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톱니바퀴, 그리고 착즙기
“내… 사냥 성과가… 다크보다 못하다고?”
사냥조차 하지 않는 개미에게 밀려 버리다니…….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 블러리는 며칠간 미친 듯이 사냥에 몰두했다.
“썰어라! 남김없이 썰어 버려!”
블러리의 사냥은 매우 빠르고 저돌적이라 그를 따르는 부하들에겐 위험부담이 컸다.
살상 특화 개미인 시절 워커들은 외골격이 약해 부상이 잦았고, 하나둘 치료실로 이송되며 예비 개미로 교체됐다.
배가 부품을 바꿔 가며 항해하듯이 말이다.
그러다 보니 블러리의 파티 구성원은 매일 새롭게 구성됐고, 어느 순간부터 정예라고 할 만한 시절 워커가 부족해졌다.
“왜 이리 느린 거야! 그 정도로 날 따라올 수 있겠어?”
“죄송합니다, 블러리 님. 절 두고 가세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예가 부족하니 사냥 성과가 차츰 떨어져 갔다.
“이대론… 이대론 진다고!”
블러리는 지치고 쓰러진 부하를 버려 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 혼자서도 충분해! 네놈들은 알아서 돌아가라!”
따라오지 못한 부하를 내팽개치며 무리한 사냥을 이어가던 블러리는 케어가 고치를 틀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블러리 님, 케어 님이 고치를 틀었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 케어 님이 진화라고!”
사냥을 멈춘 블러리는 급히 둥지로 돌아갔다.
산란방에 도착하여 고치가 된 케어를 확인한 블러리는 주변 개미들의 평가를 듣게 됐다.
“역시 다크야. 그 녀석이라면 해낼 줄 알았어.”
“그에 비해서 블러리 녀석은 사냥만 할 줄 알지, 실상 둥지에 공헌한 것도 크진 않잖아! 다크가 지금까지 한 걸 생각해 보라고!”
“강하다고 장로가 될 것 같으면 일리아나 님이 왜 1장로겠어.”
“그렇게 설치더니 다크보다 못해서는 무슨 장로야.”
‘내가… 진 건가?’
망연자실한 블러리와 부하들은 한참을 산란방에 서 있다가 해체실로 돌아갔다.
‘만약… 내가 고블린 산맥이 아니라 아카시아 숲 쪽으로 갔다면?’
블러리는 만약을 가정해 봤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서…….
“고기만 잔뜩 구했겠지…….”
블러리는 자신이 다크처럼 꿀을 구해 오진 못했을 거란 걸 인정해야 했다.
‘사냥 속도를 더 높여야 하나?’
장로 선발 시험에서의 패배를 직감한 그는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자신을 따라다니느라 부상으로 인해 죽어 가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다크의 부하들은 모두 쌩쌩했다.
‘…비교되는군.’
경쟁자인 다크를 다시 보게 된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블러리의 부하들은 한층 더 성숙해진 그를 더욱 따랐고, 대척점에 있는 다크를 견제했다.
“블러리 님! 꿀의 수급량이 떨어졌어요!”
“블러리 님! 페르 님이 다크 님에게 불만이 많아요!”
“블러리 님! 스마트 워커분들이 말하길 다크 님이 꿀을 숨겨두고 혼자 먹고 있다고 해요!”
“블러리 님이야 말로 장로직에 어울리세요!”
다크의 추락 소식이 블러리에게 빠짐없이 전해졌다.
‘이미 놈의 성과가 날 앞섰다! 나는 승복했는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까지 놈의 추락을 바라는 것이냐?’
부하들에게 한 소리 해주고 싶었지만, 그들의 열망을 아는 블러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너희도 나와 같을 테지…….’
수많은 개미가 블러리를 따랐고, 그를 장로로 만들기 위해 희생해 왔다.
“블러리 님, 놈의 성과가 조금 앞섰을 뿐이에요. 지금 사냥 속도를 올리면 따라잡을 수 있어요!”
“맞아요. 사냥 속도를 올려야 해요!”
블러리는 부하들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려 했다.
“사냥 속도를 올리면, 그럼 몇이나 살아남을 것 같아? 너희 모두 죽고 싶은 거냐? 내가 직접 썰어 줄까!”
부하들은 전혀 흔들림 없는 페로몬으로 답했다.
“저희가 쓰러져도 블러리 님은 나아가야 합니다!”
“발목을 잡고 있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따를 거예요!”
“블러리 님!”
“블러리 님!”
“너희들…….”
열기 가득한 부하 개미들에게 감화된 블러리가 외쳤다.
“죽어도 좋다면 따라와라! 함께 썰어 보자!”
“와아!”
