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408화
에크르아스 의회(8)
“상자 열어주세요.”
나는 당당하게 상자를 열어달라고 말했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회의장 내에 술렁임이 일어났다.
상자에 대해 경고했던 의장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굉장히 위험한 물건이오. 좀 더 신중히 생각해 보는 게 좋을거요.”
“위험한 물건이라는 건 충분히 이해했어요. 하지만 제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저 상자 안의 무언가를 해결해야 하는 거잖아요?”
“…….”
“저를 믿고 열심히 노력해 주신 분들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허무하게 물러날 순 없어요.”
나는 의장에게 확고한 뜻을 밝혔다.
“으음…… 좋소.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의장은 상자를 가져왔던 병사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병사들은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상자 윗부분의 손잡이를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그그극, 턱!
오랫동안 열린 적이 없었는지 상자의 덮개 부분은 쇠 긁는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열렸다.
끝까지 손잡이를 잡아당긴 병사들은 후다닥 상자 쪽에서 멀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 앞으로 다가섰다.
완전히 개방된 상자 윗부분을 통해서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보였다. 상자 안에는 어디서 본 듯한 지팡이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어디서 이걸 봤더라…… 아!
아슈미르 씨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 그, 그게…… 뮈네크의 지팡이였던가?
두 마리의 흰색 뱀이 지팡이를 휘감는 모습을 한 것이 뮈네크의 지팡이라면, 상자 안에 있는 것은 세 마리의 황금색 뱀이 지팡이를 휘감고 있었다.
또 다른 점이라면.
뮈네크의 지팡이보다 훨씬 더 비범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상자를 들여다보는 그 순간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 발 더 내디디려는 그 순간.
-움찔!
나는 몸을 움찔 떨며 발걸음을 멈췄다.
내 의지로 멈춘 게 아니라, 뭔가 위험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상자와 거리를 유지한 채 조금 더 자세히 지팡이를 살폈다. 그제야 나는 지팡이의 범상치 않은 기운 말고, 또 다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그리고 익숙한 기운이었다.
틀림없어.
균열에서 느껴지던 그 느낌.
혼돈의 기운이야.
내 반응을 살피던 의장이 먼저 말을 건넸다.
“지팡이에서 어떤 기운을 느끼셨소?”
“제일 처음에 느낀 건 굉장히 엄숙하고, 고결한 느낌이었어요.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을 때는 불길한 기운이 치솟더군요. 균열에서나 느낄 수 있는 그런 불쾌한 기운이요.”
“정확히 보았소.”
의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 지팡이의 이름은 ‘코데쉬의 지팡이’. 또는 집정관의 지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소.”
“코데쉬의 지팡이……. 뮈네크의 지팡이와 비슷한 건가요?”
“그렇소. 뮈네크의 지팡이가 감시관을 상징하는 신물이라면. 코데쉬의 지팡이는 집정관을 상징하는 신물이라고 할 수 있소.”
“그런데 집정관이라는 직책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내 물음에 의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요. 지금 집정관의 자리는 오랫동안 공석인 채로 남아 있으니까.”
“아…….”
“집정관은 주요한 세 집단. 심판관, 집행관, 감시관을 통솔하는 자로서. 천족에게 주어지는 가장 명예로운 직위라고 할 수 있소.”
“그렇게 중요한 자리가 왜 지금까지 공석인 거죠?”
“집정관은 에크르아스 의회의 만장일치 심사 통과와 전임 집정관의 직접 승계를 통해서만 그 직위를 인정받을 수 있소.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마지막 집정관이 세상을 떠나 버렸고, 그 상징마저 저런 상태가 돼버렸다오. 코데쉬의 지팡이를 원래 상태로 돌려놓지 못한 이유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집정관의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밖에 없었소.”
긴 설명을 들은 나는 좀 더 진지해진 얼굴로 지팡이를 바라봤다.
“한마디로…… 새로운 집정관을 뽑기 위해서. 이 지팡이를 원래대로 돌려놔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소.”
“흐음…….”
“오랫동안 코데쉬의 지팡이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했지만, 우리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소. 만약에 그대가 이 일에 성공한다면 능력의 증명은 물론이고, 모든 천족에게 감사와 존경을 받게 될 것이오.”
모든 천족의 감사와 존경이라.
그 콧대 높은 천족이 그 정도의 대접을 해줄 정도면, 역시 그만큼 이 일이 어렵다는 뜻이려나?
사실 감사와 존경 같은 건 별로 바라지도 않았다. 이걸로 아슈미르와 우르키. 그리고 아크 심판관의 노력이 결실을 본다면 그걸로 족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상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우우웅!
거리가 좁혀지는 만큼 지팡이에서 기분 나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섰을 때는 더욱더 심해졌다.
불길한 기운은 관람석 쪽까지 영향을 미쳤다.
“크흑!”
“으으…….”
“버틸 수 없는 자들은 회의장 쪽에서 물러나시오!”
나는 주변의 소란스러움은 무시하며 최대한 상자 쪽으로 다가서려 했다.
하지만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거셌다.
끄으응…….
역시 만만치 않네.
다가서지 못하고 고전하던 그때.
머릿속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여기는 또 어디고?
여우신의 목소리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잘 됐다. 나 좀 도와줘!’
-갑자기 뭘 도와달라는 거야?
‘저 커다란 지팡이 보이지? 저 지팡이에서 불길한 기운을 몰아내야 해. 내가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도와줘.’
지팡이를 살펴본 여우신이 헛바람 소리를 냈다.
