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아카시아 숲 개미
동쪽 숲이 비교적 안전하다지만, 보험은 들어 둬서 나쁠 게 없다.
나갈 때는 자이언트 솔져인 피어레스와 블레이드 솔져인 나우피어를 보디가드로 데려갔다.
힐러 역할의 메디도 있고, 정찰에 능한 플라이 워커 페스트도 함께했다.
껌딱지 같은 세크리까지 더해져 2차 진화종만 여섯 마리인 화려한 파티가 구성됐다.
파티의 남은 자리는 빅 워커인 정찰 개미 두 마리와 사냥 개미 네 마리를 채워 풀 파티를 이루었다.
열두 마리로 이루어진 내 파티는 비교적 안전한 낮 시간대에 동쪽 숲을 거닐며 메디에게 필요한 약초를 채집했다.
“회복초 발견!”
“메디, 저기도 있다!”
약초를 채집하면 인간들이 줄기로 엮어 만든 바구니에 담았고, 이족 보행하는 세크리가 짊어졌다.
그동안 페스트는 정찰 개미 둘을 데리고서 주변을 경계했고, 나우피어와 피어레스가 양쪽에서 날 지켰다.
“다크 님, 바구니가 찼습니다!”
“수고했어.”
일이 끝나면 둥지로 돌아가 각자의 일상을 보냈고, 비교적 안전한 낮에 다시 모여 동쪽 숲을 거닐었다.
나들이가 반복되며 사슴이나 멧돼지 같은 위협적인 동물을 만나기도 했지만, 자이언트 솔져 중에서도 강하기로 소문난 피어레스의 상대는 아니었다.
“크하하! 덤벼라, 멧돼지!”
“꾸엑!”
페스트가 주변 경계를 잘 서 줘서인지, 나들이가 반복될수록 나의 경계심도 느슨해졌다.
‘날씨 좋네.’
세크리는 주변 생태를 유심히 관찰했고, 가끔 내게 질문해왔다.
“다크 님. 바닥에 꿈틀거리는 이건 뭘 먹고 사는 걸까요?”
“이건 지렁이야. 썩은 식물을 먹으면서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생물이지. 습도와 온도가 맞으면 번식력도 뛰어나서 양식도 가능해.”
호기심 많은 세크리는 일단 먹을 수 있는 건 입안에 넣어 버렸다.
“내장을 빼야 했네요. 흙 맛이 너무 심해요.”
“그렇지.”
내가 알고 있는 동식물에 관해선 자세히 말해 줬지만, 난생처음 보는 것도 많았다.
“활엽수인 걸 보면 잎을 쪼개서 다양한 물건을 만들 수 있겠어. 나무처럼 보이지만, 바나나처럼 줄기가 겹쳐 있는 풀인 것 같고… 여름이 되면 어떤 열매가 열리는지 확인해 보자.”
나우피어는 단단한 나무를 가져와 날카로운 앞발을 이용해 조각을 시작하더니, 멋진 창과 방패를 만들어 세크리에게 선물했다.
피어레스와 사냥 개미들은 약초 채집이 따분한지 자꾸 일행을 벗어나 사슴, 멧돼지, 토끼 등의 동물을 사냥해 왔다.
“며칠만 참아. 장로 선출 시험이 끝나면 나들이도 끝이니까.”
메디, 세크리, 나우피어는 나들이가 끝난단 말에 아쉬워했지만, 피어레스와 사냥 개미들은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동쪽 숲을 거닐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침입자의 공격을 받게 됐다.
침입자는 자이언트 워커 만한 거대 말벌.
“다크 님! 말벌족의 자이언트 킬러비예요!”
놈들은 강력한 턱으로 세크리를 노리려다 피어레스에게 반격당했다.
“내려와라! 붙어 보자!”
피어레스가 앞발 하나를 뜯어냈지만, 치명타는 입히지 못하여 도주를 허용하고 말았다.
기어 다니는 우리로선 날개 달린 자이언트 킬러비를 추적할 수 없었지만, 플라이 워커인 페스트가 따라붙어 놈의 행적을 내게 전했다.
우리 둥지의 영역 밖으로 몰아낼 생각을 가지고 추적을 시작했는데, 영역의 외곽에서 도주 중이던 자이언트 킬러비 레이드를 시작한 스마트 워커 무리를 보게 됐다.
도주자와 침입자.
살아남는 쪽을 제거해야 할 상황이지만, 상대는 나무창과 나무 방패로 무장한 스마트 워커 열두 마리.
스마트 워커는 2차 진화종 중에서도 최약체로 꼽히며 빅 워커보다 약하단 평도 받지만, 제대로 무장하여 대형까지 갖추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킬러비의 공격을 밀집 대형으로 막아낸 후 바로 포위했어. 이 녀석들… 제대로 훈련받은 놈들이군.’
