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농장에서 힐링하는 법 419화
균열과 꽃놀이(5)
하늘에 열린 균열들은 고장 난 수도꼭지가 물을 쏟아내듯 괴수들을 토해냈다.
토벌대의 지휘자들은 현 상황에서 대응이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빠르게 전원 퇴각 준비 명령을 내렸다.
그중 가장 경험이 많은 가디언즈 길드장, 강희섭은 길드원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독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전황을 살피며 퇴각 경로를 찾았다.
최정예가 모인 만큼 토벌대는 아직 단단하게 전열을 유지 중이었지만, 본격적인 퇴각이 시작되면 지금의 진형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는 건 당연한 일.
다른 길드의 지휘자들도 이 사실을 잘 알기에 아주 신중해졌다.
그리고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하는 일에 선뜻 자기 식구를 내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강희섭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길드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이마에 땀이 흥건해질 정도로 두뇌를 쥐어짜 작전을 구상했다.
그때.
-펄럭!
-휘이이이익!
그의 머리 위로 날갯짓 소리와 함께 크게 바람이 일었다. 먼저 퇴로를 뚫던 천족들이 다시 전장 한가운데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천족이 왜 돌아오는 거지?’
강희섭이 머릿속으로 의문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옆에서 뾰족한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악!!”
“예, 예린 누나?? 갑자기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란 남진혁이 서예린에게 물었다.
“은율이가 왜 저기 있는 거야?!”
“은율이가 여기 왜…… 헉?!”
두 사람은 어딘가를 응시하며 귀신이라도 본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강희섭의 고개도 그곳을 향해 돌아갔다.
“저건……?”
괴수들이 판치는 살벌한 전장 한가운데에 귀여운 여자아이와 아기 마수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너무나도 기묘한 광경에 강희섭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두 눈을 비볐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귀여운 여자아이와 아기 마수들은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행동만 더 또렷하게 보일 뿐이었다.
“……꽃?”
아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여지없이 예쁘고 생생한 꽃이 피어났다.
조금 전까지 퇴각로 살피는 데만 집중한 탓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미 꽤 넓은 면적이 알록달록한 꽃밭으로 변해 있었다.
강희섭은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어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사이 옆에서는 남진혁과 정태호, 윤세희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너희들 지금 어디 가려고?”
“죄송해요. 아저씨를 도와야 할 것 같아요.”
“아저씨도 가디언즈 길드 소속이잖아. 우리가 도우러 가야지!”
“길드장님이 퇴각 명령 내린 거 잊었어? 토벌대 전원이 후퇴하는데 어딜 남겠다는 거야?”
남진혁의 설득에도 두 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저씨는 분명 무슨 생각이 있을거에요. 진혁 오빠도 이대로 아저씨를 두고가기 싫잖아요.”
“그, 그건 그런데…….”
“저기 봐. 천족들도 돌아왔잖아. 분명히 이 균열을 막아낼 방법이 있는 거야.”
억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막연한 믿음.
우습게도 서예린과 남진혁은 두 사람의 근거 없는 주장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들도 임시현이 해낸 놀라운 일들을 직접 눈앞에서 목격한 산증인이었으니까.
서예린과 남진혁도 임시현을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다른 가디언즈 길드원들 생각에 쉽사리 나설 수 없었다.
이렇게 급한 상황에 주요한 전력 이탈은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멍하니 꽃밭을 지켜보던 강희섭에게 친분이 있는 길드 대표가 찾아왔다.
“강희섭 길드장, 얼른 퇴각을 시작하지 않고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이미 토벌대 전원이 퇴각을 시작했네.”
그의 말대로 이미 다른 길드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얼른 우리 길드와 함께 퇴각하세. 우리끼리 힘을 합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걸세.”
“…….”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괴수들이 천족이 있는 방향으로 몰려들고 있어. 괴수가 천족을 노리는 지금이 빠져나갈 기회야!”
“……!!”
약간 멍해 있던 강희섭의 눈동자에 안광이 번뜩였다. 동시에 얼굴에는 결연함이 맴돌았다.
“천족을 노리는 게 아닙니다.”
“뭐?”
“괴수들은 천족을 노리는 게 아니라. 천족이 지키고 있는 저 꽃들을 노리는 겁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린가?”
강희섭은 하늘을 손으로 가리켰다.
“균열이 더는 커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원리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저 꽃이 균열의 확장을 억제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그걸 확신하는 건가?”
“괴수들의 목적은 오로지 균열의 확장입니다. 지금 괴수들의 움직임을 보십시오. 저희들은 철저히 무시하고 꽃밭을 향해 달려들고 있습니다. 저놈들은 토벌대 전체보다 저 꽃밭이 더 위험요소라 판단한 겁니다.”
“흐음…….”
길드 대표는 강희섭의 설명에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이 가진 상식으로는 전혀 말이 안 되지만,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뭘 어쩌려는 건가?”
대답이 두렵기라도 한 듯, 질문을 던지는 그의 목소리에 떨림이 가득했다. 우려한 대로 강희섭의 얼굴에는 결연함을 너머 비장함이 맴돌았다.
