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마력
시녀장 일리아나는 티아벨에게서 무덤을 청소하는 기특한 스몰 워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들 꺼리는 무덤 청소를 맡다니… 어떤 아이였니?”
“네! 48,726, 궁금한 게 많은 아이였어요.”
“그렇구나.”
티아벨과 일리아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여왕 페르가 끼어들었다.
“그 녀석, 불량 개미야!”
“정말요?”
“확실해. 처음 봤을 때부터 페로몬이 이상했거든… 케어, 너도 감정해 봤으니 알 거 아니야?”
여왕 케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확실히… 지능과 정신이 이상하게 높았어.”
“거 봐. 케어도 이상하다고 하잖아. 분명히 진화할 수 없는 불량 개미가 맞아.”
페르의 호언장담에 티아벨이 의기소침해졌다.
“무덤지기가 생기나 했는데… 아쉽네요.”
***
무덤으로 돌아간 나는 사체 속에서 살점을 뜯어내 액화시킨 뒤 섭취했다.
내 이론대로라면 생존에 필요한 것보다 많은 영양을 섭취했을 때 마석이 만들어질 것이고, 그와 동시에 진화를 이룰 게 분명했다.
수일간 무덤의 사체에서 영양을 충분히 빨아 먹었다.
온몸의 힘이 조금씩 강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긍정적인 신호에 힘입어 무덤의 사체를 모두 녹여 먹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무덤의 사체가 동났지만, 나는 진화하지 못했다.
‘설마 섭취량이 부족한 건가?’
다른 개미들과 비교해 과할 정도로 영양을 섭취했는데도 진화하지 못하다니.
‘진짜 복불복은 아니겠지?’
간혹 섭취량이 충분치 않음에도 진화하는 스몰 워커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내 가설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지했다.
‘단순히 먹기만 해선 진화할 수 없어. 다른 조건이 있을 거야.’
그러나 마땅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개미는 활동하는 만큼 수명이 줄어든다.
나는 절전 모드로 활동량을 최소화한 채 무덤에 버려지거나 직접 찾아와 죽음을 맞이하는 개미를 먹이 삼아 나날이 강해졌다.
‘예전보다 강해진 건 확실한데…….’
태어났을 때보다 세 배는 더 강해졌지만, 이미 수명의 삼분의 이를 보낸 상황이었다.
‘확률에 기대고 있을 수만은 없어. 방법을 찾아야 해! 아, 혹시 마석을 복용하면 진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스몰 워커와 빅 워커의 결정적인 차이는 몸의 크기와 마석의 유무다.
마석을 먹으면 강해진다는 건 괴소문에 불과하다지만, 이게 개미족이 축적한 에너지라면 분명 진화에 영향을 미칠 터였다.
‘안정성을 높여 복용해 보자!’
독약에도 치사량이라는 게 있다.
뭐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으면 살 수 있으니, 치사량 이하로 먹으면 된다.
‘문제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 있다는 거지.’
충분한 효과를 얻기 위해 양을 줄이지 않은 채 안정성만을 높일 방법을 생각해냈다.
‘애벌레의 소화액을 이용해 보자!’
자연 속 곤충 개미는 자신의 위산으로 녹이기 힘든 물질을 애벌레에게 먹인 뒤, 애벌레가 소화한 걸 토하게 만들어 섭취하기도 했다.
이는 유충인 애벌레의 위산이 성충 개미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운 나는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먼저 조그만 마석을 턱으로 집어 단단한 광물에 비볐다.
그러고는 떨어지는 마석 가루를 입안에 넣어 영양과 섞었다.
마석이 섞인 영양을 사교위에 채운 후 유충방으로 갔다.
나는 충분한 영양을 머금지 못한 애벌레를 찾아 다가갔다.
그런데 마석 섞인 영양을 먹이려 하니, 갑자기 스몰 워커 하나가 다가와 내게 말했다.
“나… 애벌레 담당 보모. 내가 먹이고 바른다. 다른 곳 가라.”
“잠시만. 애벌레한테 이것 좀 먹이고 갈게.”
“내가 먹인다. 이거 내 일. 넌 다른 일 해라.”
개미족은 매우 맹목적인 일 중독자들이어서 일을 뺏는 걸 싫어했다.
반대로 일을 떠넘겨 주면 무척 좋아해서 그동안 편하게 이용해 왔는데, 이번에는 그들의 습성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애벌레 밥 먹여 주는 것조차 경쟁하게 생겼군.’
말로 양해를 구해 봤지만, 실패해서 힘으로 밀어내 버렸다.
일을 빼앗긴 스몰 워커가 슬퍼하며 다른 곳으로 가자, 유충방을 책임지는 네트리가 날 불렀다.
“오랜만이구나. 임시 이름은 얻었느냐?”
“네. 48,726이라 불리고 있어요.”
네트리는 날 측은하게 내려다봤다.
