 안드라스 선생님은 진짜 똑똑해. 나한테 글자랑 숫자를 알려줬어. 가끔 어려운 말을 많이 하는데, 가만히 들어주고 있으면 엄청 기뻐해.”
농장 식구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할 때마다 은율이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엘린 오빠는 처음엔 수련하기 바빠서 잘 안 놀아줬는데 요즘은 잘 놀아줘. 특히 그리, 피니를 산책시키러 갈 때면 항상 같이 가줘. 릴리아 언니는 엄청 엉뚱한데. 신기한 장난감을 잘 만들어. 그리고 내가 노래할 때마다 악기를 같이 연주해 줘.”
“…….”
“…….”
“아슈미르, 우르키는 천족이야. 처음에는 무서운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농장에서 엄청 열심히 일해. 사장님은 나한테 천족은 다 나쁜 놈들이라고 그랬는데, 두 사람 다 착한 것 같아. 아! 사장님은 농장에서 제일 센 어른이야. 귀찮다고 매일 방에서만 뒹굴뒹굴해서 농장 식구들이 맨날 잔소리해. 그래도 내가 놀러가면 맛있는 간식도 주고, 자주 놀아줘서 좋아.”
은율이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여우신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마지막은 내가 농장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야. 농장으로 나를 데려와 주고, 치료해 주고, 매일 옆에 있어 줬어. 또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주고, 재미있는 친구들이랑,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만나게 해줬어. 너무너무 행복했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는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있을 곳은 농장 식구들이랑 아빠가 있는 곳이니까.”
“은율아…….”
“은율아…….”
“이제 안녕! 엄마, 아빠! 나중에 또 이야기해 줄게.”
두 은월족의 얼굴에 점점 감정이 사라져갔다. 은율이가 몸을 돌려 멀어지자, 두 사람은 인형처럼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
“아빠! 아빠!”
은율이는 여우신에게 멀어지면서 계속 ‘아빠’를 찾았다. 은율이가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뿌드드득!
나를 감싸는 벽에 조금씩 균열이 생겨났다.
“아빠! 어딨어!”
조금만…… 조금만 더!
은율이에게 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여우신의 벽들을 부숴나갔다. 결국, 나를 억압하던 벽들이 허물어지며 자유를 되찾았다.
“은율아!”
“아빠!”
은율이에게 다가가면서 자연스럽게 몸과 팔, 다리가 생겨났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눈앞에 사랑스러운 딸을 꽉 껴안아 줬다.
-와락!
“미안해, 은율아. 많이 기다렸지.”
“헤헤. 괜찮아. 아빠가 올 줄 알았어.”
“이제 걱정마. 아빠랑 같이 돌아가자.”
-그그그그긍!!
“누구 맘대로!”
화가 잔뜩 난 여우신의 외침에 의식의 세계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