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사탕수수
“그쪽은 어때? 우리처럼 고블린이 많아?”
개미족에게는 정탐의 개념이 없다 보니, 정보를 캐내는 건 매우 쉬웠다.
“고블린은 적다. 우리 군체의 적은 말벌족이다.”
고블린보다 훨씬 강한 말벌족과 생존경쟁이라니.
상당한 전력을 갖춘 군체라 여겨졌다.
“꿀을 어디서 구해?”
“주변에 꿀벌족이 있어 양질의 꿀을 구할 수 있다.”
아카시아 숲 개미족은 꿀벌족과 공생 관계를 맺고 있었다.
“꿀만 먹는 거야?”
“그렇지 않다. 애벌레를 키우려면 꿀로는 안 된다. 부족한 영양은 말벌족과의 전쟁으로 채운다.”
“전쟁?”
“애벌레 키우려면 전쟁이 필요하다.”
아카시아 숲은 꿀이 풍부했고, 부족한 단백질은 말벌족을 사냥해 얻었다.
“오크나무 숲의 개미. 너희가 주는 영양.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앞으로도 거래를 이어 갔으면 한다.”
그들의 제안은 우리 쪽에서도 부탁하고 싶었던 일이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잘 부탁한다. 내 이름은 들러리다.”
“난 다크.”
아카시아 숲 개미족과의 거래를 순조롭게 마치고 다음 거래 약속도 잡아 뒀다.
둥지로 돌아온 나는 여왕에게 불렸고, 교역에 대한 보고와 함께 교환해 온 꿀의 절반을 진상해야 했다.
“꿀이다!”
“꿀이야!”
스마트 워커인 시녀 개미들이 미친 듯이 좋아하는 걸 보니… 절반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평범한 개미라면 여왕에게 식량을 진상하는 걸 좋아하겠지만…….
‘난 아닌데 말이지.’
그렇다 해도 군체의 여왕에게 밉보여 좋을 게 없으니, 사회인의 짬밥을 살려 눈치껏 비위를 맞춰 줬다.
아카시아 숲 개미들과의 거래가 몇 차례 이어지며 둥지 내의 나에 대한 평판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반대로 내 평가가 치솟을수록 블러리의 존재감은 옅어졌다.
‘이거… 보복에 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동안 장로직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지만, 유력 후보가 된 이상 장로에 대해 알아 둬야 했다.
“지금의 장로들은 여왕님의 곁에서 오랫동안 보필한 분들이에요.”
“그건 알아. 내가 알고 싶은 건 장로에게 주어진 권리와 의무지.”
“그건…….”
세크리가 가져온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어서 시녀장 일리아나를 찾아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1장로 일리아나는 내게 친절한 편이었고, 꿀을 가져다주면서 더욱 상냥해졌다.
“의무? 장로 회의에 참석하고, 결정된 사항을 따라 주면 돼.”
일리아나는 회의 참석을 의무라고 말했지만, 내가 볼 때는 의무라기보다 권리에 가까웠다.
“권리는요? 특권 같은 건 없어요?”
“음… 장로는 따로 관계를 맺지 않아도 여왕들의 직속 부하가 되지.”
“그게 특권이에요?”
“너도 장로가 되면 알 거야. 그게 어떤 의미인지…….”
개미족은 직속 관계를 맺은 대상에게 영향을 받는다.
일례로 상위종 산하의 개미와 무소속 개미를 비교해 보면 상위종 산하 개미 쪽 성장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세 여왕의 직속 부하라…….’
개미족의 카르마 착취 피라미드의 구조를 생각해 볼 때, 여왕들이 꼭대기에 있고, 그 바로 아래가 장로였다.
여왕의 부하는 세 번째, 장로의 부하는 네 번째를 차지하고 있었다.
라인이 없는 나는 피라미드 밑바닥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동안 같은 밑바닥 개미들을 착취하여 윗사람, 아니 윗개미들에게 카르마를 바치고 있던 것이었다.
“장로가 되면 카르마 영향을 많이 받게 되거든…….”
일리아나는 군체의 개미가 많아질수록 여왕과 장로가 강해진다고 했다.
‘그러니까 개별적으로 쌓인 카르마는 능력치에 영향을 주고, 군체에 쌓인 공동 카르마는 여왕과 장로 순으로 차등 분배된다는 거네.’
