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85화
수호신과 신녀(7)
“쓸데없이 일을 어렵게 만드는군!”
여우신의 얼굴이 빨개지며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시종일관 보여주었던 여유로운 미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은율이를 꼭 껴안으며 그를 노려봤다.
“포기해! 내 딸은 절대 넘겨줄 수 없으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 말대로 하면 이곳에서 헤어졌던 부모님과 영원히 함께 행복해질 수 있어. 지금이라도 당장 그 아이를 이리로 보내!”
여우신은 인형처럼 축 늘어진 은율이의 부모님들을 앞세우며 소리쳤다. 그의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당연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은율이가 직접 선택한 일이야. 치졸한 방법으로 내 딸의 마음을 흔들려고 하지마. 수호신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아?”
“네 이놈…….”
나의 도발적인 발언에 분노한 여우신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거기에 더해 품에 안겨 있던 은율이가 얼굴을 쏙 내밀고…….
-메∼롱!
귀엽게 혀를 내밀며 약 올리는 표정을 지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여우신이 소리를 빽! 질렀다.
“이 녀석들!! 좋게 좋게 끝내 주려고 했는데. 이제 다 필요 없어!”
여우신의 격해진 감정을 나타내듯, 주변에서 붉은 기운이 모락모락 뿜어져 나왔다. 그 기세가 강해질수록, 의식의 세계는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불완전한 부활이 될 테지만, 억지로라도 그 아이의 의식을 묶어둬야겠어. 순순히 내 뜻대로 하지 않을 걸 후회할 거야. 이제 그 아이는 이 의식의 세계에서 영원히 고통 받으면서,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될 테니까.”
“누구 맘대로! 해볼 테면 해보시지!”
나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외쳤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씩 불안함이 차오르고 있었다.
“흥!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
여우신 주변의 붉은 기운들이 조금씩 실체화되더니, 눈앞에는 익숙한 느낌의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저건……?”
-촤르르르륵!
-촤르르르륵!
여우신 주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길한 기운을 가득 머금은 붉은 사슬들이었다.
“사슬에 묶여 영원히 나의 노예가 되어라!”
붉은 사슬들은 여우신의 손짓에 따라 순식간에 나와 은율이를 노리고 쇄도했다.
마치 수십 개의 붉은 창이 우리를 향해 찔러오는 느낌이었다.
-쐐애애액!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나는 반사적으로 붉은 사슬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촤르르르륵!
-파바밧! 파밧!
내 손에서 소환된 붉은 사슬들이 여우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허공에서 수많은 사슬이 뱀처럼 얽혀들며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여우신은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평범한 인간인 네 녀석이 이 힘을……?!”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평범하게 생겨서 미안한데. 이래 뵈도 마계에서 이리저리 험한 일을 많이 겪었거든? 그냥 순순히 당해줄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야.”
“이익!”
여우신은 이를 꽉 깨물며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나도 품에 안고 있던 은율이를 등 뒤로 보내며, 좀 더 적극적으로 공격에 대응했다.
-파바밧!
-쾅! 콰쾅!
나와 여우신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사슬들이 강하게 부딪칠 때마다 굉음을 내며 의식의 세계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비등비등한 싸움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우신의 공세가 계속 이어지면서 내가 수세에 몰리게 됐다.
으윽…….
뒤틀렸어도 역시 신은 신인 건가?
힘겨워하는 내 얼굴을 보면서, 여우신은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았다.
“하하! 조금 전에 보여줬던 그 기세는 어디로 갔지? 겨우 이 정도로 내게 오만한 모습을 보였던 거냐?”
“읏…….”
얄미운 여우신에게 뭐라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공세를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입을 열 수 없었다.
나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꾹 참으며 공격들을 계속 막아나갔다.
점차 상황이 힘들어지면서. 내 머릿속에는 ‘은율이만이라도 어떻게 구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가득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뾰족한 방법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파바밧!
방어에 나섰던 나의 사슬이 빗나갔다.
“아…….”
집중력이 흐트러져 일어난 실수.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실수는 곧바로 큰 위험으로 되돌아왔다. 여우신은 나의 실수를 놓치지 않았다.
“이제 끝이다!”
여우신은 빈틈을 노리며 날카로운 안광을 번뜩였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담은 사슬들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그 찰나의 순간.
영상의 배속을 줄인 것처럼 모든 움직임이 느릿느릿해졌다. 금방이라도 내 가슴을 꿰뚫을 것 같던 공격도 아주 멀게 느껴졌다.