“일을 찾지 못했나 보지?”
“네?”
“그래도 어린 스몰 워커의 일을 뺏으면 안 된단다.”
네트리의 눈에는 내가 저렙 필드로 돌아와 사냥감을 독식하는 나쁜 개미로 여겨진 것 같았다.
“죄송해요. 일은 빼앗지 않을게요.”
네트리는 내게 위쪽 통로에서 할 수 있는 식량 운송 일을 권했지만, 출입구와 통로 쪽에는 이미 잉여 개미들이 가득해 경쟁이 치열했다.
“제가 필요한 게 있어서… 여기 좀 있다가 가도 되죠?”
“아이들의 일만 뺏지 않는다면 괜찮단다.”
네트리의 허가를 받아 유충방에 머물며 페로몬을 뿌렸다.
“소집. 소집. 잠시 모여 주길 바람.”
아직 진화하지 못한 나의 페로몬 영향력은 약했다.
페로몬을 한참 동안 뿌려 갓 태어난 신입 개미 두 마리를 겨우 소집할 수 있었다.
“너희들에게 시킬 일이 있어.”
“일! 일!”
개미들이라 그런지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나는 그들에게 마석 섞인 영양을 나눠 주며 말했다.
“이걸 담당 애벌레에게 먹여. 그리고 소화한 영양을 토해 내게 해. 그걸 내게 전해 주면 돼. 쉽지?”
“애벌레. 토. 어떻게?”
“영양을 가득 밀어 넣고 배를 누르면 토하니까…….”
“영양. 부족.”
“걱정하지 마. 영양은 내가 공급해 줄 테니까.”
신입 개미 둘에게 지시를 마치고 마석 섞인 영양을 마우스 투 마우스로 전달해 줬다.
“내가 준 영양은 너희가 흡수하지 마. 아플 수도 있으니까.”
“알겠어.”
신입 개미들이 지시에 따라 애벌레에게 마석 섞인 영양을 먹였다.
나는 한동안 애벌레의 상태를 지켜봤고, 이상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대로야.’
애벌레들은 마석 가루를 소화하여 흡수하기 시작했다.
부작용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애벌레에게 주입할 영양을 네트리에게 요청했다.
“흠… 알겠다. 저 아이들에게 충분한 영양을 내주마.”
“감사합니다.”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네트리의 협조를 얻어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화된 마석이 함유된 애벌레의 토사물을 전달받았다.
마우스 투 마우스로 전해진 애벌레 표 영양액을 받아먹으며 개미 사회에 특허란 개념이 없다는 걸 아쉬워했다.
‘좋아. 이대로 소화해서 흡수해 버리자.’
나는 같은 방식으로 여러 차례 마석을 흡수했다.
마석 제조에 쓰인 두 애벌레 중 한 마리는 특별한 번데기가 됐다.
“임시 보모 개미가 스몰 솔져를 키워 내다니….”
네트리와 전문 보모 개미들이 놀라워했지만, 나로서는 예상한 상황이었다.
‘개미족은 똥을 싸지 않아. 필요 이상으로 섭취된 열량을 세포에 저장했다가 진화란 과정을 거쳐 가슴 쪽에 마석을 형성하는 거야.’
“보모 수가 애벌레 수보다 많다. 일이 부족하다. 나 조금 전에 태어났으니 여기서 일 배운다. 일 충분히 배운 선배들은 다른 곳 가라. 나도 금방 따라간다.”
솔져가 되지 못한 워커 또한 평범하진 않았다.
그는 뛰어난 페로몬 언어를 구사해 선배 개미들을 유충방 밖으로 보내버리더니 일감을 독차지했다.
‘페로몬 능력과 지능이 강화된 개체야.’
그들을 통해 마석 가루가 애벌레에게 주는 영향을 파악했지만, 여전히 난 진화를 이루지 못했다.
‘왜지? 왜 진화를 하지 않는 거지?’
마석 섭취로 나날이 강해져 온 나는 같은 스몰 워커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그뿐.
이대로 진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곧 수명이 다해 죽는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진화가 먼저인지 마석이 먼저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
몸 안에 마석이 있다면 그건 진화를 했다는 뜻이니까.
‘살려면 체내에 마석을 만들어야 해!’
무덤에서 세포에 축적된 에너지를 한곳에 모을 방법을 고심하다가 호흡과 명상에 집중했다.
개미들은 폐호흡을 하지 않는다.
표피에 있는 기문이란 구멍들로 호흡했다.
고생대에는 거대 곤충이 존재했지만, 산소량이 차츰 떨어지던 중생대에 들어서자, 곤충의 호흡 기관으론 거대한 신체에 산소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어 작아졌다는 설이 있었다.
즉, 지하에 사는 개미족이 거대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충분한 산소를 흡입해야 한다.
그런데 이곳의 자이언트 워커들은 지상과 가까운 통로보다 지하 깊은 곳을 더 선호했다.
