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415화
균열과 꽃놀이(1)
무릎 꿇은 천족들 주변으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켜졌다.
“천족들이 갑자기 왜……?”
“집정관? 천족 직위 중에 집정관이라는 것도 있었나?”
“근데 왜 저 사람한테 집정관이라고 하는 거지? 그냥 평범한 사람인 것 같은데.”
소란스러움으로 인해 임시 주차장 주변으로 사람이 더욱 몰려들었다. 주변을 통제하던 경찰관도 무슨 일인가 싶어 후다닥 달려왔다.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뻣뻣하기로 유명한 천족이 이렇게 낮은 자세를 보이는 것부터가 흔치 않은 일인데, 그 대상이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일반인이다?
당연히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 확실한 예시로.
지금의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정태호와 윤세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겨우 움직여 나와 천족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 아저씨.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인 거에요?”
“어… 음… 그게…….”
으으. 곤란하네.
얼마 전에 임시로 집정관이 됐는데. 꽤 높은 자리인 것 같아…… 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난감해하고 있는데. 눈치 없는 천족들은 주변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집정관님의 첫임무를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입니다!”
“영광입니다, 집정관님!”
천족들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열망이 가득했다. 순수하게 나와 임무를 함께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일단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천족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아… 예. 저도 여러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참 기쁘긴 한데요. 지금부터는 불편하지 않게 일어나서 이야기를 계속하는 게 어떨까요?”
“아닙니다, 집정관님. 저희는 이게 편합니다.”
아니.
내가 불편하다고!
“음음. 아주 바람직한 모습이야. 우리 집정관님 앞에서는 당연히 이렇게 행동해야지. 암!”
“사장님. 이상한 부분에서 흐뭇해하지 말고 이분들 좀 말려보세요. 주변에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잖아요.”
“왜 나한테 그래? 집정관은 너잖아?”
난감해하는 나를 대신해서 아슈미르가 앞으로 나섰다.
“아슈미르 감시관입니다. 주변이 더 혼잡해지기 전에 집정관님의 안내를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 제가 너무 흥분한 모양입니다. 지금 곧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마 키르웬 감시관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천족들은 나를 호위하듯 에워쌌다. 옆에 있던 정태호와 윤세희는 떠밀리듯 나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손을 들어 두 사람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미안, 얘들아.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줄게.”
“…….”
“…….”
아직 멍한 표정의 두 사람을 뒤로하고.
나와 일행들은 천족의 호위를 받으며 어디론가 향했다. 천족이 빠르게 길을 열어준 덕분에 우리는 금방 북적이는 인파를 뚫고 나아갈 수 있었다.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나 안심하는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더 숨 막히는 곳으로 들어가게 됐다.
* * *
균열 발생 예정지 근접한 곳에 세워진 임시 막사.
그곳에는 커다란 테이블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이번 임무의 지휘부 역할을 하는 곳이었기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만 보아도 깊은 연륜이 절로 느껴졌다.
그런데.
“크흠…….”
“허허, 이것 참.”
“…….”
임시 막사 안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맴돌았다. 그 불편한 기류의 중심에는 바로 내가 존재했다.
천족의 안내를 따라 만난 키르웬이 다짜고짜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
이곳이 각 길드 대표와 정부 관계자들이 모이는 지휘부 막사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키르웬이 나를 천족의 감시관이라 소개하자, 막사 내의 모든 사람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한 사람이 ‘혹시 농담하신 겁니까?’라고 물었을 때.
키르웬은-
“시현 님은 정식으로 에크르아스 의회에서 집정관에 임명되셨습니다. 손에 차고 계신 황금빛 팔찌가 그 증표입니다. 시현 님을 의심하는 언행은 자제해 주십시오!”
라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농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자라목이 된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내 왼편에는 키르웬과 아슈미르.
그 반대편에는 발레리안과 안드라스.
워낙 짱짱한 존재들이 내 곁에서 지키고 있다 보니.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임에도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마족과 천족이 뿜어내는 기세를 이겨내고 한 사람이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이곳에 도착해 세 번째로 만난 지인이었다.
“가디언즈 길드장 강희섭입니다.”
내가 소속된 가디언즈 길드장 강희섭은 뭔가 어색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집정관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에잉! 당황스러우니까 말이 제대로 안 나오네.”
“…….”
“진짜 묻고 싶은 질문은 따로 있는데.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제일 중요한 것부터 물어보겠습니다.”
강희섭이 말한 진짜 묻고 싶은 질문은 들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마 정태호와 윤세희가 묻고 싶었던 것과 비슷하겠지.
“솔직히 천족 측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매번 우리에게 모든 걸 맡기고 조용히 뒤처리를 맡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는 키르웬이 나서서 대답했다.
