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온수난방
“저쪽은 싸울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우린 침입자를 제거할 뿐, 침입자의 의사는 궁금하지 않다.”
“그럼 잠깐만 기다렸다가 싸워 주세요. 기다린 만큼 저희 쪽 피해가 줄어들 거예요.”
자이언트 솔져들에게 설득이 통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투파 개미는 말이 통하지 않아!’
설득은 페이크다.
이미 부하들을 불러 바리케이드를 완성했다.
“피해가 크더라도 침입자 제거가 우선이다! 비켜라!”
“피해가 얼마나 클 줄 알고요?”
“갑각충 정도면 적어도 자이언트 솔져 셋은 희생되겠지. 하지만 관계없다. 비켜라! 난 내 역할을 다하겠다.”
“투입되는 시절 워커들의 희생은 더 클 거예요. 제 계산이 맞다면 조금만 기다리면 피해 없이 쫓아낼 수도 있어요!”
“관계없다. 비켜라!”
무의미한 논쟁을 이어 가는 사이, 갑각충이 알을 낳기 시작했다.
상황을 파악한 자이언트 솔져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고요 속에 시간이 흘렀다.
갑각충은 112개의 알을 낳은 후 힘없이 주저앉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제 말대로 피해 없이 침입자가 제거됐네요.”
“…그렇군.”
사태가 진정되자 자이언트들이 돌아갔고, 해체 전문 시절 워커들이 나서서 갑각충 사체를 분해했다.
분해된 사체에선 자이언트 솔져의 몸에서도 나온 적 없는 큰 마석이 나왔다.
‘이 정도면 중급 마석일 거야.’
빅 워커와 고블린에게서 나오는 마석은 최하급.
자이언트급에서 나온 마석은 하급.
이번에 갑각충에게서 얻은 것은 중급.
마석을 자원으로 여기는 나만의 기준이지만, 이는 개미족의 영양 평가 기준과 흡사했다.
영양 평가 기준은 나의 마석 기준보다 한 단계씩 높았다.
마석은 1차 진화를 이뤄야 생기기 때문이다.
버섯, 곤충, 작은 동식물로 만든 영양은 최하급.
뿔 토끼, 거대 쥐, 고블린, 사슴 등 단백질 풍부한 영양은 하급.
자이언트 워커급 몬스터로 만들어진 영양이 중급이라면, 갑각충의 영양은 그 이상으로 뛰어났다.
“갑각충은 상급 영양의 재료예요. 상급 영양은 모두 산란실로 보내야 해요.”
보기 드문 상급 부산물을 뒤로 꿍쳐 보려 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껍질과 마석만 겨우 쓰레기장으로 빼돌린 나는 영양화할 수 있는 부분을 운반 개미들에게 넘겼다.
영양의 재료는 포기해야 했지만, 아쉽진 않았다.
‘대박이야.’
톱밥 창고가 특정한 조건을 갖추면서 갑각충이란 거대 풍뎅이의 산란처로 쓰였고, 알에선 거대 굼벵이가 부화하여 톱밥을 먹고 자랄 것이다.
잘 키운 거대 굼벵이의 영양 품질은 못 해도 중급 이상일 테니까.
똑똑한 개미라면 키워 먹으려 할 테지만, 이곳 개미들은 알 채로 먹으려 했다.
“너희들, 멈춰!”
나는 고품질의 단백질을 한 번만 얻고 끝낼 생각이 없었다.
“잘 들어! 여긴 이제 톱밥 창고가 아니야.”
머릿속으로 굼벵이 사육장을 설계하며 앞으로도 갑각충의 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여긴 이제 갑각충의 산란처다.”
지금은 바쁜 시기라 놀고 있는 개미가 없지만, 버섯 영양을 대가로 공사 개미들을 여럿 불러와 풍뎅이가 산란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했다.
공사가 끝나기 무섭게 갑각충들이 들어와 알을 낳기 시작했고, 가끔 그대로 죽는 녀석들도 생겨 상급 부산물도 얻을 수 있었다.
대다수의 갑각충은 알을 낳고 전용 출입구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갑각충들이 낳은 알은 산란처 관리 담당으로 지정한 미니 워커가 굼벵이 사육장으로 옮겼다.
‘겨울 식량으로 사용해도 문제없겠어.’
거대 굼벵이들은 톱밥을 영양 삼아 성장하기에 들어가는 비용도 제로에 가까웠다.
세크리 휘하 빅 워커 여섯 마리와 머쉬파 휘하 미니 워커 여섯 마리에게 사육장을 맡겼다.