이상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지상 쪽 산소량이 더 높을 텐데?
큰 몸집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산소를 대체하는 뭔가가 지하에 있다는 건가?
기문을 여닫기를 반복하여 호흡에 집중했다.
호흡량을 차츰 늘려가자, 뭔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거다!’
미세한 입자가 호흡을 통해 흡수되고 있었다.
공기 중 입자를 느끼는 제6의 감각이 열린 후 무아지경으로 호흡에 집중했지만, 아쉽게도 배는 채워지지 않았다.
‘먹어 가면서 하자.’
다행히도 이곳은 무덤이라 주기적으로 개미 사체가 들어왔다.
나는 매번 거부감에 저항하면서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투명한 체액은 빼내서 한곳에 모아 두면 금세 증발했고, 부드러운 살점을 녹여 먹었다.
먹을 수 없는 외골격과 마석은 단단한 광석에 비벼 가루를 얻었다.
그 가루는 다른 영양과 섞어 유충방에 가져갔다.
“48,726이 일을 가져왔다.”
“고맙다 48,726. 항상 일 시켜 줘서.”
“엇… 그래.”
고정 보모로 승급한 스몰 워커 둘에게 도움을 받아 외골격 가루와 광석 가루를 애벌레에게 먹였다.
“여기!”
“네가 주문한 토사물.”
애벌레가 액화시킨 외골격과 마석 토사물은 다시금 내게 돌아왔다.
‘잘 만들어 졌어.’
전생은 인간이었지만, 현생은 개미인지라 애벌레 토사물을 받아먹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마석 가루로 만든 애벌레 영양을 흡수하면 미약하지만 힘이 강해지는 것 같았고, 외골격 가루로 만든 애벌레 영양을 흡수하면 외골격이 단단해졌다.
시간이 흐르자 입자를 느끼는 감각에도 변화가 생겼다.
기문 근처에서만 겨우 느낄 수 있었던 입자가 외피에도 붙어 있다는 게 느껴졌다.
며칠 더 흐르자 신체 내부에도 입자가 있음을 느꼈지만,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이미 진화한 개미들도 같은 감각을 느끼는지 궁금하여 시녀 개미 티아벨을 찾았다.
“혹시 입자를 느끼나요?”
“입자? 음… 아! 마력을 말하는 거니?”
“마력이라 하는군요.”
“나 같은 2차 진화종 개미는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기도 해. 보통 빅 워커는 되어야 느낄 수 있는데, 넌 신기하네. 불량이라 그런가?”
“불량이요?”
티아벨은 급히 말을 돌렸다.
“아… 아니야.”
마력에 대해 말해 주던 티아벨이 더듬이로 날 더듬어 보더니 말했다.
“그런데 너, 냄새가 지독해.”
“그건 무덤 냄새라 어쩔 수 없어요.”
“그렇긴 하지.”
무덤에서 배인 죽음의 냄새 때문인지 산란방의 시녀들은 날 피했다.
그나마 티아벨만이 날 환영했고, 가끔 시녀장 일리아나도 내게 관심을 보였다.
“요즘 무덤은 어떠니?”
“항상 똑같아요.”
동족 포식으로 연명해 와서 켕기는 게 있던 나는 시녀장 일리아나의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우려한 일은 없었다.
“모두가 꺼리는 무덤을 청소하고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양질의 영양을 유충방에 전했다지?”
일리아나가 날 치하해 주며 페로몬을 발라 주자, 죽음의 냄새가 옅어졌는지 스몰 워커인 하녀 개미들이 다가와 영양을 나눠 줬다.
“무덤 청소라니. 대단해요!”
“영양은 어디서 구하는 거예요?”
꼬마 개미들이 날 떠받들어 주자 살짝 쑥스러웠지만, 개미가 되고 나서부터 감정이 옅어졌는지 쑥스러움은 금세 가시고 차가운 이성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딱딱한 말투의 페로몬 언어를 뱉어 냈다.
“무덤 청소는 어렵지 않아. 거부감만 저항하면 돼. 영양을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나는 여왕 페르, 포스, 케어를 살피며 꼬마 개미들에게 거부감을 무시하는 노하우를 알려 줬다.
내 노하우에 관심을 보이던 케어가 아이들을 물리고 다가왔다.
“본능을 극복한 것이냐?”
“네.”
“대단하구나.”
인사차 페로몬을 교환하며 나를 유심히 살피던 케어가 내려다보며 안쓰러워했다.
“넌 다른 스몰 워커보다 월등한 능력을 갖췄는데, 진화하지 못했구나. 남은 시간은 하고 싶은 걸 하며 지내렴…….”
케어가 시한부 선고를 내리듯 한 말에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대로 포기할 만큼 난 나약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진화해 보이겠어!’
각오를 다지는 내게 케어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 줬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