-허어! 저 흉흉한 물건은 뭐야? 딱 봐도 보통일이 아닌데?
‘그러니까 도와달라고 한 거지. 빨리 뭐든 해봐.’
-흐으응? 내 도움이 필요하구나.
갑자기 여우신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해졌다.
-맨입으로?
아니. 이 녀석이?
나는 살짝 짜증을 담아 여우신을 압박했다.
‘야! 주도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거 알고 있지? 순순히 안 도와주면 나중에 너도 괴로워질 거야.’
-뭐, 그러시든가.
‘너…….’
-내 도움이 없으면 절대 못 버틸 텐데?
‘…….’
여우신은 내 압박을 여유롭게 되받아쳤다. 지금 당장은 내가 아쉬운 상황이었기에, 눈치 빠른 여우신은 아쉬울 거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난 태도를 보였다.
‘……원하는 게 뭔데?’
-아까 건방진 태도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나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한 번 넘어가도록 해주지.
‘빨리 말해! 이제 버티는 것도 힘들어!’
-내가 원하는 건…… 츄릅!
여우신은 머리가 울릴 정도로 크게 입맛을 다셨다.
-떡! 한 달 동안 내가 원할 때 떡을 먹게 해주는 거야.
‘아, 안 돼!’
-왜애??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얼핏 들으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요구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여우신은 떡을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은 것처럼 떡을 미친 듯이 먹어치우는 데다가.
입맛은 엄청 까다로워서 갓 만들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떡만 선호했다.
거기다 밤늦은 새벽까지도 떡 타령을 해대는 탓에 한동안 떡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였다.
한 달 동안 여우신이 원할 때 떡을 준비한다?
으으으!
지금 지팡이에서 뿜어져나 나오는 기운보다 더 숨 막히게 느껴졌다.
‘한 달은 너무 길어. 3일. 3일로 해.’
-악! 3일은 너무 짧잖아. 그럼 보름!
‘5일!’
-열흘!
‘일주일! 이게 진짜 최대야. 더는 못 해줘.’
-끄으응……
여우신은 끙끙대며 고민하더니 결국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일주일! 대신 내가 원하는 만큼 준비해 줘야 해?
‘알았어. 약속할게.’
-흐흐. 뭐부터 달라고 할까? 인절미? 찹쌀떡? 꿀떡?
‘떡 먹을 생각은 나중에 하고. 빨리 이것부터 어떻게 해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잠시 후.
여우신의 기운이 흘러나와 내 몸을 보호하듯 감쌌다. 마치 주변에 작은 결계가 펼쳐진 것처럼, 거센 압박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저 지팡이는 네가 알아서 해.
‘고마워. 여우신.’
-흐흐. 얼른 끝내고 맛있는 떡이나 먹으러 가자고.
여우신의 떡 타령은 대충 무시하고 나는 상자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지팡이가 내뿜는 흉흉한 기세는 더욱 심해져서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현상이 일어났다.
나는 여우신의 보호를 믿고 지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헛?!”
“위, 위험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족들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튀어나왔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지팡이를 손에 쥐고 꺼내 들었다.
-키에에에엑!
지팡이에서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괴성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위협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러자 지팡이에서 붉은색 기운이 일렁이더니, 혼돈의 힘이 담긴 사슬이 우르르 튀어나와 나를 공격했다.
-촤르르르륵!
-어엇?! 위험해!
여우신의 걱정이 담긴 외침이 무색하게 나는 여유롭게 공격에 대응했다.
이게 어딜!
순식간에 내 양팔에서 생겨난 붉은 사슬이 상대의 공격을 능숙하게 대응했다.
아주 오래전에 나였다면 벌벌 떨며 당황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런 상황을 여러 번 이겨낸 경험이 있었다. 덕분에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했다.
나는 지팡이에 담긴 혼돈의 기운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숨어 있던 기생충을 뽑아내는 느낌으로, 가차 없이 붉은 사슬들을 뜯어냈다.
-키에엑! 켁!
혼돈의 기운은 존재의 위협을 느끼고 발악해 보았지만, 수많은 고난으로 단련된 전문가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지팡이에 가득하던 혼돈의 기운은 빠르게 희미해졌고. 생각보다 금방 뿌리 뽑을 수 있었다.
으음.
이 정도면 끝났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리저리 살피던 그 순간.
지팡이에서 황금색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오오!”
“이 빛은?!”
“설마…… 설마?!”
흥분한 천족들의 외침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나는 주변의 소란스러움을 흘려들으며 지팡이의 상태를 살폈다.
-스르르륵.
-스르르륵.
지팡이를 휘감은 세 마리의 뱀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녀석들은 내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혀를 날름거렸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하. 안녕? 이제 괜찮지?”
-……끄덕.
세 마리의 뱀은 내 말을 알아듣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이계의 인간이여.]
[정말 길고 긴 시간이었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신세를…….]
머릿속에서 울리는 낯선 목소리에 내가 반응도 하기 전에 세 마리의 뱀은 빠르게 몸을 늘어뜨려 내 손목 쪽으로 향했다.
“어?”
-파아아앗!
지팡이는 찬란한 황금빛 기운을 뿜어내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대신 그 찬란한 기운은 고스란히 내 오른쪽 손목에 전부 스며들었다.
나는 지팡이가 사라진 허공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시선을 손목 쪽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세 마리의 뱀이 휘감은 듯한 형상의, 처음 보는 황금색 팔찌가 얌전히 채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