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399화
천계의 부름(2)
“천계로요?”
전혀 예상치 못한 부탁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조금 있으면 차원의 불균형 문제로 에크르아스 의회가 소집될걸세. 그때 의회의 늙은이들을 설득하려면 자네의 힘이 꼭 필요하네.”
“으음…… 에크르아스 의회라는 곳은 천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곳인 거 같은데. 제가 그곳에서 간다고 아크 심판관님께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지!”
아크 심판관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이후로 계속 자네를 유심히 지켜봐 왔다네. 여기 있는 두 사람에게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 아마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걸세.”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려 아슈미르와 우르키를 바라봤다. 나도 따라서 두 사람이 있는 쪽을 시선을 옮겼다.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제가 시현 님의 능력을 모두 파악한 건 아니지만, 시현 님이라면 분명 아크 심판관님께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슈미르가 침착하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고, 뒤이어 우르키도 떨리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확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이 상황을 쭉 지켜보던 카네프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저 둘을 왜 농장으로 보냈나 싶었는데 결국에는 이럴 속셈이었네. 시현을 위하는 척해놓고, 너희들에게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판단한 거지? 마치 첩자처럼 말이야.”
“사장님! 첩자라니요! 두 분에게 실례잖아요.”
카네프에 조금 과격한 언행에도 아크 심판관은 허허롭게 웃어넘겼다. 더 나아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카네프의 말을 되받아쳤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시현을 살펴봤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네. 하지만 첩자라는 표현은 조금 부적절해 보이는구먼. 순수하게 돕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거든.”
“그걸 어떻게 믿어?”
“허허, 내가 알기로는 저기 두 사람을 꽤 부려먹었다고 들었네. 시현을 약간 살펴보는 대가로 그 정도의 노동력을 제공했다면 오히려 공평한 것 아니겠는가?”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카네프도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아크 심판관의 말대로 아슈미르와 우르키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특히 천족 특유의 융통성 없는 성격 때문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고 완벽하게 일처리를 해줬다.
옆에서 나를 살펴보는 대가로 그 정도의 노동력을 제공해 준 거라면, 솔직히 우리 처지에서 완전히 남는 장사였다. 두 사람 덕분에 농장 일이 훨씬 수월해졌으니까.
“뭐, 좋아. 그건 그렇다 쳐도. 시현을 천계에 데려간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 깐깐한 놈들이 이계에서 온 평범한 인간에게 희망을 걸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최대한 빨리 시현을 에크르아스 의회로 데려가 인정을 받아야 해.”
“괜히 억지로 일을 진행하려다가 시현만 곤란해지는 거 아니야?”
“시현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을걸세. 심판관으로서의 명예와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아크 심판관의 두 눈동자가 굳은 의지로 빛났다.
카네프도 더이상 그의 말에 딴지를 걸지 않고 앞으로 쏠려 있던 상체를 뒤로하며 내게 팔랑 손짓을 해보였다.
아마도 이제부터는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것 같았다.
나는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전에 차원의 불균형에 관해 설명을 들었을 때도 크게 와닿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근 있었던 일련의 사태들을 겪으면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꼈다.
물론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아직 없었다.
정말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만약 나에게 그런 힘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나는 방 안을 짓누르던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꼭 나서야만 하는 일이라면 해볼게요.”
“허허! 드디어 결심이 섰나 보군.”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크 심판관님께서 많이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아크 심판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렸다. 지켜보고 있던 아슈미르와 우르키도 한결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에크르…… 의회?”
“에크르아스 의회라네.”
“네. 그 의회에 제가 참석해야 하는 거죠? 그럼 언제까지 천계로 가면 되나요?”
“의회가 열리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지만, 그 전에 천계에 도착해 신원확인과 여러 가지 절차를 끝내려면…….”
혼자 중얼거리면서 뭔가를 고민하던 아크 심판관은 이윽고 자신의 무릎을 탁 내려쳤다.
“지금 출발하면 되겠어.”
“예??”
* * *
평화로웠던 농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유는 다름 아닌 갑작스럽게 결정된 나의 천계 방문 때문이었다.
“양말이랑 속옷은 챙기셨어요?”
“챙겼어요.”
“두꺼운 옷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날씨가 추울 수도 있잖아요.”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금방 두꺼운 옷을 구해다…….”
걱정이 가득한 리아네의 모습을 보며 아크 심판관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걱정하지 말게. 천계도 이제 포근한 봄 날씨거든. 그리고 부족한 게 있으면 우리가 따로 챙겨주겠네. 메이드 양이 시현을 너무 애지중지하는구먼.”
리아네는 자신이 너무 허둥지둥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나는 부끄러워하는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주었다.
“짐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네…… 시현 님.”
나는 급하게 준비한 짐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물 입구에는 이미 농장 식구들이 전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빠.”
“어이쿠! 은율아.”
은율이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와 안겼다.
