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새로운 목표
분명 긴 시간 동안 자신과 싸움을 펼쳐 온 것 같은데…….
“진화 축하해요, 다크 님.”
진화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내 옆에 있던 세크리에게 조금 전 상황을 물어봤다.
“잠시 움찔거리더니 탈피하셨어요.”
“그렇구나.”
2차 진화종이 되니 오가는 개미들이 날 우러러보며 고개를 숙였고, 명령을 기다리는 듯한 태도로 멈춰 섰다.
“그냥 가 봐.”
“네, 다크 님!”
멈춰 선 개미들을 보내고, 몸 상태를 점검했다.
‘마석의 마력이 텅 비었어.’
진화 후의 세상은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기감이 강화된 건가? 다양한 마력이 느껴져!’
어두운 흑마력, 새하얀 백마력, 각양각색의 자연 마력이 더듬이 감각을 통해 선명히 보였다.
흑마력은 친숙했고, 백마력은 꺼림칙했다.
자연 마력은 두 마력에 비해 희미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강화된 건 기감만이 아니었다.
흑마력을 소모하여 신체를 강화할 수 있게 됐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신체를 강화하면 동시에 파괴 충동이 밀려온다는 점이었다.
‘이거, 괜찮은 거 맞으려나?’
물론 이미 개미가 되면서 인간성이 마모됐지만, 완전히 어둠의 존재가 되어 가는 듯해 잠시 서글픈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개미족 특성상 나의 감정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2차 진화도 했으니, 이제 20년은 더 살겠어.’
수명 걱정을 덜었다는 것이 큰 수확이었다.
‘이제 편하게 2회 차 삶을 즐기면 되는 거야!’
강화 능력과 새로 생긴 능력에 집중하던 중 생소한 감각을 포착했다.
직속 부하들과의 연결이 좀 더 긴밀해진 것 같고, 군체와의 연결 또한 미약하게 느껴졌다.
‘연결을 통해 뭔가 공유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이게 카르마가 공유되는 통로인가?’
분명 일리아나의 설명에 따르면 카르마란 개미족이 활동하며 발생하는 종합적인 활동 점수 같은 것이고, 많이 쌓일수록 개체와 군체의 격이 높아진다고 들었다.
속닥속닥.
인간 여인들이 구석에서 날 경계하며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었다.
‘저 흔들리는 흑마력은 불안할 때 발산되는 것 같아.’
그녀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보였지만, 텅 빈 마석부터 채우는 게 급선무였다.
성큼성큼 여인들에게 다가가니, 불안함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에서 뿜어지는 흑마력을 호흡을 통해 조금씩 흡수했다.
인간은 적응력이 좋다.
내가 그저 다가간 채 아무 일도 벌이지 않자, 두려움과 불안감이 옅어졌다.
여자들의 대표인 루리아가 내게 다가와 몸짓으로 용건을 물어왔다.
흑마력이나 흡수하려던 나는 대충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을 몸짓으로 전했지만, 자꾸 옆에서 알짱거리자 귀찮아졌다.
그 순간, 여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산란방의 하녀 개미가 찾아왔다.
“다크 님! 페르 님이 부르셔요.”
하녀 개미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날 안내했다.
***
탁월한 페로몬 감지력을 가진 페르는 다크가 진화했음을 알아차렸다.
“다크가 진화했어.”
그 말을 들은 포스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슬슬 진화할 때가 되긴 했다.”
특수종의 진화는 군체에 있어 호재였다.
다들 놀라워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둘러보던 페르의 감각에 불안해하는 케어가 감지됐다.
“케어… 다크가 진화했는데, 기쁘지 않은가 봐?”
“아니, 기뻐.”
“거짓말.”
페르에게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떠올린 케어는 고민을 털어놓으려다 말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한참이나 케어를 바라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하던 페르.
“말하기 싫으면 말아.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녀는 까칠하게 쏘아붙이고는 하녀 개미를 불러 다크를 데려오게 했다.
***
하녀 개미를 따라가니 페르, 포스, 케어가 모여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처음 보는 모습이야. 그게 블랙 워커의 진화 형태인가?”
“체구는 자이언트보다 작지만, 압축된 힘이 느껴지는군.”
페르와 포스는 내가 무엇으로 진화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다크 워커야. 마계종이라 불리기도 하는 어둠 속성 개미지.”
케어가 다크 워커로 진화했음을 알려 줬다.
“다크 워커는 속성 내성이 높고 신체 능력도 매우 높단다.”
포스가 케어에게 물었다.
“다크 워커의 전투력은 어떻지?”
“체격이 빅 워커보다 조금 커진 수준이라 자이언트 워커만큼의 파괴력은 없고, 물리 내성도 자이언트 워커보다 약하니 사냥보단 정찰과 개척 일이 어울려.”