“적의 약점을 찾았는데 그냥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천족이 버티고 있는 전장으로 합류할 겁니다.”
“자, 자네 정말 미친 건가? 불확실한 가능성에 자네 길드원 모두의 생명을 걸 생각인가?”
“그럼…… 여기서 도망치면 확실한 가능성이 생깁니까?”
강희섭은 싸늘한 목소리에 길드 대표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나라의 최정예 전력을 모은 토벌대입니다. 피해를 감수하고 후퇴해 전력을 보존한다 한들, 이만한 전력을 다시 모으는 건 불가능합니다.”
“…….”
“2차 토벌대를 꾸린다고 하더라도 전력은 불완전해지겠지요. 그 불완전한 토벌대로 저 괴이한 균열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끄으응…….”
길드 대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 떠밀려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불확실한 가능성이 아니라. 마지막 가능성일지 모릅니다. 저는 마지막 희망에 걸어보겠습니다.”
“……자네의 뜻은 잘 알겠네.”
다시 고개를 든 길드 대표의 얼굴에 흔들림이 사라졌다.
“그럼 우리도 가디언즈 길드와 함께하겠네.”
“감사합니다.”
“대신 자네가 우리 길드의 지휘를 맡아주겠나? 나는 그동안 후퇴하고 있는 길드들을 설득해 보겠네.”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짧게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으으으음-!”
집중하는 은율이 앞에 빛무리가 모였다.
따스한 기운을 가득 담은 빛무리가 땅속으로 스며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꽃들이 쏙쏙 모습을 드러냈다.
-뿅! 뿅!
-뿅! 뿅!
“됐다!”
“은율아, 괜찮아?”
“응. 괜찮아. 헤헤!”
은율이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피로가 엿보였다. 주변에 꽃향기가 진동할 정도로 꽃밭을 만들어 냈으니 당연히 피곤할 수밖에…….
주변에서 아이들이 기운을 나눠주고 있지만, 은율이는 그 이상으로 꽃밭을 만들어 냈다.
덕분에 차원의 비틀림이 줄어들어, 더는 균열이 늘어나지 않았다.
‘여우신! 얼마나 더 꽃밭을 만들어야 해? 이 정도면 충분한 거 아냐?’
-으음…… 아직 부족해. 아직 균열을 봉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균형이 맞춰지지 않았어.
‘으으. 이러다 우리 은율이 쓰러지겠어!’
-나, 나도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저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나는 안타까움에 은율이의 몸을 꽉 붙잡았다.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조금이라도 힘을 아낄 수 있게 옆에서 부축해 주는 것뿐이었다.
은율이가 힘겹게 꽃밭을 늘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쏟아지는 괴수들 속에서 키르웬을 필두로 한 천족들은 필사적으로 꽃밭을 지켜냈다.
리아네와 아슈미르, 엘프리드도 꽃밭 보호에 힘을 쏟았고. 치즈도 오랜만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괴수 무리를 휘저었다.
그중에 가장 처절해 보이는 사람은…….
“으아아악!! 카, 카네프님! 적당히. 제발 적당히 해주십시오!!”
카네프의 뒤처리를 맡은 안드라스였다.
지금 카네프가 보여주는 모습은 한 마디로.
천재지변!
그에게 거스를 수 있는 생명체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은율이가 만든 꽃밭은 벌써 괴수들에게 짓밟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안드라스는 천재지변의 작은 여파를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떨어지는 아티팩트들을 보며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겠지…….
이런 카네프의 활약에도 상황은 어렵게 흘러갔다.
그가 천재지변급 실력을 보여주는 거라면, 하늘 위에 가득한 균열 역시 천재지변급 재앙이었다.
그나마 꽃밭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었던 건, 후퇴하던 길드들이 하나둘씩 돌아와 힘을 보태줬기 때문이다.
“아저씨, 우리 왔어요!”
“비켜, 비켜! 아저씨가 하는 일 방해 말라고!”
“태호야, 세희야!”
정태호와 윤세희에 이어 서예린과 남진혁도 모습을 보였다.
“은율아, 언니 왔으니까 걱정마! 내가 끝까지 지켜줄게!”
“형. 나중에 다 설명해 줘야 해? 오늘은 진짜 끝까지 남아서 들을 거야!”
마지막으로 강희섭 길드장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꽃밭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간이 없으니 딱 하나만 물어보겠네. 이 꽃밭을 지키면 저 균열들을 막을 수 있는 건가?”
“…….”
그는 간절함이 담긴 눈으로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망설였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막을 수 있어요.”
“그거면 충분해.”
강희섭은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서 전장으로 향했다.
가디언즈 길드와 후퇴하던 몇몇 길드가 다시 합류하면서 꽃밭을 지키는 방어벽이 더욱 두꺼워졌다.
반면에 괴수들은 어떻게든 꽃밭을 망치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지키기 위해 한발도 물러설 수 없는 자와 어떻게든 상대를 짓밟기 위해 뚫어내려는 자. 전투의 양상은 완전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나는 멀리서 치열한 전투를 바라보며 간절히 빌었다.
조금만 더 괴수의 공격을 버텨주기를…….
그리고 은율이가 무사히 일을 끝마쳐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