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갑각충의 선물
사람을 보면 기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양 소재로밖에 느껴지지 않아.’
뭐랄까, 전생의 경험과 지식만 온전할 뿐, 감각적인 부분이 비틀려 있었다.
‘받아들여야겠지.’
개미족은 뛰어난 기억력과 계산 능력을 가졌지만,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런 특성 덕분인지 개미가 됐다는 현실도 수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지금의 나는 인간의 기억을 가진 개미족.
그러니, 더는 인간을 사람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인간! 난 개미족의 다크다.”
처음 본 인간 여자에게 페로몬 언어로 인사해 봐야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이곳 세상에서 처음 본 인간 여자는 왜소하고 서구적인 외향을 띄었고, 상태가 몹시 안 좋았다.
‘배가 불러 있어.’
전신의 멍과 퀭한 눈.
삶에 대한 의욕이 없는지 개미족에 들려 이동되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종교배의 희생자군.’
여자의 배만 봐도 고블린들에게 잡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훤히 보였다.
임산부의 배 안에선 탐욕스러운 고블린들이 영양을 갈취하며 자라고 있을 테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으면 출산과 함께 영양 고갈로 인해 싸늘한 시신이 되어 새끼 고블린들의 첫 끼 식사가 될 것 같았다.
거기다 더듬이 감각에 잡힌 인간은 먹기 좋고 부드러운 살코기에 불과했으니… 내가 따로 보호하지 않으면 여왕의 특식으로 올려질 상황이었다.
그녀가 여왕의 특식이 되더라도 자연의 섭리에 따른 것이겠지만, 인간의 유용성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크리.”
“네, 다크 님.”
“저 인간은 따로 관리해.”
“네?”
“한동안 보호해 주라는 이야기야.”
나는 세크리에게 공사 개미의 협력을 받아 인간 전용 감옥을 만들게 했고, 충분한 영양이 배급되도록 말 잘 듣는 하녀 개미를 배정했다.
토벌, 토벌, 토벌.
반복된 고블린 토벌로 며칠을 보냈더니 어느새 포기한 영역을 모두 회복했다.
하지만 고블린이란 위험 요소를 제거하니 사냥감이 부족해졌다.
멀리까지 오가며 사냥하는 건 비효율적이어서 한동안 휴식기를 갖기로 하자,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기의 시작으로 한동안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나는 무덤에서 늘어난 마력을 순환시키며 제어력을 키워 갔다.
그러던 중 키카를 비롯한 암컷 고블린들의 배가 불러오며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배가 불러온 고블린들은 영양이 부족한지 평소보다 먹는 양이 몇 배 더 늘었다.
키카와 고블린들이야 개미들이 먹지 않는 흑태나 내장을 주면 됐지만, 인간은 입이 짧아서 힘들게 생산된 버섯 영양을 강제로 주입해 줘야 했다.
이를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개미들이 많았지만, 겨울용 비상식량을 겸한 연구 표본이란 명목으로 불만을 억누르는 한편, 여왕 케어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연구 표본으로써의 보호를 신청해 뒀다.
“인간이라… 우리 스마트 워커와 매우 가까운 생물이니 한동안 관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관리는 다크, 네게 맡기마.”
“감사합니다.”
케어의 허가가 떨어지면서 인간은 개미족의 정식 보호종이 됐지만, 보호종이 되지 못한 암컷 고블린은 내가 조금만 신경을 못 써도 해체대로 끌려갔다.
고블린의 임신 기간은 매우 짧다.
약 10~20일.
배가 불러오면 출산까지 며칠 걸리지 않으며, 세 마리에서 아홉 마리씩 태어난다.
인간부터 시작해 암컷 고블린들이 하나둘 출산하기 시작했다.
한 차례 출산 폭풍이 지나가자 50여 마리의 새끼 고블린이 탄생했다.
‘성비가… 심각하네.’
50마리 새끼 중 암컷은 단 1마리뿐이었다.
임신 기간에 고품질 영양을 충분히 제공해 줬고, 산란방의 시녀 개미들이 출산을 도운 터라 출산 중 사망자는 없었다.
한동안 내 직속 하녀들이 인간 산부와 암컷 고블린의 산후조리를 지원했다.
암컷 고블린의 회복은 빨랐지만, 인간의 회복은 매우 느렸다.
‘이러다 죽겠는걸…….’
죽어 가는 인간을 치료실로 데려왔다.
“외상은 다 나았어요. 지금은 치유액을 희석한 영양을 먹이고 지켜봐야할 것 같아요.”
“그러자.”
나와 포션 워커인 메디의 극진한 보살핌 끝에 인간은 위험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인간의 몸은 회복세에 들었지만, 정신 쪽은 멀쩡하지 못했다.