이미 공격을 막아내기엔 무리인 상황.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빠르게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는 것.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 뒤에 있는 은율이가 위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움직이려던 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몸을 지키려는 본능보다, 은율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는 가슴 쪽에 힘을 꽉 주며 고통에 대비했다.
-쐐애애애액!
“아빠!!”
등 뒤에서 은율이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퍼억, 퍼억!
가슴이 꿰뚫리는 잔인한 소리가 연이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너무나 생생한 그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으으…… 음, 으응?
분명 가슴이 꿰뚫리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
“당신은??”
코앞에서 벌어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상황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왜 저 녀석이?!”
여우신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후우…… 후읍…….”
가슴을 꿰뚫린 채 고통을 참아내는 은월족 남자.
여우신이 소환해냈던 은율이의 아빠가 나를 대신해 몸으로 사슬을 막아냈다.
“어째서……?”
“후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 상관없다. 네놈들 전부…….”
-와락!
“으헉?!”
당황한 여우신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느새 뒤로 숨어들었던 은월족 여인이 그를 양손으로 꽉 껴안았다. 아빠와 함께 소환됐던 은율이의 엄마였다.
“너까지…… 이거 놔라!”
여우신은 은월족 여인을 향해 거칠 게 손을 휘둘렀다. 방어할 수 없었던 그녀는 무방비상태로 공격에 노출됐다.
-퍽! 퍽!
무자비한 폭력에 은월족 여인의 얼굴은 금방 엉망이 됐다. 한쪽 눈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오르고, 코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그녀는 악착같이 여우신을 붙들고 늘어졌다.
“엄마!!”
은율이의 외침이 들렸는지 여인의 몸이 잠시 움찔하고 흔들렸다. 더 지켜볼 수 없었던 내가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의식 세계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잠시 모습을 드러낸 허상일 뿐입니다.
이 목소리는?
처음 듣는 남녀의 목소리.
하지만 나는 금방 그 목소리의 주인을 눈치챘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잠시 여우신의 힘을 약화할 겁니다. 그때가 마지막 기회예요!
가슴을 꿰뚫린 남자의 시선이 여우신과 여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직도 여우신을 붙들고 있었다.
“신녀의 피를 이었으면서 감히 수호신의 의지를 거스르려고 해?”
“당신의 음흉한 계획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고 마을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지요.”
“건방진! 이거 당장 놓지 못해?!”
-퍽! 퍼억!
“으윽!”
계속 이어지는 무자비한 폭력에도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또렷해지는 눈동자로 여우신을 노려봤다.
“이때를 대비해 딸의 몸에 제힘을 숨겨놓았지요. 보잘 것 없고 미약한 힘이지만,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면서요…… 이제 그때가 됐습니다.”
그녀의 몸에서 새하얀 기운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은 곧장 여우신을 휘감으며 스며들었다.
“으윽! 이, 이런…… 말도 안 돼…….”
여우신이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그와 연결돼 있던 붉은 사슬들이 퍽! 하고 전부 사라졌다.
가슴이 꿰뚫린 채 버티고 있던 은월족 남자가 스르륵 쓰러지며 무릎을 꿇었다.
“괜찮으세요?”
“아빠!”
-휙!
은월족 남자는 나와 은율이를 향해 더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잠시 은율이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
그는 아무런 말없이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고통에 일그러지지 않은 아주 편안한 미소였다.
-샤아아아…….
잠시 후, 은월족 남자의 몸은 연기로 변해 스르륵 흩어졌다.
뒤늦게 은율이가 뛰어나와 손을 뻗었지만, 이미 형체를 잃어버린 그를 붙잡을 순 없었다.
동시에 여우신을 붙잡고 있던 은월족 여인도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에게 다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이지만 여우신의 힘을 약화했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딸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딸을 부탁한다는 짧은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정말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두 사람의 목소리는 야속할 정도로 금방 끊겨버렸다.
하지만 아쉬움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조금의 힘조차 아껴서, 여우신을 막아내는 전부 쏟아부었다는 걸 알기에…….
“흐윽…… 흑…….”
어느새 은율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
슬픔에 잠긴 은율이를 뒤로 한 채 나는 비장한 표정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 지금은 은율이를 달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으윽…… 젠장…….”
여우신은 고통에 익숙해진 듯 다시 정신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런 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을 꿰뚫렸던 남자와 얼굴이 엉망이 될 정도로 참아낸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마음속 깊은 곳, 은은한 분노가 들끓는 것을 느끼며. 전력을 다해 붉은 사슬들을 불러냈다.
“이제 끝이야. 신도 뭣도 아닌 사기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