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90화
큰일 났다(3)
“……일이 이렇게 된 관계로. 저는 잠시 휴가를 다녀오겠습니다.”
“우리 없는 동안 일 열심히 하고 있어.”
나와 카네프는 농장 식구들에게 휴가 소식을 갑작스럽게 알렸다. 처음에는 모두 놀라는 반응이었다.
“카, 카네프 님도 함께 말입니까?”
“응. 이거 사용했거든.”
카네프는 안드라스에게 ‘휴가 동행권’을 팔랑팔랑 내보였다.
“휴가 동행권?”
“저게 뭐죠?”
“말 그대로 시현 선배를 따라 저쪽 세계로 갈 수 있는 동행권이야. 예전에 저걸 상품으로 걸고 대결을 펼친 적이 있거든. 내가 마지막 카드 뽑기에서 지지만 않았어도…….”
엘프리드는 릴리아와 우르키에게 ‘휴가 동행권’에 대해 설명하며, 지난날의 패배를 아쉬워했다. 마지막 승부에서 이겼다면 ‘휴가 동행권’은 엘프리드의 것이 됐을 테니까.
리아네와 안드라스가 카네프 쪽을 힐긋 바라보며 불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현 님, 괜찮으시겠어요? 카네프 님이랑 단둘이…….”
“선택을 재고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걱정해주셔서 감사한데요.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답니다.”
“그래. 내가 뭘 얘를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조용히 은율이 선물만 찾아서 돌아올 거야.”
“…….”
“…….”
“진짜야!”
카네프의 변명에도 두 사람에게는 전혀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폭탄을 건네주면서 ‘절대 안 터질 거니까 괜찮아.’라고 안심시키는 꼴이랄까?
-타다닷!
급하고 앙증맞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은율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율이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곧장 나와 카네프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아빠, 어디 가?”
“응. 사장님이랑 잠시 저쪽 세계에 다녀오려고.”
“정말? 나도 같이 갈래!”
은율이의 여우귀가 기대감으로 쫑긋 세워졌다. 반짝반짝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뻔했다. 억지로 목에 힘을 꽉 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미안해. 이번에는 안될 것 같아.”
“우우…… 왜?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으…… 응. 사장님이랑 같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아빠가 다녀오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랑 놀고 있어.”
반짝반짝했던 모습이 금방 축 늘어졌다.
“히잉…… 전부 다 바쁘다고 나랑 잘 안 놀아준단 말이야.”
-움찔!
-움찔!
은율이의 칭얼거림에 모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급하게 선물을 준비하느라고 잠시 은율이를 소홀히 한 탓이었다.
“아, 아니야. 오늘은 언니가 같이 놀아줄게.”
“오랜만에 그리, 피니 데리고 같이 산책갈까?”
농장 식구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은율이를 달래줬다. 덕분에 어두웠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카네프는 손이 은율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음에는 꼭 데리고 나갈게.”
“……. 약속?”
“그래. 약속.”
“알았어. 농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헤헷.”
겨우 은율이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오자, 지켜보던 사람들도 따라서 미소지었다.
* * *
발레리안의 사무실.
“여기가 ‘지구’라는 거지?”
처음 사무실에 도착한 카네프는 오랫동안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평범하게 신기해하는 그의 모습이 내게는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나쁘지 않은 느낌인 카네프와는 다르게, 사무실의 주인인 발레리안은 노골적으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무실 가운데 놓인 의자에 카네프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리안. 너 이쪽 세계의 돈 가지고 있지?”
“네. 어느 정도는.”
“은율이 선물을 사야 해서 돈 좀 빌려줘. 아! 아니다. 얼마나 필요할지 모르니까 그냥 있는 대로 다 꺼내놔.”
“…….”
이건 뭐, 칼만 안 들었지…….
예전에 ‘검은수리’라는 단체가 용병단이 아니라 도적단이었나?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발레리안은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에 손을 올렸다.
“하아……. 정말로 카네프 님을 모시고 나오실 줄이야.”
“설마 장난인 줄 아셨나요?”
“장난이길 원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네요.”
한숨을 푹푹 쉬는 그에게 나는 낙관적인 반응을 보였다.
“은율이 선물만 잠시 고르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시현 씨가 예전에 카네프 님, 그러니까 단장님을 안 겪어봐서 잘 모르시는 겁니다.”
“…….?”
“카네프 님은 의외로 호기심이 많습니다.”
“호기심이 많다?”
“예. 마계에서는 이제 큰 흥밋거리를 찾지 못해 빈둥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시지만, 검은수리를 이끌던 시절만 해도 정반대였습니다. 어떤 일에 관심이 생기면 굉장히 적극적으로 움직이셨습니다.”
설명을 듣던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젊었을 때는 다 그러지 않나요?”
“그게 정도가 좀 심했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얼마나 위험한 곳이든 앞뒤 안 가리고 들이박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아…….”
“그때도 카네프 님은 무지막지하게 강하신 분이라 상관없었지만, 뒤따르던 검은수리 단원들은 지옥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발레리안의 말에 그때의 절망감이 짙게 깔려있었다. 직접 그 지옥을 경험했던 사람의 말이라 그런지 더 실감 나게 느껴졌다.