정보를 정리해 보면, 장로가 되면 군체 카르마를 분배받을 수 있고, 군체 경영에 동참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그에 반해 의무라 할 만한 건 장로 회의에서 결정된 걸 따라야 한다는 것 정도.
‘회사의 경영진이 되는 거네.’
돼도 좋고, 안 돼도 그만이다.
장로가 되지 못해도 강해질 방법은 무수히 많았다.
‘블러리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는 부하들이나 늘리며 조용히 수련이나 하는 게 이득이야.’
군체의 카르마를 얻지 못한다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이미 다른 수단을 여럿 찾아낸 나였기에 절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꿀의 위력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대단했다.
메디와 의료 개미들을 데려와 루리아와 두 소녀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있을 때, 순간적으로 군체와의 연결이 옅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였지?’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2차 진화종 개미들이 산란방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메디, 너도 느꼈어?”
“네. 여왕 중 한 분에게 이상이 생긴 것 같아요.”
나는 세크리와 메디를 데리고 산란방을 찾았다.
산란방에 도착해 보니, 개미들이 거대 고치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케어 님이야!”
“케어 님이 진화 중이야!”
상황이 파악됐다.
‘변태 중이구나.’
변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육신이 완전히 녹았다가 재구성되는 완전변태와 기존 육체를 바탕으로 탈피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불완전변태.
미니 워커를 제외한 개체들은 불완전변태로 진화했는데, 케어는 지금 완전변태를 거치는 중이었다.
“케어가 나보다 먼저 진화하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꿀인가? 꿀이잖아!”
케어의 진화 요인으로 꿀이 꼽히면서 진화하지 못한 페르의 분노가 내게 튀었다.
“케어도 진화를 하는데, 내가 못했잖아! 빨리 꿀 가져오라고!”
“진정하세요, 페르 님.”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나의 추측으론 스마트 계열의 개미에겐 꿀이 진화의 열쇠인 듯하지만, 팩토리 퀸인 페르와 자이언트 퀸인 포스에게도 같은 작용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상황이 난처하게 됐어.’
어찌 됐든 페르 뿐만 아니라 포스도 꿀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스마트 워커들과 일부 빅 워커들 또한 꿀을 원했으니.
꿀의 수요가 급증한 만큼 거래량이 늘면 좋겠지만, 거래가 반복될수록 아카시아 숲 개미가 가져오는 양이 줄어들고 있었다.
‘어떻게든 꿀을 더 구해야 하는데…….’
거래일이 되어 아카시아 숲 개미족인 들러리를 만나러 갔다.
“오늘은 이게 다다.”
“저번에 말한 양보다 적은 것 같은데…….”
“우리도 충분한 양을 확보하지 못했다.”
아카시아 숲 개미족 거래 책임자 들러리의 말에 속이 답답해졌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너희 덕에 군체가 커졌다. 꿀이 더 많이 필요해졌다. 거기다 말벌족이 늘어나서 꿀벌족이 힘들어 한다.”
원래대로라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어야 할 영양을 우리에게서 손쉽게 획득하니 군체 인구가 늘어났고, 사냥 횟수가 줄어들자 말벌족이 득세하여 꿀의 수급에 차질이 생긴 것 같았다.
물론 꿀의 수급 문제는 이들이 말벌족과 한판 붙으면 해결될 문제지만, 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놈들, 복수 군체가 아니잖아!’
여왕이 하나인 단수 군체.
버섯 영양은 주로 애벌레에게 제공되는데, 그 숫자가 우리보다 훨씬 적다면…….
그 말인즉슨 우리 군체에서 꿀의 수요가 무한정 늘어나는 것과 달리 저쪽 군체의 버섯 수요는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걸 의미했다.
‘이거 안 되겠는데.’
저쪽에서 필요한 영양이 정해져 있는 이상, 꿀의 거래량을 늘릴 수는 없을 듯했다.
아무리 나라도 안 되는 걸 되게 할 재주는 없었다.
‘방향을 틀자! 대체품을 찾는 거야.’
그동안 숲을 돌아다니며 봐둔 대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칙칙한 보라색 나무가 떠올렸다.
‘생김새는 조금 다르지만, 혹시…….’
거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칙칙한 보라 나무를 찾아 턱으로 부쉈다.
그러자 안에서 단물이 흘러나오는 것이…….
‘역시!’
꿀만큼은 아니지만, 달콤한 맛이 났다.
‘사탕수수였어.’
