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92화
큰일 났다(5)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서예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현이라 불린 여자가 비명이 들려오는 곳으로 먼저 달려갔다. 서예린도 곧바로 그녀를 뒤따르려다가 멈칫, 멈춰 서서 우리 쪽을 바라봤다.
“일단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장비도 제대로 안 갖추고 더 들어오면 위험하니까.”
“예린아, 예린아!”
서예린은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먼저 간 동료를 재빨리 뒤따라갔다. 남겨진 우리는 머쓱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쩝. 그냥 가버렸네요.”
“아무래도 안쪽에서 상황이 벌어진 듯 보이네요.”
“설마…… 아니겠죠?”
“……아마 맞지 않을까요?”
“…….”
“…….”
뭔가 생략된 문장이 오간 다음 곧바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가보죠?”
“알겠습니다.”
나와 발레리안은 불안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균열 안쪽으로 나아갈수록 동굴 통로의 크기가 조금씩 넓어지더니, 통로를 빠져나온 순간 사방이 확 트이면서 아주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에서 괴수 무리와 가디언즈 길드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양측 모두 움직임이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 이게 뭐야!”
“당황하지 말고 진형을 유지해!”
-끼에에에엑!
두 진영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 빠르게 쇄도하는 사슬들과 한바탕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나와 발레리안은 사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챘다.
골치 아픈 상황에 손으로 이마를 쥐며 탄식을 터뜨렸다.
“아니, 괴수를 공격하는 건 그렇다 쳐도. 사장님은 왜 길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는 거죠?”
“끄응…… 저도 잘 모르겠네요.”
발레리안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도 눈앞에 펼쳐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괴수를 공격하는 것에 비해 길드원에게 향하는 공격이 약하기는 했다. 아마 제압하는 선에서 카네프가 강도를 조절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카네프의 행패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나서며 카네프가 있을 법한 방향으로 소리쳤다.
“그만두세요, 사장님! 진짜 이러실 거예요?”
외침에도 사슬의 움직임에는 변화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내 목소리가 조금 묻히기는 했어도, 절대 카네프가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경고의 의미를 담아 다시 외쳤다.
“계속 이러시면…… 아까 약속했던 거 무효예요!”
그 순간.
활발하던 사슬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길드원들을 공격하던 사슬들이 슬금슬금 물러서더니, 괴수를 공격하던 쪽에 합류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부터는 일방적인 학살이 진행됐다.
-파바바밧!
제대로 마음먹은 카네프의 공격을 괴수 무리는 전혀 버텨내지 못했다. 너무 일방적이라 동정심이 약간 생겨날 정도였다.
반대로 사슬의 공격에서 해방된 길드원들은 오히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마 자신들이 애먹었던 사슬의 공격이 100% 진심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인 듯했다.
-끼에에에에엑!
끝까지 버텼던 마지막 괴수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혼란스러웠던 균열 내부에는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툭, 툭.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나와 발레리안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나타난 카네프가 손짓하고 있었다.
“구경 다했으니까 가자.”
마치 화장실이라도 잠시 다녀온 듯한 평온함. 그 뻔뻔한 모습에 나와 발레리안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뭐 해? 얼른 은율이 선물 찾아보러 가야지.”
“어이쿠. 그건 또 안 까먹고 계셨네요?”
“당연하지.”
“그걸 아시는 분이 여기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신 거예요? 도대체 길드원들은 왜 갑자기 공격하신 거예요?”
“길드원? 아! 저기 멍하게 서 있는 녀석들? 그냥 여기 수준이 어떤가 궁금해서 한번 공격해 봤지.”
“그렇다고 다짜고짜 공격하면 어떻게 해요?”
“살살했어. 살살!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 놓은 것 같지는 않은데. 전체적인 실력은 좀 아쉽더라.”
실력이 아쉽다라…….
저래 보여도 이 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길드 출신인데. 애초에 카네프의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누구라도 아쉬운 실력일 수밖에 없었다.
“아아∼! 조금 더 강한 괴수가 나오는 균열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뭔가 아쉽네.”
“진짜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사장님이 만족할 정도로 강력한 균열이면 국가 재난급이라고요.”
우리는 아쉬워하는 카네프를 이끌고 균열 입구로 향했다. 황당한 일을 겪은 길드원들에게는 나중에 따로 상황을 설명하기로 했다.
“사장님. 이제는 진짜 마음대로 행동하시면 안 돼요. 주류코너에 다시 데려다준다는 약속 진짜 엎을 거예요.”
“알았어. 이제 진짜 조용히 따라다니기만 할게.”
“리안 씨도 사장님한테 뭐라고 좀 하세요.”
“하하…….”
발레리안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그냥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쉴 새 없이 잔소리를 쏟아내다 보니 금방 균열 입구에 도착했다. 나는 입구를 나서기 전에 카네프에게 신신당부했다.
“아셨죠? 입구를 나서자마자 우리를 데리고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알았어. 아까 백화점인가 뭔가 하는 큰 건물로 되돌아가면 되는 거지?”
