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88화
큰일 났다(1)
“꺄하하하!”
“이쪽이야! 이쪽!”
마당에서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틀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한동안 마을 분위기가 우중충했는데, 역시나 아이들은 회복 속도가 빠른 것 같았다.
“재밌게 잘 노네.”
창문을 통해 아이들을 지켜보던 카네프가 중얼거렸다. 나는 떠나기 위한 짐을 챙기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너무 금방 친해져 버려서 나중에 헤어지기 아쉽겠어요.”
“그건 그렇고. 저 녀석은 어떻게 할 건데?”
카네프가 가리킨 곳에는 새하얀 아기 여우가 아이들과 함께 뛰놀고 있었다.
정확히는 강제적으로 쫓기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저희가 데려가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끄응…… 괜찮겠어? 은율이한테 몹쓸 짓을 하려고 했던 놈이잖아.”
“그렇긴 한데. 지금은 힘을 잃어버려서 진짜 아기 여우가 된 거나 다름없거든요. 거기다 제가 완벽하게 제압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래도 좀 찝찝한데…….”
카네프의 찝찝하다는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리아네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심정을 나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 실체는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던 여우신.
그런데 이상하게 여우신은 은율이의 말을 잘 따랐다.
처음에는 몰래 음흉한 짓을 꾸미나 싶어 경계했는데, 지금까지는 전혀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우신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와중에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저 아니스예요.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네, 들어오세요.”
천천히 문이 열리며 아니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러 가지 일을 함께 겪으며 친밀감이 쌓인 덕분인지, 모두가 살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모습을 숨기고 있던 테르잔도 빼꼼 고개를 내밀어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물론 카네프는 힐끗 쳐다보는 게 전부였지만…….
자리에 앉은 아니스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벌써 떠나실 준비를 끝내신 건가요?”
“네. 어수선했던 분위기도 잘 수습된 것 같고. 저희도 더 늦어지기 전에 돌아가려고요.”
“너무 아쉽네요. 마을 일이 바빠서 은인들에게 제대로 대접도 못 했는데……. 어머니도 무척 아쉬워하실 거예요.”
그녀는 아쉽다고 말하면서 조금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눈치를 슬쩍슬쩍 보냈다.
나는 대답 대신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뒷수습은 다 끝난 건가요?”
“네. 심한 부상자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고. 부상이 가벼웠던 사람들 대부분은 일상으로 돌아갔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나뿐만 아니라 리아네와 테르잔도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은월족 부상자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모두 이 방 안에 있는 셈이니까.
우리의 반응을 본 아니스가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그 일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여러분들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어머니께서 직접 장로님들에게 못 박았거든요.”
“그 장로분들이 믿던가요?”
리아네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니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오히려 어머니가 장로님들을 아주 따끔하게 혼냈어요. 신녀 후계자 자리를 두고 불필요한 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수호신님이 분노하셔서 이런 소동이 일어났다고요.”
“하하하, 그것 참 잘됐네! 그 장로라는 녀석들 하는 짓거리가 맘에 안 들었었는데 말이야!”
창밖을 보고 있던 카네프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은월족 장로들이 덤터기를 쓴 건 억울한 일이겠지만 은율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도 내심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아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렸다.
“어머니라면 은율이의 할머님이신 미르나 님 맞죠? 몸이 편찮으신 건 괜찮아지셨나요?”
“네. 예전처럼 다시 정정해지셨어요.
“그때 잠깐 뵀을 때는 엄청 인자해 보이셨는데. 장로들을 혼내는 모습은 전혀 상상이 안 가네요.”
“원래 어머니가 좀 엄하신 편이에요. 그래서 마을의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님들도 어머니 앞에서는 엄청나게 긴장하거든요.”
소소한 화젯거리가 떨어져 갈 때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민감한 주제를 꺼냈다.
“아니스 씨. 그…… 여우신에 관한 건 역시……?”
‘여우신’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아니스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녀는 침착하게 표정을 가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신 대로예요. 어머니는 수호신님에 관한 일을 알리지 않기로 하셨어요.”
“으음…….”
은월족에게 수호신으로 섬겨졌던 여우신.
그 실체는 자신의 부활에 쓰일 제물을 찾기 위해, 은월족들을 결계 안에 가두고 세뇌한 사기꾼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우신이라는 존재가 잘못됐다 해서 은월족 전체의 믿음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그 믿음이 부정당한다면 이틀 전에 일어났던 소동보다 더 큰 혼란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미르나 님도 어쩔 수 없었겠지.
더는 그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스도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하셨어요. 더는 은월족이 결계 안에 숨어서 지낼 필요가 없어졌다면서요.”
“그건 확실히 좋은 소식이네요.”
“그리고 신녀의 역할이 끝나면 시현 님의 농장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곳에서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은율이와 편안히 지내고 싶다고 하시면서요.”
“하하! 언제든지 환영이죠. 은율이도 엄청 좋아할 거예요.”
아니스는 두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저도 환영해 주시는 거죠?”
“물론이죠.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두 분이 찾아오시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말씀만으로도 벌써 설레네요.”
우리는 언젠가 농장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함께 웃었다.