나는 미리 팔을 뻗어 충격을 최소화하며, 능숙하게 귀여운 여우소녀를 안아 들었다.
내가 천계로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은율이의 표정은 시무룩해져 있었다.
“우리 은율이 표정이 왜 그럴까?”
내 장난스러운 물음에도 은율이는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갑작스럽게 내가 떠난다니까 심통이 제대로 난 모양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은율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아빠, 이제 가는 거야?”
“응. 미안해. 급한 일이 생겨서 아빠가 꼭 가봐야 할 것 같아.”
“지금 가면 언제와?”
“며칠 있다가 올 거야.”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나는 슬쩍 아크 심판관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나를 대신해서 은율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빠는 지금 정말 중요한 일 때문에 잠시 떠나는 거란다. 은율이는 착한 아이니까 이해해 줄 수 있지?”
“…….”
“대신에 이번 일이 끝나면. 할아버지랑 같이 천계에 놀러 가자꾸나.”
“천계?”
“그래. 마계 못지않게 천계에도 재미있는 게 참 많거든. 아마 은율이도 직접 보면 아주 좋아할 거야.”
아크 심판관은 나중에 천계에 데려다주겠다는 말로 은율이의 관심을 끌었다. 은율이도 영 관심이 없는 건 아닌지, 삐죽 튀어나왔던 입이 조금 원래대로 돌아갔다.
“우웅…… 진짜 재밌어?”
“천족의 심판관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 이번 일이 잘 끝나면 꼭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마.”
은율이는 나와 아크 심판관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심통이 나 있던 얼굴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나도 무거웠던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크 심판관님 그리고 시현 님.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헛!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는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에 아크 심판관이 나를 재촉했다.
“시현. 아무래도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네. 짧게 인사만 하고 갈게요.”
“시현 님. 은율이는 저에게.”
리아네가 알맞을 때에 나서서 내 품에 있던 은율이를 데려갔다. 아직 얼굴에 서운함이 남은 은율이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은율아. 밥 꼬박꼬박 챙겨 먹고, 어른들 말 잘 들어야 해.”
“응.”
“아빠 갔다 올게. 쪽!”
마지막으로 은율이의 사랑스러운 볼에 뽀뽀를 해줬다.
“리아네 씨. 은율이 부탁드릴게요.”
“네! 시현 님도 무사히 잘 다녀오세요.”
리아네와 은율이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저 갔다 올게요, 사장님.”
“그래. 괜히 천족들에게 휘둘리지 말고. 아니다 싶으면 그냥 들이박아. 뒷수습은 저 늙은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허허헛!”
카네프의 조언에 옆에 있던 아크 심판관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대책 없는 조언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걱정을 담아 표현할 걸 알기에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 선배, 농장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슈미르 씨랑 우르키도 빠져서 조금 힘들 거야.”
“안드라스 선배랑 릴리아가 돌아오면 괜찮을 거예요.”
“부탁할게. 엘린.”
엘프리드는 곧바로 아슈미르와 우르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두 분도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시현 선배 잘 챙겨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인사를 끝낸 나와 일행들은 건물 밖으로 나섰다. 농장 식구들은 건물 밖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우리는 느긋한 걸음걸이의 아크 심판관을 따라 농장을 점점 벗어났다.
“아크 심판관님.”
“앞으로는 편하게 ‘아크’라고 부르게나.”
“아, 예. 아크 님.”
“왜 불렀는가?”
“저희는 어떻게 천계로 가는 건가요?”
내 질문에 아크 심판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허허, 좋은 질문이네. 천계에 가기 위해서는 천계로 통하는 차원문을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네. 그런데 애석하게도 마계에는 그 차원문이 존재하지 않지.”
“예? 그럼 어떻게……?”
“원래라면 마계에서 지구로 넘어간 다음, 다시 지구에 있는 차원문을 통해 천계로 넘어가야 한다네. 굉장히 번거롭지. 그리고…….”
아크 심판관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차원문을 지키고 있는 집행관 친구들이 굉장히 깐깐하거든. 에잉! 이래 뵈도 천계에 몇 없는 심판관 중의 한 명인데 말이야.”
“아…….”
그는 다시 원래대로 몸을 돌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좀 더 편한 방법을 통해 천계로 갈걸세. 쓸데없는 권력 남용이라 생각해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구먼. 흐음. 이제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아크 심판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강렬한 빛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빛줄기는 정확히 일행들 주변을 감쌌다.
“이, 이게 뭐죠?”
“허허! 긴장하지 말게나. 천계의 심판관이 가진 특권 중 하나니까. 이게 천계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네.”
하늘의 빛줄기는 눈앞의 시야를 완전히 가릴 정도로 강렬해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눈이 부시거나, 아픈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굉장히 포근하고 편안해졌다.
-파앗!
흐릿하게 보이던 주변 풍경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몸이 부웅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약간 어지러워졌다.
어지러움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눈앞에는 완전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