꿀의 대체품으로 적당한 걸 찾았지만, 대량으로 채집할 수 있는 군락지는 없었다.
몇 그루를 골라 개미들을 시켜 뿌리째로 옮기게 했다.
둥지에서 기를 생각은 없었다.
사탕수수는 물을 엄청나게 먹는 식물인 만큼 농업용수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땅이 필요했다.
둥지에 도착한 나는 공사 팀인 디그파를 불렀다.
파닥파닥.
“나랑 같이 바깥으로 공사 좀 하러 가자.”
“밖이요?”
출입구 인근에 물을 대기 좋은 장소를 선정하여 디그파에게 물길과 배수로를 만들게 했다.
“너희들, 여기를 파!”
디그파가 날아다니며 미니 워커들을 지휘하자, 배수로와 물길이 착착 만들어졌다.
“디그파, 빗물을 저장할 저수지를 만들어 줘.”
“맡겨 주세요!”
사탕수수 밭이 만들어지는 동안 블레이드 솔져인 나우피어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이것 좀 잘라줘. 여기랑 여기. 어, 그 간격으로…….”
삽목이 가능한 사탕수수는 마디를 기준으로 위아래를 잘라 땅에 심어 주면 알아서 잘 큰다.
숲에는 강도 많고 지하 수원도 많아 물의 확보는 어렵지 않았지만, 사탕수수를 꾸준히 재배하려면 지력 부분도 신경 써야 했다.
‘윤작과 화전은 너무 비효율적이야.’
비료를 만들고 싶지만, 이곳 토양과 사탕수수에 맞는 비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난 비료의 배합 비율을 모르니… 뭐, 굳이 어려운 길을 갈 필요는 없지.’
지력의 문제는 특화 생물에게 맡기기로 했다.
“얘들아, 돌아다니다가 지렁이 있으면 잡아 와라.”
“네!”
내 명령을 따라 정찰 개미들이 지렁이를 잡아 오기 시작했다.
***
블레이드 솔져 블러리는 여덟 번째 장로가 되기 위해 휘하의 시절 워커 열한 마리를 데리고 서쪽 고블린 산맥으로 출진했다.
“날 따라라! 갈기갈기 찢어 버려라!”
“와아!”
블러리의 체격은 빅 워커보다 조금 큰 수준에 지나지 않았지만, 날렵한 몸과 날카로운 절삭력으로 사냥감이 보이는 족족 토막 냈다.
“크히히! 고블린 정도야 몇 마리가 몰려오든 손쉬운 먹잇감이지.”
무투파 장로인 자이언트 솔져 포메온조차 한 수 접어주는 그였기에 사냥은 매우 순조로웠다.
가끔 경쟁자인 다크의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다.
소문만큼의 능력이 없던 건지, 제대로 된 사냥 성과가 없다는 얘기뿐이었다.
“고작 그 정도 능력으로 나와 동등한 선에 놓였다고 착각하다니! 이번 기회에 격의 차이를 보여 주마!”
그는 오랜 기다림과 갈망 끝에 장로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다.
그랬기에 신진 세력인 다크가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쟁자인 다크가 아카시아 숲 개미들에게서 꿀을 받아 왔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블러리는 한숨을 금치 못했다.
“그 자리에서 다 썰어 버리고 꿀을 빼앗아야지!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블러리는 다크가 소심하다고 평가했다.
“녀석은 약해. 그러니까 버섯 같은 걸 키울 생각만 하지.”
농장을 만들어 식량 문제를 해결한 것에 대해서는 블러리 또한 높게 평가했지만, 그것만으로 장로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장로는 강해야 해!”
보통 장로들은 일반 개미보다 강하다.
그러나 블러리는 일반 개미면서 장로들보다 강한 존재.
그런 만큼 자신이 장로가 되면 군체 최강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장로가 되면 무법자들부터 썰어 버리겠어.”
숲의 무법자라고 불리는 갑각충은 강력한 힘과 덩치를 지녔음에도 나무 수액이나 먹으며 사는 온순한 종족이지만, 블러리는 자신이 죽이지 못하는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놈들 다음은 포스님을 상대로 날 증명하겠어!”
군체 최강의 개미가 되려는 블러리.
경쟁자라고 할만한 상대가 없어 장로직에 가까워져 갔는데…….
다크가 꿀을 정기적으로 수급해 오며 판도가 뒤집혔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