침입한 개미들이 사냥을 끝내면 피어레스를 돌진시켜 너덧 마리를 작살 낸 후, 나머지는 다 같이 덮쳐 처리하면 될 것 같았다.
거기다 이쪽은 최강종이라 불리는 블레이드 솔져 나우피어가 있다.
문제는 나우피어가 위명과 달리 전투 경험이 없는 허당이라는 건데…….
“다크 님, 지원군을 불러올까요?”
나는 곧바로 뒤로 빠지려는 나우피어를 붙잡았다.
“정찰 개미를 보내면 돼. 넌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전력에서 세크리, 메디, 나우피어를 빼니 살짝 불안했다.
‘눈먼 창이라도 맞으면… 골로 가는 건데.’
다크 워커인 나는 속성 내성에 특화됐을 뿐, 물리 내성은 자이언트 워커보다 떨어지는 수준이라 찔리면 아프다.
침입자들이 자이언트 킬러비와 양패구상하여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조직적으로 킬러비를 밀어붙이는 걸 봐선 승기는 일찍이 기울어진 듯했다.
자이언트 킬러비의 배와 입에 나무창이 여러 개 꽂히며, 침입자들의 레이드가 끝났다.
침입자들은 우리를 경계하고 있었는지 사냥이 끝나자마자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
“물러가라, 여긴 우리 영역이다!”
세크리가 대표로 나서서 외치자, 침입자 대표가 사냥감에 페로몬을 묻히며 말했다.
“이건 우리가 잡았다.”
같은 개미족이다 보니 서로가 원하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고, 물러날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 또한 보였다.
‘사냥감을 넘겨주면 영역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물러설 수가 없어.’
상대가 빅 워커나 자이언트 워커 계열의 무식한 개미들이라면 충돌이 불가피하겠지만, 지능에 특화된 개미인 스마트 워커라 협상의 여지가 있었다.
“그쪽이 원하는 건 사냥감이냐, 아니면 영역전이냐?”
“사냥감을 쫓다 영역을 넘게 됐다. 우린 먹이만 원한다. 그냥 보내 주면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페로몬 선을 선명히 그어 두겠다.”
상대측은 평화적인 해결을 원했지만, 이쪽은 그렇지 않았다.
“그 페로몬 선을 넘어온 게 너희들이야! 우리 영역의 사냥감을 가져간다는 건 선전포고와 마찬가지!”
세크리가 민감하게 반응하자, 피어레스가 전투 페로몬을 발산하여 동료들의 신경을 가속시켰다.
“다크 님! 돌격합니까?”
일단 흥분한 세크리를 뒤로 물린 나는 피어레스를 진정시켰고, 나우피어만 대동한 채 앞으로 나섰다.
나우피어의 위협적인 생김새에 긴장한 침입자들이 뒷걸음치며 심히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확실히 겉모습은 위협적이긴 해.’
블레이드 솔져의 생김새가 기선 제압용으로 뛰어나단 걸 체감한 나는 기세가 꺾인 침입자들에게 제안했다.
“사교위에 담긴 영양을 내준다면 킬러비 사체를 넘길게. 이 정도면 너희도 손해가 아닐 것 같은데? 싫으면 뭐…….”
내가 협상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세크리가 중얼거렸다.
“다크 님, 그냥 저놈들을 처리하는 게… 그럼 사냥 실적도 크게 오를 텐데…….”
그러나 장로가 무엇을 하는 직책인지도 모를뿐더러, 미친 개미에게 찍힐 수 있던 나는 실적을 올리는 것보다 무사히 둥지로 돌아가는 게 중요했다.
그런 내게 영양과 사냥감의 교환은 싸우지 않기 위한 명분이지 이익을 위한 게 아니었다.
“세크리, 작은 것에 집착하지 마. 그럼 큰 걸 놓치게 돼.”
“그렇군요. 제가 알 수 없는 큰 뜻이 있으시군요.”
적당히 있어 보이는 말로 세크리를 설득한 나는 침입자들의 선택을 기다려 줬다.
잠시 망설이던 침입자들이 계산을 마쳤는지, 하나둘 다가와 개미족 특유의 페로몬 교환 인사를 하며 영양을 마우스 투 마우스로 주입해 줬다.
‘어… 이건!’
최하급 영양 정도나 소지하고 다닐 줄 알았는데…….
침입자들이 건네준 것은 여왕들도 흔히 먹을 수 없는 중급 영양이었다.
거기다 황홀한 단맛이 전신을 휘감는 것이…….
‘광폭환을 먹은 것 같아.’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온몸의 신경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자, 나는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단맛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건… 꿀이네.’