‘이것도 PTSD인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대표적인 증상인 발작은 없었지만, 심각한 우울증 증상이 보였다.
‘이상하네… 인간을 보호한 후로부터 마력 흡수량이 늘었어.’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지만, 인간과 한 공간에 있으면 마력이 급증했고, 인간이 나와 함께 있을 때는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
‘설마…….’
블랙 워커가 축적하는 건 어둠 속성 마력.
줄여서 흑마력.
흑마력이 부정적인 사념과 관계된 것이라면…….
‘내가 인간의 불행을 흡수하는 건가?’
한동안 인간을 무덤에 두고 보호 감찰했다.
가끔 밥을 굶겨 보기도 하고 겁을 줘 보기도 했다.
예상대로 인간이 느끼는 공포감, 불안감, 우울감, 분노 등이 감미로운 양식처럼 내게 흡수됐다.
‘미쳤군.’
개미들은 일만 있으면 행복했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을 모르는 존재.
즉, 인간이야말로 내게 필요한 흑마력을 무한히 생산하는 생산 공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좀 더 많은 사람을 확보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내가 쉬는 동안 개미족의 인구는 급증했고, 고블린 사냥으로 얻은 풍부한 영양 자원 덕에 1차 진화종인 빅 워커도 늘어났다.
성체가 된 새끼 고블린은 출입구 인근의 해체 개미들에게 보내졌고, 시간이 흘러 우기가 끝나자 비가 멈췄다.
비는 멈췄지만, 질퍽한 땅에선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어 한동안 사냥은 없었다.
땅이 마르자 사냥 개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정찰 부대와 사냥 부대를 정비하여 밖으로 나갔다.
자연의 회복력과 고블린의 번식력은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며칠 쉬었을 뿐인데 고블린을 비롯한 사냥감이 급증해 있었다.
‘고블린 놈들!’
북쪽을 청소하자는 일념으로 고블린 사냥에 힘썼다.
무장 고블린이 서른 마리 이하인 촌락과 동굴은 적당히 지켜보다 급습했다.
야행성인 고블린은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매우 피곤해했기에 그 시간을 적극 활용했다.
규모가 큰 촌락과 동굴은 주변을 맴돌며 돌려 깎기를 하듯 사냥 나온 무장 병력을 차츰 줄인 후 충분히 괴롭혔다고 판단될 때 급습했다.
사냥 패턴이 정형화되자 지휘권을 피어레스에게 넘겼다.
“포위! 돌격!”
단단한 외골격을 믿고서 맹렬히 밀어붙이는 피어레스의 전투방식은 무식하면서도 강렬했다.
피어레스는 솔져 특유의 전투 페로몬으로 집단 전투력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집단 전투력이 일시적으로 증가하는 만큼 개미들의 체력 소모가 가속됐다.
“피어레스, 웬만해선 전투 페로몬 뿌리지 마.”
“…알겠다.”
북쪽 깊숙이 들어갈수록 무장 고블린 백 마리를 넘어가는 촌락과 동굴이 많아졌다.
규모가 큰 촌락과 동굴에는 인간 여자가 잡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인간 여자의 구조와 고블린 암컷과 새끼의 생포.
내 흑마력과 둥지를 동시에 성장시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일이였다.
차츰 늘어나는 암컷 고블린들에게 가죽을 맡겼더니, 저품질의 가죽 제품들이 생산됐다.
‘무두질 정도는 제대로 해 줬으면 좋겠는데…….’
가죽 제품은 개미족에게 필요 없는 물건이었지만, 인간과 고블린의 지하 생활에 큰 힘이 됐다.
구조한 인간은 모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관리가 힘들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고 무덤 옆에 인간 전용 감옥을 만들어 그녀들이 생산해 내는 칙칙한 흑마력을 흡수했다.
죽음과 절망에서 얻는 마력을 마석 가득히 쌓자, 더는 마력을 흡수할 수 없게 됐다.
‘가득 찼군.’
나는 마석에 담긴 마력을 모두 해방한 후 새롭게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니 마석 한계가 조금씩 확장됐고, 2차 진화가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한편, 개미족은 잃어버린 영역을 모두 회복하고도 좀 더 북진을 시도했으나, 다시금 우기가 시작되어 부득이하게 휴식기에 들 수밖에 없었다.
휴식기 동안 개미족 인구는 급증했지만, 그건 고블린도 마찬가지라 놈들의 멸절은 쉽지 않아 보였다.
“다크 님, 톱밥 창고가 가득 찼어요.”
“저희 농장도 한 곳 더 있으면 좋겠어요.”
둥지 전체가 고블린 토벌과 관련된 일로 바쁘게 움직일 때, 톱밥 생산 담당인 시절 솔져 나우피어는 썩은 나무나 부수며 달콤한 나날을 보냈고, 버섯 농장의 머쉬파도 평화를 만끽했다.