“뭘 그렇게 속닥거려?”
“아, 아뇨.”
“크흠.”
“빨리 움직이자. 안드라스한테 들었는데. 도시가 워낙 크고 넓어서 둘러볼 곳이 많다며?”
농장에서 출발할 때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나왔는데. 막상 혼자 카네프를 데리고 나서려니 불안함이 슬금슬금 차올랐다.
리안 씨, 죄송해요!
“저기. 리안 씨도 바쁘지 않으시면 도와주실래요?”
“저, 저요?”
발레리안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시현 씨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저는 일이 좀 바빠서…….”
“굳이 저 녀석을 데려갈 필요 있어?”
“리안 씨가 좋은 선물에 대해서 저보다 더 많이 알고 있거든요. 저도 몇 번 추천받은 적이 있고요.”
“흐음…… 확실히 마계에서도 이런 일은 저 녀석이 잘했었지.”
“…….”
“좋아. 너도 따라와.”
카네프의 결정이 떨어진 순간, 발레리안의 얼굴도 와락 구겨졌다. 그리고 이내 되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다.
발레리안은 원망스러움을 잔뜩 담긴 시선을 내게 보냈다. 나는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애써 그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우리의 휴가 일정에 발레리안도 함께하게 됐다.
* * *
사무실에서 나온 우리는 차를 타고 시내 쪽으로 이동했다.
차를 처음 타본 카네프가 직접 운전하겠다고 억지를 부린 것만 빼면, 아주 무난한 출발이었다.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여러 가지 물건을 빠르게 구경하기에는 백화점만 한 곳이 없었다.
“오오! 여기가 리아네와 안드라스가 말했던 그곳이야?”
“예, 맞아요. 두 사람도 이쪽 세계에 왔을 때 데려왔었거든요.”
“좋아. 얼른 은율이의 선물을 찾아보자.”
카네프는 약간 들뜬 표정으로 백화점 입구로 향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그의 활기 넘치는 모습에 나도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수근수근.
-수근수근.
“어머, 저기 좀 봐봐.”
“외국인인가? 엄청 잘 생겼다.”
“뒤에 오는 사람도 멋있는데?”
카네프와 발레리안에게 백화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 쏠렸다. 마족의 뿔을 숨기고, 평범한 복장으로 갈아있긴 했어도. 본래 가지고 있던 분위기까지 숨길 순 없었다.
특히 카네프가 가진 독특한 아우라는 금방 사람들의 이목을 이끌었다. 정작 본인은 주변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은율이 선물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흐음. 이건 이쪽 세계에서 만든 장신구인가 보네.”
“은율이한테 선물 주기에는 아직 무리일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 정도는 마계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어 보이네. 저쪽으로 가보자.”
카네프는 진열된 물건들을 꽤 진지하게 둘러봤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선물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다.
은율이를 이렇게까지 아껴주다니.
조금은 감동…….
“헉? 저건?!”
-파바밧!!
뭔가를 발견한 카네프가 갑자기 어디론가 뛰쳐나갔다. 얼마나 움직임이 빠르던지 순간 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장님!”
“카네프 님!”
나와 발레리안은 다급하게 그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 사라기지 전에 카네프의 움직임이 먼저 멈췄다.
“헉, 헉! 사장님, 그렇게 갑자기 뛰어 나가시면…….”
“시현, 이거 맞지?”
“예? 뭐가……. 아!”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카네프.
그의 손가락 끝에는 다양한 종류의 술이 가득가득 진열된 주류코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카네프는 천국에 온 듯한 표정으로 술들을 하나씩 쓰다듬었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술이 있다니. 시현이 내게 가져다준 것 이상으로 훨씬 많잖아!”
“카네프 님이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내요.”
“저도요. 일단 즐기시게 놔두죠?”
나와 발레리안은 카네프가 이 기분을 만끽할 수 있도록 잠시 지켜봤다. 한동안 주류코너 이곳저곳을 살피던 카네프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시현, 여기 있는 술들 전부 살 수 있는 거지?”
“네. 그런데 은율이 선물 찾으러 안 가세요?”
“윽…….”
뒤늦게 본래의 목적을 떠올린 카네프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래도 은율이의 선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부들부들 떨면서 주류코너로부터 떨어져나왔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술은 나중에 따로 사드릴게요. 어차피 지금 가지고 가봤자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러우니까요.”
“정말?”
“네. 약속할게요.”
“하하하! 역시 너랑 나오길 잘했어.”
카네프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은율이의 선물을 열심히 준비하는 그에게 나도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주류코너에서 벗어난 우리는 다시 백화점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많은 상품이 우리의 시선을 끌었지만, 카네프의 마음에 드는 선물은 찾지 못했다.
생각보다 선물 찾는 게 어렵네.
길어지는 쇼핑으로 얼굴에 약간 지친 기색이 생겨날 때쯤.
“…….!”
갑자기 카네프가 눈을 번쩍이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뒤이어 사람들 손에 있던 스마트폰에서 경보음이 터져 나왔다. 내 주머니 속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