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409화
에크르아스 의회(9)
“어…… 팔찌가 왜 여기에……?”
나는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보며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도 꽤 당황했지만, 천족들이 보여주는 반응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의원석, 1층, 2층 관람석 가릴 것 없이.
회의장 안에 모든 천족들이 입을 떡 벌리고 완전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몇몇은 내 팔목 쪽을 가리키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도 했다.
팔찌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기운. 갑자기 사라진 지팡이에서 느껴지던 그 기운이었다.
설마 이 팔찌가 코데쉬의 지팡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정황상 손에 있던 지팡이가 팔찌로 변한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던 혼돈의 기운이 이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팡이가 갑자기 팔찌가 돼버리긴 했지만, 문제였던 혼돈의 기운을 해결했으니까. 이대로 팔찌를 얌전히 돌려주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 어?
자연스럽게 팔찌를 빼려던 내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어…… 어? 이거 왜 안빠져?”
눈으로 보기에는 분명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팔찌는 딱! 달라붙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팔찌를 잡고 끙끙대는 사이. 천족들은 해괴한 장면을 본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 팔찌를 빼내는 데 실패한 나는 의원석 쪽으로 손을 내밀며 물었다.
“저기 죄송한데…… 팔찌가 안 빠지거든요. 어떻게 빼죠? 빼는 법 아시죠?”
“……?!”
“……?!”
곧 회의장은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 * *
키르웬 감시관의 대기실과 비슷한 구조의 방.
그 방안에 나는 아크 심판관과 함께 앉아 있었다.
심란한 분위기의 나와는 다르게, 아크 심판관은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허허허! 아까 의원들의 놀란 표정들 보았나? 특히 레토 의원의 얼빠진 표정이 아주 일품이었어.”
“하아…… 아크 심판관님. 지금 그렇게 속 편히 웃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웃어야 할 때가 따로 정해져 있나? 웃고 싶으면 웃는 거지. 자네도 괜히 인상 찌푸리지 말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게나.”
아크 심판관의 조언에도 나는 전혀 얼굴을 펼 수 없었다. 아직도 내 손에 황금빛 팔찌가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팔찌가 코데쉬의 지팡이 맞는 거죠?”
“그럴걸세. 나도 그런 형태로 변하는 건 처음 보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운과 형태를 봐서는 틀림없네.”
“팔찌로 변한 건 알겠는데. 왜 제 손목에서 안 빠지는 거죠?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자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네. 오히려 내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훨씬 잘해주었어.”
“그럼 왜……?”
그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코데쉬의 지팡이는 단순히 집정관을 상징하는 물건이 아니라네. 사용자의 내면을 살펴 스스로 주인을 정하는 신물이지.”
“예에? 그럼 지팡이가 저를 주인으로 정했다는 건가요?”
“그건 아닌 것 같네. 만약 자네를 주인으로 정했다면 팔찌가 아니라 본래의 모습으로 주어졌겠지. 아마 이 신물은 진짜 주인을 찾기 전에 잠시 자네에게 몸을 의탁한 게 아닌가 싶네.”
나에게 몸을 의탁했다라…….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신세를.
팔찌로 변하는 순간 머릿속에 울렸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왜 종종 그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주인을 잃은 유기견이 새로운 주인을 찾기 전에. 마음씨 좋은 임시 보호자가 잠시 맡아주는 일 말이야.”
“이 팔찌를 평범한 유기견에 비교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유기견을 비하하거나, 낮게 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지만. 아까 팔찌를 보며 호들갑 떨던 천족들의 태도를 생각하면 아주 당연한 물음이었다.
“그 팔찌가 주인을 잃었다는 점과 자네가 마음씨 좋은 보호자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그러면서 아크 심판관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뒤 다른 주제를 꺼냈다.
“언제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거죠? 급하게 회의를 종료하고 벌써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말이죠.”
“아마 옛날 서적과 문헌들을 열심히 찾는 중 일걸세. 지금 일어난 상황은 정말 예측 불가한 일이거든. 가장 경험이 많은 의장도 머리가 좀 아플 거야.”
“저기…….”
“……?”
나는 아크 심판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팔찌를 되찾기 위해 손목을 자르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뭐? 하하핫! 지금까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나?”
그는 다시 한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민망해진 나는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연히 걱정되죠. 당연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제가 엄청 중요한 물건을 뺏어버린 꼴이잖아요.”
“아무래도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한번 이렇게 해보겠나?”
