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94화
생일파티(1)
드디어 그날이 찾아왔다.
오늘은 바로 은율이의 생일.
정작 주인공인 은율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농장 식구들은 오늘을 위해 아주 열심히 준비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 식사 시간.
식당에 모인 모두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은율이를 살피기 바빴다. 심지어 카네프도 힐긋힐긋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이 너무 노골적이라 혹시 은율이가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다행히 은율이는 아침 식사로 나온 샌드위치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은율아, 샌드위치 더 먹을래?”
“응. 더 먹을래.”
나는 내 앞에 있던 샌드위치를 반으로 잘라 은율이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은율이는 방긋 웃으며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갔다.
오늘 기분도 좋아 보이고, 컨디션도 괜찮아 보이네.
귀엽게 입을 오물거리는 여우 소녀를 바라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크흠, 흠!”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 평소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기침 소리에 식당 전체가 조용해졌다.
“시현 님. 오전에 바쁘시지 않으면 함께 엘든 마을에 다녀오지 않으시겠습니까?”
안드라스가 내게 엔들 마을로 동행할 것을 권유해왔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계획한 대로 대답했다.
“그럴까요? 안 그래도 한번 가볼 생각이었는데 잘됐네요.”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준비 단계.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나는 막 식사를 끝낸 은율이의 입가를 닦아주며 넌지시 물었다.
“은율아.”
“으응?”
“안드라스 씨랑 아빠랑 같이 엘든 마을에 갈 건데. 은율이도 같이 갈래?”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은율이가 외출한 사이, 농장에서 파티 준비를 끝내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에 성공하기 위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은율이의 외출을 유도해야 했다.
평소에 나와 함께 외출하는 걸 좋아해서 쉽게 승낙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은율이는 대답을 망설였다.
“우웅…….”
“왜? 아빠랑 외출하는 거 싫어?”
“그게 아니라. 오늘 규리랑 요정 친구들이랑 같이 놀기로 했거든. 약속은 어기면 안 돼.”
이런!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선약이 생긴 모양이었다.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벌써 삐거덕거리자, 지켜보고 있던 식구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는 살짝 다급해진 목소리로 설득했다.
“요정들이랑은 다음에 놀면 안 될까? 오늘은 아빠랑 같이 외출하자.”
“으으. 규리가 실망할 텐데…….”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리아네가 불쑥 나섰다.
“언니가 대신 요정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줄게. 요정들이 좋아하는 사탕도 잔뜩 나눠줄 테니까. 시현 님이랑 같이 외출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녀의 설득이 통했는지 은율이는 배시시 웃으며 내 팔을 잡았다.
“헤헷, 그럼 아빠랑 같이 외출할래.”
은율이의 외출이 결정되고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식구들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나는 은율이의 손을 잡고 엘든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안드라스는 반걸음 정도 뒤에서 우리를 천천히 뒤따랐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엘든 마을에 방문한 것처럼 꾸몄지만, 그저 은율이를 농장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그다지 중요한 일이 없으니. 우리는 느긋한 태도로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마을을 둘러보는데, 그사이에 못 보던 건물이 많이 생겨나 있었다.
처음에 왔을 때는 정말 조그마했던 시골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공동체가 됐다.
물론 엘든 마을 주민들의 노력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겠지만, 나도 이바지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렇게 된 김에.
정말로 마을 구경이나 해볼까?
나는 은율이의 손을 잡고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본 마을 주민들은 모두 한결같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나도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어이, 영주님!”
‘영주님’이라는 호칭과 어울리지 않게 건들건들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금발 머리의 로커스가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그의 옆에는 덩치 큰 크록도 함께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영주님.”
“안녕하세요. 로커스 씨, 크록 씨.”
크록은 짧은 수화를 통해 인사를 받았다.
“두 분 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나 이 녀석이나 너무 잘 지내고 있어서 탈이지.”
안드라스와 장난스럽게 인사를 주고받던 로커스는 아래쪽에 은율이를 발견하고 과장된 제스쳐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이쿠! 귀여운 아가씨도 함께 오셨네. 잘 지내고 있었어요, 은율 아가씨?”
“안녕하세요오…….”
쑥스러움이 담긴 인사에도 로커스는 활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한쪽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은율 아가씨. 저기 보이는 나무에 귀여운 아기 새들이 있는 거 알아?”
“아기 새?”
소극적이던 은율이가 눈동자를 빛내며 관심을 드러냈다.
“응.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애들인데. 엄청 귀여워. 한 번 구경해 볼래?”
“응! 구경해 볼래.”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은율이가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허락의 의미로 살짝 미소를 지어줬다.
“좋아. 크록! 둥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 은율 아가씨가 아기 새들을 구경할 수 있도록 손으로 들어 올려드려.”
로커스가 크록의 옆구리를 찌르며 지시했다. 크록은 천천히 다가와 은율이에게 수화를 해보였다. 아마도 들어 올려도 되는지 물어보는 것 같았다.
