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창고에 가득한 영양
나는 따스한 둥지 내에서 인간 여자들과 암컷 고블린을 관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키! 키키! 카! 키키!”
처음에는 어떻게 소통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익숙해졌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말도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 여자들의 대표는 루리아라는 이름이고, 고블린의 대표는 키카라고 불렸다.
암컷 고블린의 수는 키카를 포함해 열다섯 마리.
모두 가죽옷을 입고 있었고, 돌칼과 뼈칼을 애용했다.
그들은 무덤지기인 내 밑에서 개미 해체를 돕거나, 저품질의 가죽 제품을 생산했다.
보수로는 개미족도 먹기를 포기한 음식물 쓰레기면 충분했고, 가끔 동물의 고기나 어금니를 주면 좋아했다.
고블린 가죽 공방에서 생산된 제품은 인간 여자들에게 주는 보상으로도 쓰였다.
루리아를 포함한 세 명의 여자는 주변 자원을 이용해 도구를 늘려 갔다.
나무로 만든 식기, 물통, 요강, 건조대와 흙으로 빚은 토기 등등.
여자들은 주로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지만, 가끔 나무칼이나 뼈칼 같은 무기를 만들기도 했다.
자이언트급만 되어도 콧방귀 뀔 수준의 무기들이지만, 내게는 조금 위협적일 수도 있었다.
‘압수해야 하나?’
나는 루리아와 교감을 쌓으며 무기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여러 차례 알렸다.
“너, 이거 잘못 쓰면 죽어. 관리 잘해!”
끄덕끄덕.
무기의 위험성을 인지한 루리아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날 포함한 개미족과 접촉할 때는 무기를 숨기는 등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날 두려워하고 있어.’
아직까지는 공존할 가치가 있으니 보호해 주고 있지만, 내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되면 망설이지 않고 제거할 생각이었다.
‘겨울잠을 안 자서 그런가, 요즘 들어 이상하게 피곤하단 말이지.’
인간 관리를 통해 마력을 충분히 쌓을 수 있었다.
거기다 마석을 비우고 채우길 반복하여 마력의 한계치를 수차례 확장했다.
나는 지금의 상태 이상이 진화의 징조라 여겼다.
진화를 대비하며 그동안 관계를 맺은 개미들을 둘러봤다.
“다크 님, 어디 아프신가요? 제가 치료해 드릴게요.”
“됐어. 그냥 잘 지내고 있는지 보러 온 거야.”
포션 워커 서른 마리를 이끄는 치료실의 메디는 환자가 없어 심심해했다.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부상자가 늘 텐데…….”
“어… 그러네.”
환자를 원하는 메디에게 대답해 줄 말이 없어 그냥 얼버무리고 치료실을 빠져나왔다.
빅 워커 서른 마리의 수장인 세크리는 부하 중 일부를 굼벵이 사육 전문가로 육성 중이었고, 나머지 부하들을 둥지 곳곳에 심어 각 부서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요즘 장로들이 해체 팀의 블러리 님을 여덟 번째 장로로 추대하려나 봐요.”
“그래?”
둥지에는 장로라 불리는 2차 진화종 개미 일곱 마리가 있었다.
그들은 군체 초기부터 여왕들과 함께해 왔다고 한다.
‘창업 공신들인가?’
블러리는 해체 개미들의 리더 격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특수 개체였다.
“블러리 님은 시절 솔져의 진화형인 블레이드 솔져예요. 살상에 특화된 능력을 가졌고, 최강이라고 불리는 종이래요.”
무력이 특출난 블러리는 자이언트 솔져보다 강하다고 여겨졌다.
“장로들도 블러리 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고 해요.”
‘어려워한다는 건가?’
나와 크게 상관없는 일인 것 같아 장로들의 얘기는 가볍게 넘겼다.
“케어 님과 트라이 님이 난방과 온천이란 것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페르 님은 난방에 대해 칭찬하며 거기서 일하는 인간은 식량이 아니라고 공표하셨어요.”
난방이 가동되면서 산란량이 급증했고, 나에 대한 페르의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포스 님은 겨울잠에 드셨어요.”
무왕 포스는 산란도 뜸하고, 뭔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여왕들의 소식이 이어진 후 거대 굼벵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굼벵이들이 다 자랐어요. 조금 있으면 변태기에 들어갈 거예요.”
가을에 받은 알이 두 번의 탈피를 거쳐 3령 굼벵이가 됐고, 겨울이 지나갈 무렵 변태를 준비하는 듯했다.
“성충이 되면 저희가 제어할 수 없으니 모두 영양화시키려고 해요.”