갑각충 산란처, 거대 굼벵이 사육장, 톱밥 생산처, 톱밥 창고, 버섯 농장, 버섯 창고 등등.
생산 시설들이 팽팽 돌아가는 동안에도 고블린 사냥은 멈추지 않았다.
예전에는 나를 중심으로 고블린 토벌 부대가 구성됐으나, 지금에 와선 자이언트 솔져들이 내 방식을 벤치마킹하여 고블린 사냥에 열을 올렸다.
정예로 활동하는 부대가 많아지면서 대여섯 개의 부대가 연합하여 무장 고블린 200마리 규모의 촌락도 손쉽게 토벌했다.
효율적인 사냥법의 확산으로 인해 둥지에는 미처 영양화되지 못한 고블린 시체로 넘쳐 났고, 종종 끌려온 인간과 암컷 고블린들이 감옥을 채워 갔다.
암컷 고블린들이야 아무거나 먹이면 되니 코스트가 들지 않고, 시킬 수 있는 일도 많아 나름 잘 부려 먹고 있지만, 인간들은 따로 써먹을 곳이 없어 곤란한 상황이었다.
‘뭘 좀 시켜야겠어.’
개미족은 일하지 않는 자에게 영양을 내주지 않는다.
이대로 인간들이 아무런 공헌을 하지 않는다면, 보호종의 위치를 잃고서 식량 창고로 보내질 상황이었다.
‘음… 그런데 무슨 일을 맡기지?’
개미족과 고블린이 불을 싫어하니, 인간에게 불과 관련된 일을 주면 좋을 것 같았다.
‘공기 순환 문제만 해결해 주면 둥지 내에서도 불을 피울 수 있겠지.’
둥지 내의 온도와 습도가 안 맞으면 버섯의 생산량이 줄어들고, 영양이 부족하면 여왕들의 산란량도 줄어든다.
즉, 겨울에도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개미족의 발전 속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빨라질 수 있다.
과거, 강남 지역에 회사 건물을 올려 관리하던 때가 떠올랐다.
‘소방, 전기, 인터넷, 수도, 환풍구, 난방까지… 귀찮은 일투성이였지.’
그에 비해 개미족 둥지는 소방, 전기, 인터넷 시설이 필요 없으니 매우 심플한 편 아니겠는가.
‘난방시설 정도는 만들 수 있겠는걸.’
톱밥 재료로 쓰이는 나무는 개미족에겐 귀중한 자원이다.
그렇기에 나무를 장작으로 활용하게 되면 소모가 너무 크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숯이 떠올랐다.
나무의 불완전 연소로 얻어지는 탄소 덩어리인 숯은 장작보다 높은 온도로 오래도록 열기를 유지하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이 높고, 일단 만들어 두면 쓰임도 다양했다.
‘일단 숯을 만들게 되면 그을음과 재도 얻을 수 있어.’
숯은 정수에도 쓰일 수 있고, 그을음은 필기도구로 쓸 수 있으며 재의 활용도 또한 높다.
게다가 열기와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는 길만 잘 설계한다면, 숯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열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어 나무 자원을 열 배 이상 아낄 수 있다.
만약 온수난방도 만든다면 효율은 더욱 높아진다.
‘습도 조정용으로 온천도 같이 만들어야지.’
여러 가지 요인을 고려해서 난방 시설, 숯 생산 시설, 온천 시설을 구상했다.
머릿속으로는 대략적인 구상을 끝냈지만, 설계도를 그릴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공사 감독은 직접 해야겠네.’
개미족의 공사야 굴을 파고 접착액으로 다지는 일이 태반이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유입되는 고블린 사체를 영양화시키느라 공사에 동원할 개미가 부족했다.
‘작업은 좀 미뤄야겠어.’
한동안 고블린 토벌에 열중해야 해서 난방 공사는 자연히 미뤄졌다.
***
개미족의 이동 속도로 반나절 거리까지 북쪽 영역을 확장했을 무렵, 다른 종족에게 토벌당한 고블린 촌락을 발견했다.
고블린의 마석, 가죽, 이빨, 뿔 등은 가져갔지만, 고기와 내장을 챙기지 않은 걸 보아 우리가 흔히 아는 숲속 포식자들이 아니었다.
‘인간들도 죽였어…….’
잡혀 온 것으로 보이는 여자는 목이 베여 있고, 암컷 고블린과 새끼 고블린은 매타작이라도 맞았는지 매우 잔혹하게 죽어 있었다.
