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403화
에크르아스 의회(3)
우르키 덕분에 경비병들을 피해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우리는 커다란 복도를 지나, 계단 아래 구석진 공간으로 일단 숨어들었다.
뒤쪽에서 추격해 오는 자들이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슈미르 씨……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 다녀야 하는 거죠?”
“회의가 시작될 때까지는 계속 숨어 있어야 합니다. 회의 중간에 아크 심판관님께서 참고인을 요청하면. 우리는 그때 맞춰서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으음. 사실상 무단으로 회의장에 난입하자는 거네요?”
“……좀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극적인 연출이라고 해두죠.”
“허헛!”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그녀의 대답에 나는 잠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철두철미하던 그 천족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완전 엉망진창인 계획이었다.
“저도 무모한 계획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크 심판관님께서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
아크 심판관은 우리를 들여보내기 위해 아무런 잘못 없는 경비병들을 제압했다.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정도로, 나의 회의 참석을 간절히 원했던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나?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아크 심판관과 우르키의 간절함을 생각해서라도 꼭 회의에 참석해야겠다고 진지하게 다짐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복도 끝쪽에서 다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아슈미르의 얼굴에 다시 긴장감이 차올랐다.
나는 발걸음 소리가 더 가까워지기 전에 재빨리 속삭였다.
“이제 어떻게 하죠?”
“으음……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만 다닐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따라오시죠.”
아슈미르는 비장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타탓!
아슈미르는 빠른 발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순식간에 위층에 도착한 그녀는 복도 쪽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경비병의 존재 여부를 확인했다.
“아직 여기는 수색이 시작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나도 그녀의 옆에서 슬쩍 주변을 살폈다. 조용한 복도를 따라서 많은 방문이 보였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죠?”
“회의에 참석하시는 분들이 잠시 대기하는 개인 대기실입니다. 아크 심판관님 같은 분들이나, 고위 간부들이 사용하는 곳이죠.”
아슈미르는 이 장소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중간에 몇몇 사람들과 마주쳤지만, 다행히 우리를 의심스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복도 양옆을 유심히 살피더니, 어떤 방문 앞에서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바로 그곳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잠시후 방문 안쪽에서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키르웬 감시관님. 저 아슈미르입니다.”
-으음? 아슈미르 감시관?
“네.”
짧은 대화 속에서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묻어나왔다.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 다음 천천히 방문이 열렸다.
“정말 아슈미르 감시관이군요. 아크 심판관님과 함께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무례한 부탁이라는 건 잘 알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무례라뇨! 아슈미르 감시관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요. 자! 얼른 들어오…… 엇! 당신은?!”
아슈미르를 들여보내려던 키르웬은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놀란 반응을 보였다.
나도 그에 못지않게 속으로 놀라는 중이었다.
얼마 전 생일 선물을 구하기 위해 카네프와 지구에 갔을 때. 균열의 봉인을 도와줬던 그 천족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또 만나게 되네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일단 두 분 다 들어오시죠.”
키르웬은 나와 아슈미르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방 안은 단순한 원룸 형태의 공간이었다.
창가에는 커다란 책상, 그 옆에는 커다란 옷장, 방 한가운데는 손님을 맞이할 수 있게 푹신해 보이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그 옆에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으로 봐서는 방금까지도 서류를 읽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사람을 불러서 두 분께 드릴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사람을 부르겠다는 말에 우리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 저도 괜찮아요.”
“음? 그런가요?”
우리의 반응이 약간 부자연스러웠던 탓이었는지 키르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울였다. 그래도 이 부분에 대해서 더 물어보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키르웬은 책상에서 의자를 가져와 우리 근처에 자리 잡았다.
“조금 당황스럽네요. 이름이 시현 님이라고 하셨던가요?”
“네, 맞습니다.”
“균열의 봉인을 도와주셨을 때. 금방 또 만나게 될 거라 말씀드리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그것도 의사당 대기실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하하. 그러게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흐렸다.
키르웬의 말은 단순히 놀라움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왜 이곳에 있는 거냐?’라고 물어보는 것 같았으니까.
나를 물끄럼히 바라보던 키르웬은 아슈미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슈미르 감시관은 여기에 어쩐 일인가요? 저는 아크 심판관님을 보좌하는 중이라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아직 회의 시작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그게…….”