“맞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래왔었죠. 하지만 새롭게 임명된 집정관님께서 이번 균열 제거에 적극적인 참여를 원하셨기에. 우리도 이에 발맞춰 움직이는 겁니다.”
“크흠. 그건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곤란한 부분은 이미 관계자들끼리 임무에 대한 세부적인 협의가 끝난 상황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강희섭은 잠시 뒷말을 끌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천족 측에서는 저희에게 임무의 지휘권을 요구할 생각입니까?”
그의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다른 대표들도 조용히 눈동자를 번뜩였다. 아무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지휘권이 뺏길까 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지휘권에 관한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안드라스가 나서서 대답했다.
“시현 님. 그러니까 집정관님은 지휘권에는 딱히 관심이 없으십니다.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어려운 상황에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일 뿐. 여기 계시는 분들의 방식을 최대한 존중할 생각입니다.”
안드라스가 지휘권에 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자, 강희섭을 포함한 대표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저 사람들에게는 믿고 따르는 식구들의 안위가 걸린 문제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불편했던 분위기가 조금 풀리면서. 안드라스는 길드 대표들과 본격적으로 작전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중간중간에 의견 전달이 잠시 막힐때는 발레리안이 적절히 나서서 중재해줬다.
오고가는 복잡한 이야기 속에.
“…….”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것처럼. 가만히 자리에 앉아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 * *
“으아. 드디어 끝났네.”
나는 지휘부 막사를 빠져나오자마자 참았던 답답함을 토해냈다. 옆에 있던 안드라스와 발레리안은 내 모습을 보며 싱긋이 웃었고.
“고생하셨습니다, 시현 님.”
“고생하셨습니다, 집정관님.”
아슈미르와 키르웬은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고생은 무슨…… 제가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 다른 분들이 더 고생하셨죠.”
“그렇지 않습니다. 집정관님께서 이곳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역할을 다하고 계신 겁니다.”
하하. 이거 쑥스럽네.
과거 왕들이 왜 간신들의 달콤한 말에 놀아났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것만 같았다.
-다다다닷!!
“야! 임시현!!”
누군가 나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빠르게 달려왔다. 여기서 만나는 네 번째 지인, 바로 서예린이었다.
그녀는 내 앞에 도착하자마자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집정관? 그거 정말로 너야?”
“숨 좀 쉬고 말해. 그러다 숨넘어가겠다.”
내 딴에는 생각해서 한 말인데.
서예린은 딴소리하지 말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끄응…… 태호랑 세희한테 들었어?”
“그래. 둘이 완전히 넋이 나가서 오더니. 횡설수설 네 이야기를 하더라고.”
“둘은 지금 어디있는데?”
“우리 길드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대기하는 중이지. 곧 균열이 열릴 시간이니까.”
“너는?”
“대충 화장실 핑계대고 잠시 빠져나왔지.”
나의 어처구니없는 표정에도 그녀의 당당한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네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 그렇잖아. 왜 내 전화 안 받아!”
“미안. 중요한 자리여서 전화를 못 받았어.”
나는 지휘부 막사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서예린은 지휘부 막사를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저기에 있었던 거야? 길드장 아저씨도 만났겠네?”
“응. 자리가 자리인 만큼 제대로 인사는 못 나눴지만.”
막사 안에서는 아직 추가적인 회의가 더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진짜 어떻게 된거야?”
“일단 두 사람이 한 말이 맞아. 어떻게 하다 보니까 임시로 집정관이라는 직책을 맡게 됐어.”
이번에는 서예린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야. 듣기로는 천족들이 네 앞에서 쫙 무릎을 꿇었다며!”
“나도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냐. 지금 다 설명하기에는 너무 긴 이야기니까. 나중에 설명해 줄게.”
서예린은 슬쩍 뒤에 눈길을 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그럼 저기 뒤에 계신 분들도 네 부하야?”
“아냐. 일을 도와주시는 것뿐이야. 물론 형식상으로는 내가 더 높은 위치긴 하지만…….”
“와아…… 너 진짜 대단하다.”
진심으로 감탄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서예린과 대화에 집중하는 사이.
안드라스가 헛기침을 하며 슬쩍 끼어들었다.
“흠흠. 시현 님. 잘 아시는 분이신 것 같은데.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죠. 여기는 옆집에 사는 ‘서예린’이에요. 같은 길드에 소속되어 있고,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리안 씨는 예전에 몇 번 만나신 적 있죠?”
“네. 오랜만이네요. 예린 씨.”
“반갑습니다. 저는 시현 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 ‘안드라스 리드넬 슈나르페’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서예린이라고 합니다.”
서예린은 뒤늦게 조신한 척을 하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뒤이어 아슈미르와 키르웬과도 인사를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