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404화
에크르아스 의회(4)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찾아오게 된 겁니다.”
아슈미르의 이야기가 끝나고.
굳어진 표정의 키르웬이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크 심판관님께서 결국…….”
“일에 휘말리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아슈미르 감시관!”
“…….”
“왜 이렇게 무모한 일을 반대하지 않은 겁니까? 긴급하게 의회가 소집된 날에 경비대를 공격한 것도 모자라, 의사당에 무단 침입까지…….”
그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얼굴로 아슈미르를 다그쳤다.
“지금 건물에는 에크르아스 의회에 소속된 의원들이 가득합니다. 이곳을 무단 침입했다는 건 절대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슬쩍 내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분은 천계에서 추방하는 선에서 마무리되겠지만, 당신과 그 견습 감시관은 상황이 다릅니다. 감시관의 직책에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지금까지 감시관으로 활동했던 공적도 모조리 물거품이 될 겁니다. 운이 나쁘면 징계에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르죠.”
키르웬의 입에서 암울한 내용이 줄줄 이어졌다.
뒤늦게 나도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고 얼굴이 새하얘졌다. 아슈미르와 우르키가 이렇게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
아슈미르는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복잡한 감정의 뒤섞임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르웬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무모한 계획은 포기하고…….”
“아뇨. 그럴 수 없습니다.”
“아슈미르 감시관…….”
아슈미르의 얼굴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여기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현 님을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데려갈 겁니다.”
“포기하지 않겠다니…… 설마 아크 심판관님께서 전부 해결해 줄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받게 될 징계와 형별은 두렵지 않습니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니까요.”
“어째서 그렇게 까지……?”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지금껏 보지 못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나도 맑고 아름다운 미소에 순간 멍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시현 님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깨달았어요. 이분이야말로 천족의 오랜 고민을 해결해 줄 거라는 사실을요.”
아슈미르는 믿음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키르웬도 나를 바라보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했다.
두 천족의 뜨거운 시선에 나는 얼굴이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키르웬 님께서 저게 말씀하셨죠.”
“……?”
“감시관의 직책을 맡은 자는 단순히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수많은 세계와 사람을 접하며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키워, 스스로 행동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죠.”
“…….”
“저는 제 행동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말을 끝으로 방 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키르웬은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깊은 고민에 빠졌고, 아슈미르는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나 역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키르웬의 반응을 살폈다.
갑자기 그때.
-똑. 똑. 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에 가득하던 침묵은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변했다.
모두가 숨소리를 죽이고 집중하던 와중, 명랑한 여자 목소리가 팽팽했던 긴장감을 풀었다.
-키르웬 님! 조금 있으면 회의에 참석하실 시간이에요.
“으음.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네. 늦지 않으시려면 금방 나오셔야 할 것 같아요.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을까요?
“괜찮습니다. 곧 나갈게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네∼!
종종걸음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느껴지던 존재감은 멀리 사라졌다.
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은 긴장을 풀며 안도했다.
“키르웬 님.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으니 저와 시현 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나와 아슈미르는 키르웬에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
“…….”
“지금 경비대가 이 주변에 진을 치고 있을 겁니다. 이대로 나가게 되면 분명 얼마 못 가 그들에게 붙잡힐 거예요.”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정 안되면 제가 미끼가 되어서 시현 님을 회의 장소로…….”
“제 말 들으세요!”
“…….”
키르웬은 단호한 목소리로 아슈미르의 말을 끊었다.
“아슈미르 감시관은 여기에 남아 계세요. 저분은 제가 회의 장소로 데려가겠습니다.”
“예?”
“아, 안 됩니다. 키르웬 님!”
“고위 감시관인 저를 의심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겁니다. 저분을 회의 장소로 데려가기에는 아슈미르 감시관보다 제가 훨씬 더 수월할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그건…….”
설득력 있는 말에 아슈미르가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더는 키르웬 님께 폐를 끼칠 수 없어요. 저희끼리 가겠습니다.”
“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안타깝지만 설득하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두 분이 제 말대로 하지 않겠다면, 저는 지금 당장 경비대를 불러올 겁니다.”
“……?!”
“……?!”