다시금 마음을 날카롭게 벼린 블러리는 서쪽 고블린 산맥을 거침없이 휘저었고, 성과만큼이나 많은 희생을 치렀다.
수많은 시절 워커들이 죽어갔지만, 그 자리를 또 다른 시절 워커가 채우며 그들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블러리 님을 따르라! 고블린을 썰어라!”
꿀이 부족해진 다크가 사탕수수를 기를 때, 블러리는 부하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장로 선발 시험의 승기를 잡아갔다.
***
개미들이 지렁이를 하나둘 잡아 오더니 어느새 바구니가 가득 찼다.
‘많이도 잡아 왔네.’
인간이던 시절, 음식물 쓰레기를 거름으로 바꿔주는 친환경 상품을 기획했다.
‘문제가 많은 상품이었지.’
지렁이는 온도와 습도만 맞춰 주면 증식도 매우 빨라 전생의 삶에선 미래 식량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게다가 지렁이 똥인 분변토는 다양한 미생물을 품고 있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준다.
21세기의 기술로도 구현하기 힘든 최상의 비료가 분변토였다.
또한 다른 자연 비료들과 달리 발효와 숙성 과정이 없어 생산 기간이 짧다는 장점도 있었다.
채집된 지렁이는 나무, 흙, 접착액으로 급조한 사육 통에 나눠 담았고, 먹이로는 숲에 널린 잡초를 넣어 줬다.
‘이 정도면 금방 불어나겠어.’
한국에 서식하는 흙지렁이는 평균적으로 일곱 개의 알을 낳고, 각 알마다 일곱 마리씩 태어났다.
즉, 한 마리가 번식을 하면 약 50배씩 늘어나는 셈이었다.
태어난 지렁이는 100일 동안 성장한 후, 몸통에 목걸이 같은 환대가 생겨난다.
수명은 3~4년, 환대가 생긴 성체는 알을 낳을 수 있다.
2마리가 100마리로, 100마리가 5천 마리로, 5천 마리가 25만 마리로, 25만 마리가 1250만 마리로…….
이론상 온도와 습도가 맞춰진 상태에서 충분한 먹이가 공급될 경우 1년이면 약 1250만 배로 증식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여긴 지구가 아니지만, 지렁이의 크기만 다를 뿐, 생김새와 습성은 동일하니 번식력도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지렁이가 뛰어난 번식력을 지녔다지만, 분변토를 충분히 생산해 낼 정도로 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충분한 수의 지렁이를 얻기까지 숲에 널려 있는 부엽토를 가져와 쓰기로 했다.
꿀의 대체재인 설탕을 얻기 위해 사탕수수 농장을 조성했지만, 수확까지 몇 개월의 시간이 필요했고, 수확 후의 공정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가만히 뒀다간 일일이 씹어서 즙을 짜낼 판이니.’
최근 스마트 워커로 진화한 세크리의 부하 중 손재주가 좋은 엔지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나우피어도 조각을 잘했지.’
전신이 칼날로 된 개미인 나우피어는 도구 없이도 뭐든 조각해 냈지만, 세크리와 엔지에겐 도구가 필요했다.
“광물을 갈아서 도구를 만드는 거야. 나무를 끼워 손잡이를 만들고, 루리아에게 가져가 열처리를 한 다음, 가죽으로 감싸는 거지. 광물을 고르는 건 내가 도와 줄게. 나무 손잡이를 만드는 건 나우피어가 해 줘.”
세크리와 나우피어는 나의 기행을 여러 번 접한 터라 말없이 따랐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엔지가 내게 물었다.
“뭘 만드는 건가요?”
“도구를 만들려는 거야.”
“도구요?”
“목공에 쓸 톱과 칼이지.”
“그게 뭐예요?”
“설명하긴 어렵네. 일단 만들어 보자.”
도구를 만드는데 만 하루가 걸렸다.
‘후… 톱, 망치, 조각칼을 얻었어.’
슬슬 본격적으로 세크리와 엔지를 굴릴 수 있게 됐다.
“잘 들어. 이제부터 너희는 목수야. 내 지시에 따라 줘.”
전생의 난 수많은 기계장치에 노출된 삶을 살았고, 자동차 엔진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뭐, 그 정도 지식이 필요한 건 아니지.’
톱니바퀴.
그것만으로도 수많은 장치를 만들 수 있다.
‘스프링이나 체인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건 야금술이 있어야겠지.’
지금은 나무와 돌만으로 만들 수 있는 걸 시도했다.
나는 셋에게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톱니바퀴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작은 원기둥 두 개를 만들게 하여 완성된 톱니바퀴를 붙였다.