“그리 강한 종은 아니란 소리군. 그럼 단순히 다크, 네가 강한 건가?”
페르가 내게 부담스러운 관심을 보였지만, 케어의 설명이 이어졌다.
다크 워커는 블랙 워커와 마찬가지로 보급종인 자이언트 워커보단 신체 능력이 약하지만, 속성 내성이 있어 어디서든 생존할 수 있는 종이었다.
“다크 워커는 조금 특수한 마력인 흑마력을 사용하지. 흑마력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으니, 너 스스로 알아 가거라.”
“네, 그럴게요.”
케어와의 대화를 마친 나는 산란방에 상주하는 여왕, 시녀, 하녀, 친위대 등과 인사를 나눴다.
서로를 꼼꼼히 더듬어 인사를 나누는데, 그동안 날 하찮게 보던 친위대들은 더는 그러지 않았고, 어린 여동생 보듯 보듬어 주던 시녀 개미들 또한 동료와 악수하듯 분위기가 바뀌었다.
하녀 개미들은 내게 미움이라도 살까 봐 굽신거리며 마우스 투 마우스로 영양을 주입했고, 전신에 보호액을 발라 주며 극진히 대접했다.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
2차 진화종이 되면서 둥지에서의 나의 지위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졸부에서 귀족으로 승급한 상황이려나?’
어찌 됐든 지위가 오른 건 기분이 좋았다.
인사를 마치고 무덤으로 돌아갔다.
내 옆에 있는 세크리 또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는지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다녔다.
“야! 너희들, 다크 님이 지나가시는데 똑바로 인사 안 해!”
“죄송해요. 저희 페로몬 감지력이 아직 미숙해서…….”
무덤 앞 통로에서 빅 워커들을 다그치는 세크리.
호가호위가 따로 없었다.
“세크리, 그만하고 너도 좀 쉬자.”
“네!”
무덤에서 개미 해체 일을 하던 암컷 고블린은 진화한 날 알아보지 못했지만, 평소대로 보디랭귀지를 사용해 주니 하나둘 나임을 알아차렸다.
“키키! 카!”
날 알아차린 고블린들이 한참이나 킁킁거리더니, 산양 같은 가로 눈을 빛냈다.
“키카쿠카?”
키카가 갑자기 엎드려 절을 올리기 시작하더니, 일대의 암컷 고블린들이 따라서 함께 절을 올렸다.
‘뭐야?’
왜 이러나 싶었지만, 암컷 고블린들의 이상 행동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진화를 축하해 주는 건가?’
고블린 대표인 키카가 주문을 외우자 암컷 고블린 세 마리가 어딘가 가더니, 제일 귀엽게 생긴 암컷 고블린의 가죽옷을 모두 벗긴 후 밧줄로 꽁꽁 묶었다.
그 과정에서 발버둥 치는 암컷 고블린을 다른 암컷 고블린들이 돌로 찍어 반항할 수 없도록 팔다리를 부쉈다.
‘이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말릴 틈이 없었다.
그러고는 암컷 고블린들이 내 앞으로 돌을 가져와 쌓았다.
돌을 모아 제단 같은 걸 만들더니, 그곳에 밧줄로 묶은 암컷 고블린을 눕혔다.
“키카쿠카! 키르키!!”
“키카쿠카! 키르키!!”
암컷 고블린들이 날 향해 절하며 춤추고, 또 절하곤 춤췄다.
‘날 신이라 생각하는 건가? 저 암컷 고블린이 잘못 걸린 제물이고?’
살려 달라며 몸부림치는 제물의 몸에선 상당량의 흑마력이 뿜어져 나와 내게로 흡수됐다.
‘엄청나다.’
의식의 막바지, 키카가 돌도끼를 가져와 제물의 목을 내리쳤다.
그러나 날이 무뎌서 그런지, 둔탁한 소리만 나고 목은 잘리지 않았다.
결국 여러 마리의 암컷 고블린이 합세한 뒤에야 몸에서 머리를 뜯어낼 수 있었다.
나는 제물이 죽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흑마력을 받아들이느라 정신이 몽롱했다.
‘이건… 마약과 다를 바 없어.’
거부하기 힘든 유혹에 제물의 죽음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고, 제물의 숨이 끊어질 때 막대한 흑마력이 내게 쏟아졌다.
한 번에 마석의 절반을 채워 버린 고블린 공양.
제사를 주관한 키카는 내게 제물의 머리를 바치며 엎드렸다.
‘제길, 그래도 손해야…….’
상당량의 흑마력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순종적인 노동력 하나를 잃었다.
‘이게 고블린들의 문화인가?’
다음에는 제사에 쓰일 제물을 따로 마련해 주기로 결심한 나는 고블린의 머리를 턱으로 받아 든 후 앞발로 키카의 머리를 만져 줬다.