마지막으로 계획을 확인하고 함께 균열 입구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우리의 계획은 눈앞에 나타난 곤란한 상황으로 실현될 수 없었다.
“페이슈타의 감시관 ‘키르웬’입니다. 차원의 규율을 어긴 죄로 당신들을 체포하겠습니다.”
* * *
우리는 균열에서 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천족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리고 감시관 키르웬이라는 천족이 우리를 체포하겠다고 나섰다.
당연히 카네프는 무슨 헛소리냐며 반발하려 했지만, 발레리안이 한발 앞서 그를 진정시켰다.
“일단 진정하세요. 제가 나서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발레리안는 우리를 안심시킨 뒤, 따로 감시관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와 카네프 모두 그의 경력과 실력을 알기에 일단은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한동안 발레리안과 키르웬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와 카네프는 천족에 둘러싸인 채 멀찍이 두 사람을 지켜봤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발레리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지고 있었다. 그는 답답하다는 제스쳐를 취해 보인 뒤,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저놈들이 뭐래?”
“으음…… 아무래도 카네프 님이 균열에 난입한 걸 문제 삼은 모양이에요.”
“내가 뭘? 나는 오히려 도와준 거라고.”
“천족이든, 마족이든. 이곳에서 발생하는 균열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게 저들의 원칙이니까요.”
“쳇! 재수 없는 놈들이 만든 원칙따위…….”
카네프가 불평을 쏟아내는 사이.
또 다른 천족이 키르웬에게 다가가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키르웬의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곧바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균열에 진입했던 인원들이 복귀하면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균열 내부에서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습격을 당했었다고 합니다.”
“하아…….”
“하아…….”
“크흠, 큼.”
나와 발레리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고, 카네프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혹시 습격한 정체불명의 존재가 당신들입니까?”
“그건 습격이 아니라. 그…… 뭐랄까? 마계 특유의 반가움을 표현하는 인사 방식이었어. 안 그래?”
그런 인사 방식이 있을 리가…….
내가 마계에서 지내는 동안 그런 해괴한 문화가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발레리안도 이미 틀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 당연하게도 카네프의 변명은 키르웬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 엄해진 표정으로 우리를 다그쳤다.
“균열에 무단으로 난입한 것도 모자라, 투입 인원에 습격까지…… 감시관으로서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은 좌시할 수 없습니다.”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카네프는 오히려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잘됐네. 저 균열만으로는 뭔가 아쉽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거든.”
-우우우우웅!
카네프가 기세를 끌어올리자 주변의 공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키르웬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천족들이 급하게 거리를 벌리며 각자의 무기에 손을 올렸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천족이랑 직접 싸워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너희들 말고 집행관 놈들 없어? 그 녀석들이 싸우는 맛이 있는데 말이야.”
“당장 적대적인 행동을 멈추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희도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족의 엄중한 경고에도 카네프는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최악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나와 발레리안이 카네프의 양쪽으로 달려들었다.
“으아, 사장님! 왜 이렇게 일을 키우세요!”
“일단 진정하시고. 제발 말로 해결하세요. 말로!”
“이거 놔! 저 자식들이 먼저 시비를 걸잖아.”
“저희가 잘못한 건 사실이잖아요.”
“나는 잘못한 거 없어! 마계 특유의 인사 방식이었다니까?”
그놈의 마계식 인사!
마계에 착하고 예의 바른 마족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가 카네프를 뜯어말리는 사이.
또 다른 천족이 키르웬에게 달려왔다. 아까와는 달리 굉장히 다급한 표정이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키르웬 님!”
“무슨 일입니까? 급한 일이 아니라면 지금은 죄인들의 체포가 우선…….”
“균열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다급한 천족의 목소리는 우리에게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자연스럽게 이곳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균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진짜잖아?”
천족의 말대로 이미 진즉에 소멸했어야 할 균열이 그대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것도 모자라 주변의 공간을 붕괴시키며 점점 덩치가 커지는 중이었다.
“균열 봉인 절차는?”
“시도해 봤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습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여기 있는 인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모두 봉인 작업 지원에 나서십시오!”
“예!”
“예!”
대치중이던 천족 모두가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곧장 균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마지막까지 남아 우리를 노려보던 키르웬도 다른 천족들을 따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와 발레리안은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며 안도했고, 카네프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한숨 돌린 나는 천족들이 날아간 균열을 바라봤다.
“그건 그렇고. 균열은 왜 저러죠? 내부 정리가 끝났으면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할 텐데.”
“흐음. 확실히 이상하네요. 저렇게 천족이 직접 나섰는데도 균열을 억제할 수 없다니.”
“쳇! 질서니 뭐니 잘난 척 떠들더니. 꼴좋네.”
나는 카네프의 비아냥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균열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당장은 균열 덕분에 곤란한 상황을 모면했지만, 저런 균열의 이상 현상은 여러모로 우려스러웠다.
그때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도와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