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406화 (406/426)

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406화

에크르아스 의회(6)

의장의 결정에 따라 혼란스러웠던 분위기는 금방 수습됐다.

경비대 대장은 부하들을 이끌고 회의장에서 물러났다. 나가기 직전에 나와 키르웬이 있는 쪽을 잠시 노려봤지만, 의장의 지시를 무시하지 못했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계속 내 곁을 지키고 있던 키르웬도 회의장에서 물러날 준비를 했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저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나에게 행운을 빌어준 키르웬은 후련한 모습으로 회의장을 떠나갔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아슈미르와 우르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슈미르와 우르키는 경비대원들에게 끌려 나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나에게 손을 흔들며 힘내라는 듯한 신호를 보냈다.

징계를 무릅쓰고 열심히 노력한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꼭 이 회의에서 좋은 결과를 내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 * *

에크르아스 의회.

천계에서 가장 주요한 의사결정 기구인 만큼 회의는 아주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레토 의원이라고 그랬었나?

아까 가장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던 그도 회의에 들어가서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했다.

물론 아크 심판관의 말에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는 건 여전했지만…….

나는 원형 회의장 바깥쪽에 자리를 배치 받아 회의를 지켜보게 됐다.

관람석에서 나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 때문에 뒤통수가 따끔거렸지만, 그냥저냥 버틸 만했다.

처음에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열심히 회의 내용을 경청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참을 수 없는 지루함과 따분함이 몰려왔다.

물처럼 콸콸 쏟아지는 어려운 용어들에, 내용을 이해하는 것조차 힘겨운 법리적 해석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머리가 어질해지는 기분이었다.

반면에 회의장에 모인 의원들은 이렇게 복잡한 말들을 쏟아내면서도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회의에 집중하는 건 관람석에 앉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명쯤은 딴 짓하거나, 잠에 취해 졸릴 법도 한데. 모두가 눈에 불을 켠 듯 회의에 집중했다.

가끔은 관람석에 앉은 사람들도 발언권을 얻어 회의에 참여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누구 할 것 없이, 각자의 논리와 생각으로 열심히 회의에 참여하는 모습은 굉장히 멋있다고 느껴졌다.

아무튼.

어렵고 복잡한 회의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심각해진 차원의 불균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고 있었다.

한쪽은 정해진 규칙과 절차에 따라 지금처럼 계속 대응하자는 의견. 다른 한쪽은 지금의 방식은 효용이 없으니, 다른 대응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쪽이었다.

유지하자는 쪽은 오랫동안 지켜져 온 천족의 율법과 전통을 그 근거로 내세웠고.

대안이 필요하다는 쪽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 차원의 불균형과 그 위험성을 강조했다.

관람석의 사람들도 의견이 반반으로 나뉘며 회의의 결과는 미궁 속으로 향했다.

그때 레토 의원이 손을 들며 발언권을 요청했다.

의장의 허락이 떨어진 즉시, 그는 얼굴에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불균형의 위험성이 커지고, 우리가 대응하기 점점 힘들어진다는 건 나도 동의하겠소. 하지만 지금껏 우리가 해왔던 방식보다 더 좋은 대응방법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오?”

레토 의원의 시선이 아크 심판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저는 이미 여러 차례 그 방법에 대해 말씀드렸소.”

“하! 설마 또 그 허무맹랑한 소리를 할 생각이오?”

코웃음 치는 반응에도 아크 심판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분명 우리에겐 믿기 힘든 일이고, 인정하기 싫은 일일 거요. 하지만 이제는 더 머뭇거릴 시간이 없소. 차원의 균형을 수호해 왔다는, 그 자부심에 금이 가는 일이 있더라도. 오늘은 모두에게 인정받아야겠소.”

아크 심판관은 조용히 눈을 빛냈다. 레토 의원도 그 강력한 의지를 느꼈는지 움찔 몸을 떨었다.

“조, 좋소. 그럼 어디 한번 보여줘 보시오.”

“…….”

대답을 하는 대신 아크 심판관은 의장석으로 눈을 돌렸다.

“의장에게 요청하겠소. 참고인이 회의에서 증언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시오.”

“승인하겠소.”

의장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참고인 요청을 승인했다.

아크 심판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싱긋 웃으며 다른 사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너무 긴장한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처음에는 많이 긴장됐었는데. 지금은 빨리 회의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허허! 나도 똑같은 생각이네만. 이 회의는 내가 끝낼 수 없을 것 같네.”

그러면서 아크 심판관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마도 이 회의를 끝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너!’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복잡한 감정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자신은 없지만 열심히 해볼게요.”

“너무 부담가지지 말게. 일이 잘 안 풀리면 귀찮은 심판관 직책 따위는 내려놓고 말년을 자네 농장에서 신세 지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말이야.”

“죄송하지만. 남의 농장을 은퇴 계획에 넣지 말아주실래요? 그게 더 부담되거든요?”

“허허, 보기보다 냉정하구먼.”

나와 아크 심판관은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덕분에 긴장감을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

“아크 의원? 참고인의 준비는 아직이오?”