“두 분이 허무하게 붙잡히는 걸 지켜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수시키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선택하세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키르웬은 진지한 얼굴로 우리의 결정을 재촉했다.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와 아슈미르는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 *
복도에 두 개의 발걸음 소리가 나란히 울려 퍼졌다.
앞에는 키르웬이 나서서 걷고 그 뒤에 내가 감시관 제복을 입고서 복면과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상태로 뒤따랐다.
빌려 입은 제복이 내 몸보다 커서 조금 헐렁한 것만 빼면 꽤 그럴듯한 변장이었다.
주변을 맴돌던 경비병이 몇 차례 옆으로 지나쳤지만, 나를 이상하게 보는 일은 없었다. 대부분 키르웬을 먼저 알아보고 의심 자체를 하지 않았다.
우리가 숨어 있던 방에서 멀어질수록, 돌아다니는 경비병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키르웬은 방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이제 경비병은 많이 없을 겁니다. 자연스럽게만 행동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주변에 경비병이 보이지 않아도 긴장감은 쉽게 놓을 수 없었다. 내가 잘못하면 키르웬도 말려들게 된다는 생각에 부담감이 컸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키르웬이 다시 한번 더 말을 걸었다.
“신념을 키워 스스로 행동하는 존재가 될 것.”
“예?”
“제가 아슈미르 감시관에게 해줬던 말. 사실은 저도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입니다.”
“…….”
“제가 견습 감시관이었던 시절. 많은 감시관의 존경을 받던 어느 고위 감시관에게 직접 들었던 말이죠. 이제 그분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심판관이 되셨지요.”
“아…… 설마?”
“언젠가 그분께서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슈미르 감시관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는군요.”
키르웬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당신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과 가장 신뢰하는 후배가 인정한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회의장 안까지 무사히 데려다주겠습니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그의 따스한 격려 덕분에 잔뜩 쌓였던 긴장감이 조금은 녹아내렸다.
“감사합니다, 키르웬 님.”
“좋습니다. 눈을 속이기 위한 변장이긴 해도 감시관의 제복을 입은 이상 멋지고 당당하게 행동해 주세요.”
“네!”
나는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진 움직임으로 뒤를 따랐다. 당당해진 내 모습에 키르웬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장이 가까워질수록 주변에는 많은 천족으로 북적거렸다.
주변에 꽤 많은 경비병이 배치돼 있긴 했지만, 워낙 많은 인파가 몰리다 보니 대부분 허둥대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키르웬은 나를 회의장 2층 입구로 이끌었다.
2층 쪽에는 아래층보다 사람이 적었다. 그래도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길게 줄을 서는 중이었다.
우리도 그 줄 뒤에서 서서 입장을 기다렸다. 천천히 줄이 줄어들면서 회의장 입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입장이 끝나고.
우리 차례가 되어 자연스럽게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두 명의 경비병이 우리의 출입을 막아섰다. 키르웬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무슨 일인가요?”
“죄송합니다, 키르웬 님. 지금 건물 내부에 수상한 인물이 침입한 상황이라. 뒤쪽에 계신 분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저를 보좌할 견습 감시관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키르웬이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내자 경비병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문제는 아니고…… 저분의 복장이 조금 특이하신 것 같아서……. 혹시 왜 얼굴을 가리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 균열을 봉인하는 과정에서 많은 감시관의 피해가 있어요. 그 때문에 여기 있는 견습 감시관도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죠. 상처를 가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 살짝만 복면을 내려 주시면…….”
경비병이 본면을 언급하자마자 키르웬이 뾰족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지금 감시관의 명예를 무시하는 건가요? 견습 감시관일지라도 엄연히 페이슈타의 감시관 소속입니다!”
“그, 그게 아니라!”
“최근 어려워진 균열 봉인에 대해 직접 경험한 견습 감시관이 부상을 무릅쓰고 회의에 도움이 되려고 찾아왔건만!”
-웅성웅성.
-웅성웅성.
뒤쪽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도 놀라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우리를 막았던 경비병들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빠르게 물러섰다.
“죄, 죄송합니다. 당장 들어가시죠.”
“흠. 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지금은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비병들이 물러나고 우리는 회의장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실감 나는 연기를 보여줬던 키르웬은 경비병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했을 때, 나를 바라보고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