치하의 의미가 담긴 몸짓을 보이자 암컷 고블린들이 매우 좋아했고, 그들은 제물의 몸통을 나눠 먹기 시작했다.
개미족이 되면서 비위가 매우 강해졌기에 징그럽거나 섬뜩하진 않았다.
굳이 어리고 건강한 암컷 고블린을 제물로 바쳐야 했는지 의문이 들 뿐이었다.
‘하…….’
고블린의 제사는 끝났지만, 뒤처리할 일이 생겼다.
인간 숙소와 이어지는 무덤 출입구 쪽에서 양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은 채 주저앉은 인간 소녀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쩐지… 흑마력이 어디선가 계속 들어온다 싶었네.’
소녀에게선 짙은 어둠과 함께 지린내가 풍겨 왔다.
암컷 고블린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소녀는 바닥을 기어 무덤에서 멀어지려 했다.
그 과정에서 팔꿈치에 찰과상이 생겨났지만, 패닉에 빠진 소녀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달려가 가로막자 소녀가 움직임을 멈췄다.
“얌전히만 있어라. 안 죽이니까…….”
내가 죽일지도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에 빠져 있지만, 오해를 풀 방법이 없기에 그저 최대한 다치지 않도록 살살 당겨 일으켜 세워 줄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힘이 없는지 몇 차례 주저앉으려는 걸 잡아 주며 그녀가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노력 끝에 소녀를 무사히 돌려보낼 수 있었다.
한 소녀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안겨 준 고블린 제사는 소녀의 흔적을 치워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런저런 일을 끝내고, 한동안 무덤 구석에 마련한 나만의 공간에서 고요한 휴식을 취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제일 급선무인 수명 문제는 2차 진화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됐고, 군체의 식량 문제도 난방 시설과 버섯 농장의 시너지 덕에 넉넉한 상황까지 왔다.
‘많은 걸 바꾸긴 했지.’
일이 없어 아사하는 개미들과 사소한 상처로 죽어 가는 개미를 보곤 치료실을 만들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채집 품목을 확대했고, 군체에게 위협되는 요소를 제거하려다 보니 정찰대를 운용한 포위 섬멸 사냥법을 보편화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일을 덜고자 비상식량이던 암컷 고블린을 가르치기 시작했더니, 지금에 와서는 개미족이 꺼리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도맡는데다가 가죽 공방과 제사장이 만들어졌다.
또 인간 여자들을 쓸모 있게 만들어 준 난방 시설은 온천과 함께 운영되면서 둥지 내부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여 농장의 생산량과 여왕들의 산란량을 극대화했다.
일이 다양해지면서 개미들의 노동 효율이 떨어지는 것 같아 전문 개미 양성을 통한 효율 개선을 진행했더니, 특화 개체까지 늘어 생산력은 더욱 증가했다.
군체는 나로 인한 변화로 급속히 발전 중이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개미족의 특성상 여왕들의 죽음이 곧 군체의 멸망을 의미할 테니…….
‘여왕들이 수명을 다하면 나도 끝이란 말이지.’
거기다 북쪽 방면의 고블린은 어느 정도 청소했지만, 나머지 세 방향에서 좁혀 오는 포식자들의 압박도 만만치 않았다.
‘사회와 다르지 않아.’
인간일 때도 개미족이 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의 노력으로 회사는 크게 발전했지만 그에 비례해 위협도 늘어났고, 성장이 멈춘 순간 갖은 문제가 들이닥쳐 목을 졸랐다.
지금의 개미족 상황도 나쁘진 않지만, 단지 그렇게 보일 뿐.
이곳은 아무리 많은 식량을 가졌어도 약하면 먹혀 버리는 정글이었다.
이를 모르지 않는 개미족은 가진 식량을 지키기 위해 힘을 키울 것이고, 그런 만큼 식량 소모량은 급증할 것이다.
‘불안하단 말이지…….’
개미족의 습성으로 볼 때, 부족해진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영역을 끊임없이 확대하다가 늘어난 전선을 감당하지 못해 멸망에 이를 게 뻔했다.
‘남은 수명은 20년.’
내가 과연 3차 진화를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더욱 늘어날 수명을 생각하면 군체가 멸망하는 건 곤란했다.
‘이번 삶도 쉽지만은 않겠어.’
개미의 삶에는 충분히 적응했다.
슬슬 제대로 된 기반을 쌓아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개미 왕국을 만들어 나를 지켜야 했다.
앞으로의 목표를 세웠으니, 거기에 맞는 계획을 짜야 했다.
‘역시 인재부터 채우는 게 우선이겠지.’
다크 워커가 되면서 직속 부하를 열 마리까지 거느릴 수 있게 됐다.
남은 다섯 자리는 특수 개체로 진화할 만한 개미들을 선점할 생각이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