지금 잡으면 좋은 영양 재료를 확보할 수 있겠지만, 사육장의 미래를 생각하면 생산망을 다져 둬야 했다.
“일단 수컷은 모두 영양화시키고, 암컷 중 크기가 작은 것도 영양화시켜, 나머지 암컷은 고치가 되도록 놔 둬.”
“변태를 마치면 처리가 어려운데…….”
“고치 상태일 때 갑각충 산란실로 옮겨 둬. 산란실의 굼벵이들이 변태를 마치면 둥지 밖으로 무사히 나갈 수 있도록 해 주고.”
“그냥 보내 준다고요?”
내 지시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크리에게 보충 설명을 해 줬다.
“여기서 잘 먹고 잘 자랐으니, 산란할 때가 오면 절반 정도는 이곳을 찾아올 거야.”
나는 세크리에게 지금 두 마리를 살려 보내면 2~3년 후에 적어도 100개에서 200개의 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해 줬다.
“그럼 암컷은 모두 보내 주는 게 더 이익이 아닌가요?”
“수준 미달인 애들은 보내 줘 봐야 개미굴 커리큘럼에 흠집만 생겨. ‘개미굴 출신 갑각충은 모두 크고 강하다!’ 이게 포인트라고.”
“네?”
세크리는 끝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시에 충실한 부하라 걱정은 없었다.
머쉬파는 130마리의 미니 워커를 휘하에 뒀고, 다섯 개의 버섯 농장과 창고를 관리했다.
“난방과 온천이 만들어지면서 버섯 생산량이 증가했어요. 지금 인원으론 창고에 있는 버섯의 영양화가 늦어져요. 이대로 보관 기간이 길어지면 영양 품질이 떨어질 거예요.”
“그래?”
미니 워커는 워낙에 다재다능하여 버섯 농장 관리, 확장 공사, 보수 공사, 갑각충 산란실 관리, 영양 생산까지 담당하고 있어 노동 효율이 떨어지고 있었다.
“머쉬파, 넌 버섯 농장 일에 전념하고 나머지 일은 부하들에게 맡겨 봐. 다른 일로 빠진 만큼 농장 인원도 보충해 두고.”
“그럼… 부하를 더 늘려서 공사와 영양화를 맡겨 볼까요?”
영양화 능력은 빅 워커와 미니 워커가 비슷한 수준이라 굳이 아까운 미니 워커를 투입할 이유가 없었다.
“확장 공사와 보수 공사 쪽만 담당자를 지목해 줘. 영양화는 전문 인력을 찾아볼게.”
“네, 그럴게요.”
머쉬파는 부하 둘을 지목하여 공사와 보수 일을 맡겼다.
“미니 워커 공사 개미 디그파예요.”
“미니 워커 보수 개미 리페파예요.”
앞으로 확장 공사와 보수 공사를 담당하게 될 대표 개미들이 내게 인사했다.
“그래. 잘 부탁한다.”
영양화의 전문가는 산란방에서 데려왔다.
“빅 워커 요리 개미 쿠쿠예요. 버섯 영양화를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쿠쿠는 산란방에서 영양화를 맡던 하녀 개미였는데, 최근에는 출입구 인근 해체 개미들과 요리 개미들이 연합하여 해체와 동시에 영양화가 진행되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일단 머쉬파 휘하에서 영양화를 맡아 줘, 여유가 되면 너도 내 직속 부하로 삼아줄 테니까.”
“다크 님의 직속으로 들어갈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최고의 영양을 생산해 낼게요!”
쿠쿠의 휘하로 영양화 전문 요리 개미들을 다수 붙여 줬다.
‘휴, 부서 분리와 전문 인력 투입으로 그동안 앓고 있던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됐어…….’
다만 말 그대로 임시 조치이지 완전한 해결은 아니었다.
‘지금 인력으로는 늘어난 농장의 생산량을 감당할 수 없을 거야.’
인력을 더 투입하면 해결될 일이겠지만, 잉여 개미의 씨가 마른지 오래였다.
‘일꾼을 늘릴 수 없다면 질을 높일 수밖에!’
신입 스몰 워커와 1차 진화형인 미니 워커 간의 생산량 차이는 매우 크다.
미니 워커의 진화 메커니즘은 일찍이 파악한 바 있었다.
나는 신입 스몰 워커들의 빠른 진화를 위해 과도한 노동을 시키고, 양질의 영양을 지원하는 한편, 최하급 마력 강화액과 외골격 강화액까지 공급해 줬다.