은율이는 대답 대신 두 팔을 활짝 들어 올리며 ‘안아줘요!’ 자세를 취했다. 크록은 굉장히 감동한 표정을 짓더니,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은율이를 들어 올렸다.
워낙 크록의 덩치가 크다 보니 그가 팔을 쭉 뻗은 것만으로도 은율이의 눈높이가 나무 윗부분까지 닿을 수 있었다.
“와아! 아빠, 여기 진짜 작은 아기 새들이야.”
나무 위쪽 새 둥지에서 아기 새를 발견한 은율이가 크게 외쳤다. 귀엽게 파닥거리는 팔다리에서 흥분한 감정이 전해졌다.
“귀여워도 직접 만지면 안 돼. 나중에 아기 새들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으응! 알았어.”
은율이가 아기 새 구경에 온통 신경이 쏠린 사이. 로커스가 스윽 내 곁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봐. 오늘 은율 아가씨 생일이지?”
“헉! 어떻게 아셨어요?”
생일에 대해서는 농장 식구들 말고는 굳이 알리지 않았다. 괜히 여러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로커스가 먼저 생일에 대해 언급하니,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로커스는 입술에 검지를 들어 올리며 나를 진정시켰다.
“쉬, 쉬잇! 몰래 생일파티 준비하는 거 아니었어?”
“아아…… 네.”
“이거 받아.”
그는 잘 포장된 상자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나랑 크록이 돈을 모아서 산 선물이야. 나중에 파티할 때 전해줘.”
“서, 선물도 준비하셨어요?”
내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져 나갔다.
생일에 대해서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생일 선물까지 준비해 올 줄이야…….
내 표정을 살피던 로커스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 순전히 우리가 준비하고 싶어서 준비한 것뿐이니까.”
“그럼 나중에 파티에라도…….”
“됐어. 우리는 그런 거 낯부끄러워서 싫어. 뭐…… 술집에서 하는 파티라면 당연히 참가하겠지만 말이야. 하핫!”
그는 생일파티 참석을 거절하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농장 식구들 중에 누가 알려준 거예요?”
내 질문에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내가 알려줬어.”
“헉?!”
“헉?!”
그림자 속에서 테르잔이 불쑥 튀어나왔다. 예고 없는 그녀의 등장에 나, 안드라스, 로커스 모두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하아…… 테르잔 님. 제발 나오실 때 인기척 좀!”
“미안. 마음이 급해서 잠시 까먹었어.”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니, 그보다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몸에 흙먼지가 많이 묻으신 것 같은데.”
평소에는 꽤 깔끔한 차림으로 다니는 테르잔인데 지금은 몸 곳곳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거기에 머리카락에는 나뭇잎도 붙어 있고, 옷 군데군데에 찢어진 흔적도 보였다.
“응.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
“……?”
“이거 받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흰색 천에 싸인 무언가를 내게 건넸다. 두 손에 딱 들어오는 크기에 물건이었다.
“이건……?”
“선물.”
“예?”
“생일 선물이야.”
그제야 나는 테르잔도 로커스와 마찬가지로 선물을 준비했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이것 때문에 그렇게 몸이 더러워지신 거예요?”
“급하게 다녀온다고 조금 더러워진 거야. 씻으면 금방 깨끗해져.”
테르잔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그녀의 굉장한 실력을 생각해 봤을 때…….
이렇게까지 몸이 더러워질 정도면 분명 쉽게 구해올 수 없는 선물을 준비한 게 틀림없었다.
로커스 씨와 크록 씨에 이어. 테르잔 님까지 은율이의 선물을 준비해 주다니…….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은 건데, 오히려 너무 미안한 상황이 돼버린 듯했다.
“난 가볼게.”
“잠깐만요, 테르잔 님!”
“응?”
“나중에 테르잔 님도 생일파티에 와주세요.”
그녀는 살짝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자야 할 것 같아.”
“괜찮아요. 조금 늦어도 되니까 꼭 와주세요. 재미있을 거예요.”
“그렇게 하시죠. 맛있는 음식도 많이 있을 겁니다.”
“나중에라도 가봐.”
나뿐만 아니라 안드라스와 로커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테르잔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알았어. 조금만 쉬었다가 갈게.”
그리고 그녀는 손을 흔들며 스르륵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아빠!”
“어…… 어어!”
아기새 구경을 끝낸 은율이가 크록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내 손에 아직 선물이 들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둥지둥 숨길 곳을 찾았다.
“시현 님. 얼른 저에게 선물을!”
“여, 여기요!”
나는 재빨리 선물들을 안드라스에게 넘겼다. 그는 넘겨받은 선물을 널찍한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빠, 뭐 해?”
“으,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기새 구경은 잘했어?”
“응! 쪼끄마한 애들이 엄청 귀여웠어. 솜털이 온몸을 뒤덮고 있어서 솜사탕 같아.”
은율이는 나무 위에 있던 귀여운 아기 새에 대해 조잘조잘 떠들었다. 생일 선물을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