“……?”
아크 심판관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속삭임을 듣고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크 심판관은 일단 시키는 대로 해보라는 듯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내용은 간단했다.
방문을 지키고 있는 천족 경비병들에게 팔찌를 찬 손을 내밀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스윽.
손을 내밀자마자 두 명의 경비병들은 반응을 보였다.
-움찔!
-움찔!
처음에는 크게 당황하며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점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마지막에는 두 사람 모두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놓으며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나는 깜짝 놀라며 손을 되돌렸다.
“어엇! 왜 그러세요?”
“하하! 이제 자네의 상황을 알겠나? 그 팔찌를 손에 차고 있는 이상 천족은 절대 자네를 해칠 수 없다네. 오히려 우리들이 자네를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이야.”
“끄응…… 알겠으니까. 저 두분 좀 일어나라고 해주세요.”
아크 심판관이 손짓하자 두 경비병이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무기를 다시 집어 들면서도 계속 내 눈치를 살폈다.
팔찌를 바라보는 내 눈빛이 달라졌다.
천족에게 큰 의미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정말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일 줄이야…….
아크 심판관은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권력의 맛이 좀 느껴지는가?”
“무서울 정도로 잘 느껴지네요.”
“어떤가? 나중에 레토 의원에게 똑같이 해보는 게.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
순간 머릿속에 쩔쩔매는 레토 의원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쁜 짓인 건 알지만. 조금은 재미있을지도……?
-똑. 똑. 똑.
-아크 심판관님. 회의가 곧 재개될 예정입니다. 참…… 고인분과 함께 회의 참석을 준비해주십시오.
방문 너머로 회의 재개 소식이 전해졌다. 딱히 준비할 게 없었던 우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경비병들이 정중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회의장까지 저희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경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회의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와 눈이 마주친 경비병들은 화들짝 놀래며 시선을 피했다.
반응이 재미있어서 옆에 걷는 경비병들을 한 번씩 빤히 쳐다보았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그들은 겨우겨우 당황하는 기색을 숨겼다.
소소하게 권력의 달콤함을 느끼며 회의장 입구에 도착했다.
1층과 2층 관람석은 전부 텅 비어 있었고 에크르아스 의원들만 의원석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크 심판관은 나에게 따스한 눈빛을 보내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나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회의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의원들의 눈동자에서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확실히 조심스러워 보였다.
슬쩍 레토 의원 쪽을 바라봤는데. 그는 내 시선을 의식하자마자,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의회 의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유례없던 일을 경험한 탓에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 결정 내리기 쉽지 않았소.”
“아뇨. 괜찮아요.”
나는 짧게 대답하며 의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먼저 의회의 결정을 알리기 전에. 아크 심판관?”
“말씀하시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대의 주장을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말이라 무시했지만. 오늘에서야 전부 진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소. 의회를 대표하는 의장으로서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소.”
의장과 나머지 의원들은 사죄의 뜻을 담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크 심판관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받아넘겼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약간의 갈등과 마찰은 사소한 일이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시오.”
의장은 아크 심판관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낸 뒤,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참고인. 아니…… 먼곳에서 천계로 찾아온 인간이여.”
“…….”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 관련된 기록과 문헌을 전부 찾아보았음에도 우리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소. 하지만 딱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소.”
의장을 포함한 모든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원석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형태는 달라졌을지라도. 그 팔찌는 ‘코데쉬의 지팡이’가 틀림없소. 그 말인즉슨! 그대가 코데쉬의 지팡이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
“꿀꺽…….”
점점 고조되는 긴장감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가 오랫동안 이루지 못했던 창조의 영역에 도달했다는 점. 그리고 혼돈에 물들었던 집정관의 신물을 직접 정화했다는 점. 위의 사실들을 근거로 의회는 그대가 신물의 임시 소유주로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소.”
의장의 격해진 감정에 따라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에 따라 내 손목에 팔찌도 황금빛 기운을 내뿜었다.
-휘익!
의장이 손짓하자 모든 의원이 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중에는 아크 심판관도 포함돼 있었다.
“에크르아스 의회는 그대를 임시 집정관으로 인정하겠소. 비록 집정관의 모든 권한은 인정받지 못하겠지만, 그대를 향한 천족의 존중과 경외는 항상 진실할 것이오.”
마지막으로 의장까지 무릎 꿇으면서.
회의장에 있는 모두가 나를 향해 극진한 예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