준비가 너무 길어진다 생각한 의장이 재촉했다.

“이크! 너무 여유를 부렸군. 준비하게.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하면 될걸세.”

아크 심판관은 나를 회의장 쪽으로 안내하며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카네프가 자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더군. 평소에는 영 미덥지 않아 보여도, 꼭 필요할 때는 뭔가 해주는 녀석이라고. 나도 그의 말을 믿어보겠네.”

“하하!”

왠지 머릿속으로 카네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벅, 저벅.

나는 천천히 회의장 가운데로 향했다.

이 커다란 공간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내 발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미리 준비해 놓은 참고인 의자에 뻣뻣한 자세로 앉았다. 막상 자리에 앉으니 다시 긴장감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임시 회의인 만큼. 참고인 요청은 별도의 승인 절차 없이 의장의 권한으로 승인하겠소. 대신 참고인에 관한 짧은 질의시간을 가지겠소. 그전에 참고인?”

“네?”

“참고인의 성명, 소속이 담긴 요청서를 받지 못했으니. 짧게 자신의 소개를 해줄 수 있겠소?”

“아, 예.”

머나먼 천계에서 자기소개를 하게 될 줄이야.

초등학교 반 친구들 앞에서 처음으로 자기소개 했을 때 이후로, 이렇게 긴장되는 자기소개는 처음인 것 같았다.

“저는 지구에서 온 ‘임시현’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마계에서 농장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고요. 마계에서 받은 이름은 ‘시현 레프미어 카디스’. 그리고 카디스라는 작은 영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싸늘한 반응.

너무나도 반응이 싸늘해서 노래라도 한 곡 불러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머릿속으로 선곡 리스트가 스치고 있던 그때, 조용히 있던 의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의원들께서는 참고인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간단히 질문해 주시오. 참고인은 원하지 않으면 대답을 거부해도 좋소.”

싸늘했던 반응과는 달리.

의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의원들의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마계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뭐죠?”

“아크 심판관님과는 어떻게 알게 되었소?”

“신수를 길들였다는 소문이 있던데…….”

“고위 감시관인 키르웬 감시관이 당신을 보호한 이유는?”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하나씩 대답했다.

대부분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고, 몇몇 애매한 질문에만 잘 모르겠다고 했다.

슬슬 질문이 잠잠해질 때쯤.

가장 껄끄럽게 느껴지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계속 아크 심판관과 대립각을 세웠던 레토 의원이었다.

“나도 질문하겠소.”

“…….”

“아크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참고인은 완전한 차원계를 창조했다고 들었소. 이름이 시현계? 훗!”

아니. 질문만 딱 할 것이지.

왜 기분 나쁘게 웃고 난리야. 괜히 내 이름이 들어가서 더 기분 나쁘네!

레토 의원의 태도가 굉장히 불쾌했지만, 쉽게 감정을 드러내면 얕보일 것 같아 억지로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나는 참고인이 완전한 차원계를 창조했다는 말을 전혀 믿을 수 없소. 아마 여기에 있는 의원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할거요. 안 그렇소?”

그는 여유롭게 의원석을 둘러보며 자신의 주장에 동의를 구했다. 그의 의도대로 대부분의 의원이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자리에서 진실인지 아닌지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 참고인은 이곳에서 그 차원계를 보여줄 수 있겠소?”

나는 살짝 당황해서 되물었다.

“여, 여기서요?”

“그렇소. 아크 의원의 주장대로 완전한 차원계라면 분명 천계에서도 그 차원계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을 거요.”

그러면서 레토 의원은 입꼬리를 올리며 얄밉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곤란하다면 거부해도 좋소.”

“…….”

어휴! 얄미워라.

저 얄미운 미소를 당장 울상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내가 입증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됐다.

슬쩍 아크 심판관 쪽을 바라봤다. 그는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 맥없이 물러날 순 없지. 아슈미르 씨와 우르키. 그리고 아크 심판관과 키르웬 감시관을 위해서라도 해내야 해!

나를 믿어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의지를 다졌다.

내가 뭔가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천족들의 시선이 쫙! 내게 집중됐다. 레토 의원의 눈빛에는 약간의 불안감이 맴돌았다.

-스윽.

요정 여왕의 힘이 깃든 손을 들어 올렸다. 마계에서는 아주 쉽게 했었던 일이지만, 천계에서도 똑같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시현계를 떠올리며 의식을 집중했다. 마계에서 자연스럽게 했던 그 느낌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으음…….”

긴장을 한 탓일까?

뭔가 평소에는 선명하게 느껴지던 감각이 흐릿해진 기분이었다.

나는 눈을 감으며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눈을 떴을 때 레토 의원의 의기양양한 모습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한동안 끙끙대며 요정 여왕의 힘에 집중했다.

아아!

감각이…… 감각이 이상해.

역시 천계에서는 불가능한 걸까?

밀려드는 허탈함과 좌절감에 포기하려던 그때!

「꺄하하! 시현 표정이 이상하다, 뾰!」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뾰?」

「시현이 아파? 그럼 우리가 호! 해줄게. 호오!」

향기로운 꽃향기와 반가운 목소리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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