‘톱밥 생산과 버섯 농장도 안정됐으니 슬슬 생산량을 늘릴 때긴 해.’
이참에 생산 부서인 두 곳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기로 했다.
톱밥 생산처와 버섯 농장에 각각 125마리의 스몰 워커를 채용했다.
톱밥 생산처의 스몰 워커는 턱의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 무한 믹서기 역할로 굴려졌고, 버섯 농장의 스몰 워커에게는 살인적인 노동량을 선사하여 미니 워커로 진화할 수 있는 고속 레일을 깔아 줬다.
추가된 스몰 워커의 진화 타이밍에 맞춰 톱밥 생산처와 버섯 농장 네 곳이 추가로 건설되도록 계획했다.
‘버섯 농장을 다섯 군데 정도 더 굴리면 자급자족할 수 있겠지.’
우기가 끝나갈 때 쯤 톱밥 생산처와 창고가 하나둘 추가됐다.
톱밥을 생산하는 만큼 버섯의 산출량도 증가할 것이고, 나의 영양 주머니도 두둑해질 전망이었으나…….
[비상! 비상! 침입자 발생! 전투 가능한 개미는 모두 4번 톱밥 창고로 소집 바람!]
어떤 미친 녀석이 톱밥 창고의 환풍구를 통해 둥지 내부로 침입했다.
개미족의 본능대로 침입자 제거를 위해 열심히 달려갔다.
도착하고 나서야 아차 했다.
‘너무 일찍 도착했잖아!’
현장에선 나우피어가 이끄는 수십의 시절 워커가 자이언트 워커보다 훨씬 큰 거대 풍뎅이와 대치 중이었다.
‘체급 차가 너무 커.’
시절 워커들도 그걸 아는지 쉽사리 덤비지 못했다.
“다크님… 저건 갑각충이에요. 자이언트 솔져보다 훨씬 강한 녀석이라 총력을 쏟아야 겨우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나우피어가 상대 측 전력을 알려 주며 뒷걸음쳤다.
“야, 넌 어디가?”
“그게…….”
“도망가지 말고 내 옆이나 지켜.”
“네….”
나우피어를 다독인 후 갑각충이라 불린 거대 풍뎅이를 관찰해 봤다.
‘머리 모양을 보면 암컷 같은데… 너무 단단하게 생겼어. 관절 이음새를 노린다 해도 틈이 너무 작단 말이지. 이건 해체 전문 개미들이 도와야겠는데…….’
갑각충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일단 둥지 내에 발을 들였으면 살아선 절대 못 나간다.
갑작스런 비상사태에 둥지의 최종 병기라 할 수 있는 자이언트 솔져들이 하나둘 모여 전투 준비를 했다.
“모두 준비해라!”
자이언트들이 어그로를 끌면 해체 전문인 시절 워커들이 이음새를 공략하기로 했다.
해체 전문 시절 워커들이 나설 때, 나우피어의 파목 부대도 나서기로 했다.
“그럼 나부터 가겠다.”
용감한 자이언트 솔져 하나가 앞으로 나서려 할 때, 갑각충 꽁무니에서 하얀 뭔가가 비쳤다.
‘알?’
나는 급히 몸을 던져 돌진하려던 자이언트 솔져를 막았다.
“잠깐! 타임―!”
나우피어와 부하들에게 지시해 뒤따르던 자이언트들을 막게 했다.
“뭐냐 너희들? 1차 진화종 주제에 2차 진화종인 날 막아? 내가 군체의 경비를 담당하는 포메온 님의 오른팔이란 걸 알고서 막아선 것이냐?”
선두에 나선 자이언트 솔져가 화를 내며 날 위협했다.
녀석이 턱으로 날 밀어 버리려던 찰나, 날 알아본 자이언트 솔져들이 말렸다.
“멈춰! 저 녀석, 요즘 유명한 무덤지기 다크야! 포메온 님도 인정한 몇 안 되는 유망주라고!”
“나무와 약초를 버섯 영양으로 바꿔 주는 녀석들도 다크 휘하예요!”
“1차 진화종이지만, 정찰 개미 50마리와 사냥 개미 100마리를 지휘하던 녀석이야!”
“케어 님이 다크의 지능은 둥지에서 9위래.”
그동안 뇌물을 받아먹던 자이언트 솔져들이 나서서 날 변호해 줬다.
“뭐? 저 녀석이 다크라고? 흠… 그동안 네가 세운 공이라면 한 번 정도는 봐 줄 수 있지.”
내 명성이 통했는지 흉흉하던 자이언트 솔져들이 진정됐다.
“그래서, 왜 막은 거지?”
“그건…….”
빈손으로 왔다면 침입자지만, 선물을 가지고 왔다면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