아슈미르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똑. 똑. 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나와 아슈미르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리를 유심히 살피던 키르웬의 눈동자가 조용히 빛났다.
-똑. 똑. 똑.
-키르웬 감시관님? 의사당 경비대에서 나왔습니다. 안에 계신다면 잠시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문 너머로 경비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르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급해진 아슈미르가 그를 불러세우려 했다.
“키르웬 감시…….”
“쉿!”
“……!”
“……!”
그는 입가에 검지를 들어 보이며 아슈미르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 검지를 움직여 책상 옆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방 안에 들어오면서 봤던 커다란 옷장이 있었다. 뭔가를 눈치챈 아슈미르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탕! 탕! 탕!
-키르웬 감시관님!
경비대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좀 더 거칠어졌다. 키르웬은 우리에게 빨리 움직이라는 신호를 보내며, 일부러 헛기침 소리를 크게 냈다.
“크흠, 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책상에서 급하게 일어나려다 차를 쏟아버렸네요. 중요한 문서만 빠르게 먼저 치우겠습니다.”
그러면서 찻잔을 기울여 책상 위에 쏟았다. 부산하게 서류를 치우는 연기가 끝날 때쯤, 우리는 옷장 안으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
-덜컥!
“죄송합니다. 차를 쏟는 바람에 조금 늦게 나왔네요.”
“괜찮습니다, 감시관님.”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혹시 회의에 문제라도 생겼나요?”
“저희는 의사당 내부로 무단 침입한 감시관 제복 차림에 천족 여성과 검은 머리의 인간 남성을 좇고 있습니다.”
“…….”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인상착의의 두 사람이 이 근처를 지나갔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혹시 감시관님께서는 침입자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경비대의 물음에 키르웬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못 봤습니다.”
“흐음…… 이곳으로 향하는 걸 봤다는 확실한 진술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낌새를 전혀 못 느끼셨습니까?”
“글쎄요. 너무 집중해서 서류를 훑어보느라 전혀 몰랐습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
“…….”
키르웬과 경비대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옷장 안에서 숨소리를 참았다.
결국…….
“알겠습니다. 바쁘신데 방해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혹시 수상한 자들을 발견하시면 꼭 알려주십시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경비대가 물러나고. 이어서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
“…….”
키르웬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경고했다. 나와 아슈미르는 계속 숨소리를 죽이며 옷장 안에서 대기했다.
한동안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계속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아무래도 경비대는 이 근처에 숨어 있을 거라 확신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별수 없었다.
우리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경비대들은 하나둘 다른 곳 수색을 위해 떠나갔고, 문 너머 복도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화악!
어두웠던 옷장 안에 환한 빛이 쏟아졌다. 그 앞에는 옷장 문을 연 키르웬이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경비대는 모두 돌아간 것 같습니다. 안심하고 나오세요.”
“네…….”
“…….”
우리가 나올 수 있도록 안심시킨 키르웬은 먼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팔짱을 낀 자세로 우리를 응시했다.
나와 아슈미르는 옷장에서 나와 쭈뼛쭈뼛 의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큰 잘못을 저지른 뒤, 담임선생님을 찾아 교무실로 가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굉장히 불편한 심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키르웬은 말 없이 우리를 지켜보다가 아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움찔!
아슈미르의 몸이 크게 떨렸다.
너무 무표정하다 싶을 정도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인데. 지금은 얼핏 옆모습만 보아도 무척 긴장했다는 게 보였다.
침묵을 이어가던 키르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머리 아픈 일을 저질렀을 줄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키르웬 감시관님.”
아슈미르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미안함을 표했다. 키르웬은 그 모습을 보며 아주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아는 아슈미르 감시관이라면 이렇게 경솔한 짓을 함부로 저지르지 않았을 거예요. 혹시…….”
키르웬의 의혹이 담긴 눈빛이 내 쪽으로 향했다. 내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전에 아슈미르가 먼저 나서서 해명했다.
“시현 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의 무리한 행동에 휘말리셨을 뿐이에요.”
“하아…… 그럼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벌인거죠?”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슈미르는 의사당 입구에서부터 있었던 일을 하나씩 차분하게 정리해서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키르웬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