속성 내성 덕인지 빠르게 정신을 차린 나는 페로몬을 뿌려 부하들에게 경고했다.
“꿀이다, 단맛에 빠지지 마! 전리품으로 챙겨갈 거니까 사교위에 보관해!”
피어레스를 비롯한 사냥 개미들은 단맛에 빠르게 벗어났고, 나머지 개미들도 하나둘 정상 상태로 돌아왔지만, 세크리만은 단맛에 면역이 없는지 상태 이상이 오래갔다.
“이 정도면 됐나?”
중급 수준의 부산물을 내주게 됐지만, 동급의 영양인 꿀을 받았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충분해.”
“다행이군.”
상대도 흡족해하는 걸 보니 아직 가진 꿀이 더 있는 듯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얼마든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버섯 영양을 주입하며 말했다.
“우리 군체에서 주식으로 먹는 영양이야 어때?”
“최하급 영양이지만, 나쁘지 않다.”
“너희가 먹는 꿀과 교환할 수 있을까?”
“그건 어렵겠군.”
최하급과 중급 영양의 교환.
1대1 교환은 힘들 테니, 조금씩 교환비를 올려 봤다.
“꿀을 주면, 다섯 배의 버섯 영양을 줄게.”
“그건…….”
고작 다섯 배를 불렀을 뿐인데 저렇게 망설이다니…….
“열 배!”
“꿀을 열 배로 바꿔 주겠다는 거냐?”
고작 열 배로 허둥대다니.
“그래. 꿀과 버섯 영양을 열 배의 비율로 바꿔 줄게.”
우리에게 있어 꿀은 부르는 게 값인 귀한 영양이지만, 상대에겐 주식으로 쓰이는 흔한 식량인지 거래는 손쉽게 성사됐다.
우린 3일 후 이곳과 멀지 않은 영역 분계선에서 만나기로 한 후 헤어졌다.
부하들은 침입자들을 식량으로 삼지 못한 걸 아쉬워했지만, 나는 꿀의 거래처를 뚫어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먹던 영양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어.’
나들이를 마치고 둥지로 돌아온 나는 오늘의 사냥 성과를 보고하러 산란방으로 갔다.
지금까지는 적당히 성과 없음이라고 보고했는데, 꿀이란 물증이 생겼으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여왕들에게 꿀을 진상하며 오늘 있던 일을 보고했다.
내 말이 끝나자, 케어가 나를 극찬했다.
“꿀이구나! 아카시아 숲 녀석들에게서 꿀을 뜯어내다니! 훌륭하구나!”
페르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요즘 고블린 영양과 버섯 영양만 먹다 보니 질리던 참이었어. 가끔은 이런 특식도 있어야지!”
꿀을 맛본 케어는 단맛에 정신 줄을 놓았고, 페르는 더듬이를 세우더니 포스에게 배정된 꿀을 탐냈다.
“아껴둔 굼벵이 영양이랑 바꿀래?”
중급 영양인 꿀과 중급 영양인 거대 굼벵이.
급은 같지만, 희소성과 맛을 따지면 꿀의 가치가 훨씬 높았다.
“마음대로 해라.”
가치는 맞지 않았지만, 맛에 대해 까다롭지 않은 포스는 흔쾌히 교환해 줬다.
꿀을 맛보는 산란방의 개미들을 보니 스마트 워커가 꿀을 매우 좋아하며 전투력이 높은 자이언트는 단맛에 쉽사리 빠지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같은 개미족이라도 진화종에 따라 식성이 다르군.’
양질의 약초를 좋아하는 하이 포션 워커 메디와 독충을 좋아하는 액시드 워커 포룸이 떠올랐다.
‘설마…….’
촉이 왔다.
꿀이 군체에 큰 변화를 가져다줄 것을 직감한 나는 세크리에게 양질의 버섯 영양을 대량으로 준비시켰다.
약속한 때가 되어 짐꾼 역할의 빅 워커 스무 마리를 데리고 거래에 나섰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피어레스의 사냥 부대와 페스트의 정찰 부대도 함께했다.
사냥 부대와 정찰 부대는 거래 현장과 떨어진 곳에 대기시켰다.
상대측에서는 스마트 워커와 빅 워커 스무 마리가 왔다.
보급종인 자이언트 워커가 안 보이고, 스마트 워커가 흔한 걸 봐선 꿀을 주식으로 취급하여 스마트 워커의 비중이 월등히 높아진 것 같았다.
우린 상대 개미족을 아카시아 숲 개미라 불렀고, 상대는 우릴 오크나무 숲 개미라 불렀다.
버섯 영양 10, 꿀 영양 1의 비율로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개미들이 서로가 가진 영양을 교환하는 동안 나는 상대측 리더로 보이는 자와 대화를 나눴다.
사실상 대화를 위장한 정탐이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