‘이건 냉병기의 흔적이야.’
검, 창, 활 등의 흔적을 발견한 나는 인간의 짓임을 직감했다.
‘이 이상 북진하면 인간의 영역이다!’
물론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지만…….
“철수!”
호기심보단 자기 보신이 먼저였다.
북쪽 지역의 사냥감을 평정한 우리는 서쪽으로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서쪽의 고블린은 북쪽의 고블린보다 저항이 거셌다.
사냥을 통해 흑마력이 조금씩 늘었지만, 둥지에서 인간들과 함께 있는 편이 성장 속도가 더 빠른 듯했다.
“피어레스, 이쪽 사냥 부대는 네게 맡기마.”
“알겠다!”
나는 피어레스에게 사냥 부대를 맡긴 후, 난방 공사를 시작했다.
***
시간이 흘러 겨울이 찾아오자 개미족은 사냥을 멈추게 됐다.
사냥과 채집을 멈췄음에도 풍족한 식량 사정 덕에 겨울잠은 필요 없었다.
나는 고블린 토벌이 끝나고 일감이 사라진 사냥 개미들을 불러 모아 난방 공사에 투입했다.
지하 2층에 물탱크를 만들고, 2층과 3층의 벽과 바닥을 커버하는 하나의 순환 통로를 만들어 연결했다.
순환 통로는 파이프 구멍처럼 좁아 작업에는 미니 워커들이 나서야 했다.
배출구를 가열하면 뜨거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듯 가열된 물이 물탱크로 공급되고, 유입구는 물이 빠져나간 만큼 물탱크의 물을 흡입했다.
그렇게 물이 순환하며 난방이 가동되는 것이다.
물탱크와 순환 통로를 만들 때는 전도율 좋은 금속을 적절히 섞어 열효율을 높였다.
보일러의 원리만 적용하면 되는 공사라 딱히 기술이랄 게 없지만, 열효율을 감안한다면 세밀한 설계가 필요했다.
‘낭비되는 열을 줄여야 해!’
열기, 가스, 물이 흐르는 길을 정밀히 설계하여 수백의 개미를 투입했다.
숯을 생산하면서 물을 데우고, 둥지 내부 공기를 빼내는 숯 생산 시설.
난방 온도를 낮추기 위해 물탱크 물을 빼낼 때 발생하는 온천.
숯을 활용한 편의 시설로 오븐도 만들었다.
내게 스마트 워커 정도의 손재주가 있었다면 증기마저 활용할 수 있었겠지만…….
‘아쉽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온천이 생겨나면서 그동안 찬물로만 대충 씻던 인간 여자들과 암컷 고블린들이 목욕하는 빈도가 늘었다.
재밌는 건 암컷 고블린이 인간보다 더 자주 씻는다는 점이었다.
“너희들 할 일은 이거야! 오븐은 요리하거나 토기를 구울 때 쓰면 돼.”
더듬이와 앞발을 이용한 보디랭귀지는 만국 공통어였다.
인간 여자들에게는 숯의 생산과 난방, 온천의 관리를 맡겼다.
그러나 다섯 명 중 네 명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일하려 하지 않았다.
‘한 명 빼고는 움직일 생각을 안 하네.’
개미 영양을 공짜로 제공한 게 문제인 것 같아 배급되던 식량을 끊어 버렸다.
“일하면 식량을 줄 테니! 숯을 만들어라!”
먹을 게 떨어지자 두 명의 여자가 추가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꾸준한 교감 끝에 일을 맡길 수 있었다.
숯을 생산하여 난방과 온천을 관리하기 시작한 여자들에게는 가죽, 목재, 채소, 고기 등을 일당으로 지급했고, 처음부터 열심히 일한 여자에겐 넓고 쾌적한 곳에 잠자리를 마련해 줬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중에도 최소한의 식량만으로 버티려는 여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
“너희들은 왜 안 움직이는 거야?”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들이 생을 포기했다는 건 눈빛만으로도 전해졌다.
“그래, 알아서 해라.”
방치된 두 여자는 산란방으로 끌려가 산 채로 해부당하여 여왕들의 특식이 됐다.
두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지자, 살아남은 세 명의 여자는 살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했다.
세 명밖에 없지만, 모두가 열심히 일하자 난방 시설도 안정화됐다.
나는 제일 먼저 일하기 시작한 여자에게 좀 더 나은 대우를 해 주며 관심을 보냈다.
나의 관심이 권력으로 이어지며 그녀는 곧 여자들의 대표가 됐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