* * *
-부우우우우.
여느 때처럼 야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농장.
그 한가운데에 오랜만에 내가 커다란 털뭉치들에게 둘러싸였다.
“어, 어어! 너희들은 물러나. 이거 너희들 줄 거 아니야.”
-부우우. 부우우.
-부우우우!
물러나라는 말에도 야쿰들은 꾸역꾸역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녀석들이 노리고 있는 건, 옆으로 멘 가방에 가득 담긴 열매와 약초들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 한가운데에 접어들면서 요즘 야쿰들의 식욕이 대폭발하는 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못 이기는 척 조금씩 나눠줬겠지만, 오늘은 열매와 약초의 주인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큰뿔아! 큰뿔아! 이 녀석들 좀 말려봐.”
-부우우우…….
큰뿔이는 귀찮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내 도움 요청을 무시하지 않았다.
큰뿔이가 다가와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말 안 듣던 녀석들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역시 큰뿔이야. 듬직해!
나는 믿음직스럽다는 시선을 보내며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정작 큰뿔이는 심드렁한 울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휙 돌려 버렸지만…….
“자. 오래 기다렸지? 빨리 와서 먹어.”
-부우우우.
-부우우우.
내 쪽으로 다가오는 야쿰 세 마리.
녀석들은 내가 특별히 준비한 열매와 약초들을 얌전히 받아먹었다.
야쿰 세 마리가 특별 대접을 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야쿰 무리 내에서 아주 오랜만에 임신한 예비 엄마들이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야쿰 무리에서 임신 소식이 없었는데, 봄이 되자마자 동시에 셋이 소식을 알렸다.
은월족 마을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어찌나 기쁘던지…….
“그래그래. 예쁜이랑 초롱이가 그랬던 것처럼. 건강한 아기들을 낳을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으렴.”
-부우우우.
-부우우우.
세 마리의 야쿰이 차례로 다가와 머리를 비볐다. 신뢰를 표현하는 녀석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먹이를 전부 나눠준 다음.
간단히 청소를 끝내고 축사를 나섰다.
“축사에 계셨군요, 시현 님.”
“또 임신한 야쿰들 돌보신 거예요?”
안드라스와 엘프리드가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따로 맛있는 간식 좀 챙겨줬어.”
“일 다 끝났으면 같이 쉬러 가요, 시현 선배.”
“같이 가시죠. 저희도 막 쉬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그럴까요?”
나는 두 사람과 합류해 농장 건물로 향했다. 오후에 포근한 봄 날씨는 나른한 기분과 함께 출출함이 느껴지게 했다.
안드라스와 엘프리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지 간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건물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응?
뭐지 이 맛있는 냄새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휘감는 맛있는 냄새.
마침 출출함을 느끼고 있던 우리는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 흔적을 따라 우르르 움직였다.
선명해지는 냄새를 따라 도착한 부엌.
누군가 우리의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쑥 내밀었다.
“어? 마침 부르려고 했는데. 딱 오셨네요?”
-멈칫!
부엌에서 고개를 내미는 리아네를 보자마자,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굳어졌다.
부엌 + 요리 냄새 + 리아네 = 위험! 위험!
축적된 경험을 통해 위험을 알리는 신호가 머릿속에 울렸다.
우리들의 반응을 본 리아네게 볼을 부풀리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으으. 제가 요리한 거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아…… 그, 그런가요?”
“크흠, 큼!”
“휴우…….”
나는 머쓱한 표정, 안드라스는 민망한 헛기침, 엘프리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아네는 살짝 삐진 듯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어머, 영주님 오셨어요?”
“아! 나미라 아주머니.”
여우 수인 나미라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아주머니가 요리하신 거예요? 저녁 식사 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호호, 식사 준비를 한 건 아니고. 연습을 해보고 싶어서 조금씩 만들어봤어요. 마침 잘됐네요. 괜찮으시면 시식 좀 해주실래요?”
나미라의 요리 솜씨는 이미 농장 식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최근에는 나도 식사 준비에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다.
그런고로 우리가 시식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부엌 안쪽에는 이미 완성된 요리들이 접시에 잘 담겨 있었다. 우리는 앞 접시를 하나씩 들고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을 하나씩 맛봤다.
“오! 이거 먹어봐요. 진짜 맛있어요.”
“이건 처음 보는 요리군요. 혹시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음식을 맛본 엘프리드와 안드라스의 입에서 연신 감탄이 쏟아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맛있네요.”
“호호!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음식들을 많이 만드신 거예요? 이 정도면 파티를 열어도 될 것 같은데요?”
“조금 있으면 작은 아가씨 생일이잖아요? 그래서 미리 연습해 볼 겸 조금씩 만들어봤어요.”
“아아. 그랬군요. 작은 아가씨 생일…… 에?”
순간 나미라를 제외한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빠르게 시선을 돌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제대로 들은 게 틀림없었다.
뒤통수를 한 대 제대로 맞은 느낌.
왜냐하면, 그녀가 말하는 작은 아가씨는…….
“어머, 설마 모르고 계셨나요? 조금 있으면 은율 아가씨 생일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