30일 정도 지나자 머쉬파 휘하의 스몰 워커들이 하나둘 미니 워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미니 워커의 숫자가 늘어나며 증가한 버섯 생산량을 감당할 수 있게 됐지만, 영양화 속도가 느린 건 여전했다.
지금 내 휘하의 전력은 이러했다.
치료실과 영양화 담당, 확장 공사, 보수 공사, 그리고 개미들의 휴식을 돕는 하녀가 각각 31마리.
톱밥 생산, 버섯 농장, 사냥 팀이 각 125마리, 정찰병이 100마리.
마지막으로 고블린이 15마리, 인간이 3명 있었다.
약 630마리의 개미를 먹여 살리고 있음에도 영양이 부족하지 않았고, 외부에서의 영양 수급이 끊긴 겨울임에도 창고에 식량이 쌓여 갔다.
‘대단한데?’
나는 그동안 이룬 성과에 만족했다.
***
집단주의인 개미족은 교환이란 개념이 없었지만, 다크가 대량의 영양을 가지고서 필요한 물자와 교환해 주거나 노동의 대가로 지급했더니 최근에는 물물교환이 활성화됐다.
다크는 공정 거래를 원칙으로 내세웠지만, 그가 보유한 영양이 점차 많아지자 6장로 운반 대장 캐리가 이를 문제 삼았다.
“페르 님! 놈이 대량의 영양을 썩히고 있습니다!”
본래 영양의 분배는 운반 개미들이 맡던 일이었는데, 그걸 다크가 자체적으로 조절하니 캐리의 역할이 축소되어 불만이 생긴 상황이었다.
“요즘 유충들보다 미니 워커가 잘 먹고 지낸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영양이 남으면 산란방과 유충방에 보관하는 게 원칙인데!”
격분한 캐리가 페르에게 다가가자, 친위대장 제르다코와 시녀장 일리아나가 여왕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캐리! 페르 님께 무례를 삼가라!”
“물러나, 캐리! 페르 님이 놀라셨잖아!”
“헙!”
둘의 살기 어린 페로몬이 뿌려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캐리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페르 님…….”
한동안 안정을 취한 캐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방금 전의 무례는 죄송하지만, 다크를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어요.”
“그런 건 케어에게 말하지, 왜 나한테 말하는 거야?”
“케어 님은 가만히 놔두자고 하셔서…….”
페르는 난감해하며 일리아나에게 물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처리하지?”
“그동안 남는 영양은 운반 개미들이 산란방과 유충방으로 가져오고, 시녀장과 보모장이 관리했어요. 일반 개미인 다크가 관리할 필요는 없는데…….”
“그럼 그대로 진행하면 되잖아.”
“그게… 다크가 영양의 회수를 거부해서…….”
“왜?”
“그건 저희도 잘…….”
일리아나의 시원찮은 답변에 페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다크를 불러와 봐. 왜 그러는지 들어 보면 알겠지.”
***
굼벵이 영양까지 더해지며 넘쳐나는 영양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할 때, 산란방에서 온 호출을 받았다.
“그러니까. 운반 대장인 6장로 캐리가 날 문제 삼았단 말이지?”
“네.”
세크리가 물어다 준 소식으로 산란방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모아온 영양을 모두 뺏길 지도 모른다고?’
큰 고생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모인 영양일 뿐.
불쾌해하거나 아까울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뺏겨도 봄이 되면 금세 모일 거란 사실을 아니까.
내게 있어 영양의 가치는 있으면 더 많은 개미를 부릴 수 있는 자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본능이 내게 소리치고 있었다.
안 돼! 영양을 내주면 안 돼!
‘이상하네… 왜 이러지?’
개미족은 군체에 공헌하는 존재인데 왜 영양을 내주는 게 싫은 걸까?
과거를 회상해보니 회사가 급성장하던 시절과 지금의 군체가 겹쳐 보였다.
당시 영업 이익의 25%를 대표가 가져갔고, 25%로 세금을 냈으며 남은 50%를 회사에 투자했다.
만약 그때, 대표가 욕심을 부려 영업 이익 전부를 챙겼다면…….
‘회사는 성장할 수 없었을 테지.’
대표가 이익을 모두 가지지 않았듯이 영양을 모두 내주는 건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내가 인간일 때의 경험과 개미족의 본능이 결합되면서 이러는 것 같아.’
물론 블랙 워커인 나는 개미족의 본능을 무시할 수 있으니 의미가 없었지만, 그동안 모아온 영양을 그냥 내줄 생각은 없었다.
‘그럼 여왕들과 담판을 지어 볼까.’
그 이상으로 받아내면 그만이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