두 원기둥의 톱니가 맞물려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도록 하려다 보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 두 기둥이 맞물려 회전하는 틀이 만들어지고, 손잡이가 달렸다.
“자, 세크리. 한 번 돌려 볼래?”
“네!”
구르르르. 구르르.
평범한 개미의 신체로는 손잡이를 돌릴 수 없지만, 앞발 네 개를 손처럼 사용하는 스마트 워커는 가능했다.
“이건 스마트 워커인 저와 엔지만 돌릴 수 있겠어요.”
“그렇지, 거기다 앞발로 돌리는 건 힘이 많이 들어.”
‘페달을 만들어야겠어. 체중까지 실린 힘이라면 두 원기둥을 움직이기 쉬울 거야.’
페달의 회전 에너지로 기둥을 돌리려면 어떤 부품들이 필요할지 생각해 봤다.
자전거는 체인을 이용해 바퀴를 굴리지만, 체인을 만들 수 없으니 바퀴 자체에 페달을 달게 했다.
바퀴가 클수록 얻는 회전력은 크지만, 힘이 더 들게 분명할 터.
안장도 올려야 하니 무식하게 크게 만들 수도 없었다.
적당한 크기로 만든 후 기둥과 연결된 톱니와 맞물리게 해야 한다.
이때 맞물린 톱니의 크기에 따라 들어가는 힘과 얻을 수 있는 회전력이 달라진다.
즉, 작은 톱니와 맞물리게 할수록 더 큰 힘이 필요하지만, 얻는 회전력 또한 크고, 큰 톱니와 맞물리게 할수록 들어가는 힘을 적지만, 얻는 회전력 또한 약하다.
이공계가 아니어서 수학적으로 계산하진 못하니, 여러 톱니를 끼워 보며 적당한 크기를 찾기로 했다.
‘노가다만큼이나 정확한 방법이 없지.’
수많은 부품을 만들게 하고, 조립해서 개량의 개량을 거듭한 결과, 개미족에게 적합한 사탕수수 착즙기가 완성됐다.
‘아쉬워. 내게 인간의 손이 있다면 간단히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다못해 설계도를 그릴 수 있다면 이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거야’
나무로 만들어진 착즙기는 모형에 불과했다.
“기둥은 돌로 대체하고, 마모가 심한 핵심 부품들도 소재를 바꿔 보자.”
그렇게 만들어진 착즙기는 스마트 워커 한 마리가 자전거를 타듯 동력원이 되어 주면, 미니 워커들이 회전하는 돌기둥 사이로 사탕수수 줄기를 넣어 즙을 짜내는 구조였다.
아래로 떨어진 즙은 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하여 접착액으로 빚은 방수 항아리에 담기게 되고, 즙을 짜낸 줄기는 따로 빼냈다.
‘축축하네. 사탕수수 줄기는 톱밥으론 못 쓰겠어.’
사탕수수 줄기를 끓여 종이로 만들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종이가 필요 없으니 일단 지렁이 밥으로 쓰기로 했다.
“세크리, 지렁이 사육은 누가 맡고 있지?”
“마고트가 담당하고 있어요.”
지렁이가 늘어나고 지상 농장에서 사탕수수가 자라는 사이 둥지의 지하 4층이 개방되며 지하 1, 2, 3층의 확장 공사와 지하 5층의 개척 공사가 동시에 진행됐다.
산란방과 유충방이 지하 4층으로 이사하자 지하 3층이 텅 비게 되었다.
“지하 3층이 비었다. 필요하면 일리아나의 허락을 받고 써라.”
지하 3층은 상위종들에게 개방되어 먼저 차지하는 쪽이 임자였다.
‘산소가 부족하지는 않으려나…….’
지하로 갈수록 산소가 부족하지 않을까 싶어 일리아나에게 산란방 선정 기준을 물어봤다.
“그거야 마력 농도가 제일 높은 곳으로 정하는 거지.”
개미족은 호흡을 통해 마력을 흡수하여 에너지로 사용했기에 산소 농도보다 마력 농도를 더 중시했다.
‘산소는 없어도 되는 건가?’
내 상식과 달리 지하 깊은 곳일수록 빛나는 광물이 많고, 이끼와 식물도 잘 자라는 걸 봐선 마력이 산소를 대체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알기 위해 다양한 생물을 지하 5층까지 데려가 봤다.
암컷 고블린들은 지하로 내려갈수록 편안해했고, 루리아와 두 소녀는 답답해했다.
작은 곤충과 지렁이도 지하 5층에 가져가자, 지상보다 훨씬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흠… 신기하네.’
확인해 본 결과 인간에겐 산소가 필요했지만, 웬만한 생물과 식물은 산소가 없어도 마력만 충분하면 살아갈 수 있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