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무지성 공사, 그리고 깨어나는 솔져들
지하 4층은 수원을 따로 두어 매우 습한 환경이었고, 지하 3층까지만 온수가 돌아 온도가 낮은 편이었다.
“춥고… 찝찝해.”
페르의 산란량이 떨어질 것을 걱정한 일리아나가 나를 찾았다.
“페르 님의 산란량이 줄었어. 난방시설 공사 좀 부탁할게.”
“네, 알겠어요.”
디그파의 공사 팀 숫자도 늘릴 겸 지하 4층 난방 공사를 맡아 주기로 했다.
온수 탱크는 지하 2층에 있다.
탱크에서 위로 물을 공급하는 건 어렵지만, 아래로 공급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디그파, 4층 벽과 바닥을 지나가는 물길을 만들어서 탱크와 연결해. 물길은 얇아야 하고, 벽과 바닥을 촘촘히 메워야 해.”
물길의 시작과 끝이 물탱크와 연결되면, 끝부분을 가열한다.
가열된 물은 위로 올라가 물탱크에 들어가고, 물길에서 빠진 만큼 다시 온수를 빨아들인다.
그렇게 물이 순환하여 난방이 가동되는 것이다.
물길 공사는 페어리 워커인 디그파가 지휘했고, 100마리의 미니 워커가 투입됐다.
“물길은 작게 만드는 거다! 구멍을 메우면서 움직여!”
시간이 꽤 걸리는 프로젝트라 차근차근 진행했고, 공사 팀이 일하는 동안 지상 농장의 사탕수수가 조금씩 수확됐다.
수확된 사탕수수를 착즙기에 넣고 갈았다.
“달아요! 이건 꿀물인가요?”
처음 먹어 본 머쉬파가 놀라며 물었다.
“아니, 설탕수야.”
모인 설탕수를 열심히 끓이면 물엿 형태의 갈색 원당을 만들 수 있지만, 개미족은 달콤한 설탕수 자체로 만족하여 굳이 고생해서 만들 필요는 없었다.
나는 부하들에게 설탕수를 조금씩 유통하며 꿀에 대한 소비를 줄여 보려 했다.
내 의도와 달리 설탕수가 보급되자 스마트 워커가 대량으로 발생했고, 달콤한 걸 좋아하는 스마트 워커가 늘어나면서 꿀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이런…….’
거기다 아카시아 숲 개미족의 사정으로 거래가 차츰 줄어들더니, 우기가 시작되면서 거래가 완전히 끊겨 버렸다.
거래가 끊기기 전, 둥지에 남은 꿀을 모두 끌어모아 산란방에 공급했고, 그 덕인지 페르가 고치를 틀었다.
‘페르도 완전변태인가?’
우기와 함께 암컷 갑각충이 둥지로 들어와 알을 낳기 시작했다.
갑각충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100개에서 200개 정도의 알을 낳았고, 가끔 에너지를 모두 쏟은 개체는 죽었다.
그 사체는 꿀보다 귀한 자원이라 3차 진화를 앞둔 포스에게 우선적으로 보내졌다.
“영양은 고기가 최고지.”
포스는 달콤한 영양보단 갑각충과 같은 강력한 존재로 만든 식량을 더 좋아했다.
설탕수를 뽑아낸 사탕수수 찌꺼기 덕에 지렁이는 순조롭게 늘어나며 분변토 생산량이 차츰 늘어났다.
굼벵이 영양은 겨울이 끝나갈 무렵 완성되다보니, 그동안은 지렁이 영양으로 단백질 영양을 대체했다.
버섯 영양도 단백질이 풍부한 편이었고, 사탕수수를 수확하면서 생산 품목도 다양해졌다.
영양이 풍족하니 더 많은 개미를 부릴 수 있게 됐지만, 페르가 고치 상태라 무소속 개미가 희소해졌다.
‘빨리 깨어나야 할 텐데.’
신입 일개미들이 없으니 무수한 개미가 진화하고 있음에도 군체가 침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분 탓이 아니잖아!’
스마트 워커나 자이언트가 많아질수록 군체의 생산량은 줄고 섭취량만 급증하니, 진정으로 망해가고 있었다.
‘내가 없었으면 일찍이 망했어!’
어떻게든 군체를 유지하기 위해 일감을 꾸준히 뿌려 영양이 돌게 했다.
‘빅 워커가 점점 줄고 있어. 이대론 늘어나는 2차 진화종의 식량 소모량을 감당할 수 없어.’
식량 수요에 대한 대비로 분변토를 활용한 지하 농지를 조성하게 했다.
“움직여! 수원을 확보해! 더 넓게 심어! 마광석을 가져와!”
지하 3층에 사탕수수 농장을 조성하고, 개미들에게 식용 식물을 구해 오게 하여 인간과 고블린에게 먹여 봤다.
꾸준한 관찰 끝에 인간과 고블린이 식용으로 쓰는 식물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고블린은 독초건 약초건 가리지 않고 먹으니, 따로 챙겨 줄 필요가 없었다.
인간의 경우 귀리, 보리, 밀을 주식으로 먹으며, 배추, 상추, 양파, 파, 당근, 파슬리, 아스파라거스 등도 먹었다.
그 외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채소를 취급했는데, 개미족은 잡식성임에도 채소를 좋아하지 않아 인간을 위한 밭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인간용 채소밭의 관리를 루리아에게 맡긴 나는 지하 곳곳에 밭을 만들어 유용해 보이는 작물을 가져와 심었다.
한바탕 공사가 끝난 뒤, 개미 둥지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지하 1층에는 포메온이 상주하는 경비소 본부.
그리고 해체 팀, 사냥 팀, 운반 팀의 휴게실도 있었다.
버섯 농장, 톱밥 생산처, 갑각충 산란처, 굼벵이 사육장 등 생산 시설들도 1층에 집중된 상태였다.
지하 2층에는 나와 메디가 거주하는 무덤과 치료실이 있고, 인간과 고블린의 숙소가 위치했다.
루리아와 두 소녀가 불과 관련된 난방, 온천, 숯 생산 등을 맡고 있고, 암컷 고블린들은 무덤의 해체 일과 가죽 공방 일을 맡았다.
공실이 된 지하 3층에는 지렁이 양식장, 사탕수수 착즙기가 들어섰고, 확장 공사로 공간을 더욱 넓혀 사탕수수 농장을 조성했다.
마찬가지로 지하 1층과 2층도 확장 공사가 진행되며 수원이 여럿 생겨났다.
풍부해진 물을 활용해 지하 2층에 약초밭과 채소밭을 늘렸고, 지하 1층의 버섯 농장을 확장할 수 있었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장로 회의에서 여덟 번째 장로가 결정됐다.
아카시아 숲 개미와의 거래를 통해 많은 양의 꿀을 확보하고 사탕수수 재배와 지렁이 양식 등으로 풍족한 겨울을 준비한 나였지만, 사냥 실적으론 서쪽 개척에 뛰어든 블러리가 압도적인 평가를 받아 여덟 번째 장로로 임명됐다.
페르와 케어는 고치 상태라 포스와 장로들이 블러리를 장로로 임명했고, 장로가 된 블러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전보다 위협적인 기운을 풍기게 됐다.
“축하해요, 블러리 님.”
“나의 승리다. 패배자인 널 갈기갈기 썰어 주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야.”
장로로 임명된 블러리는 매우 지쳐 있었다.
“다크, 네 이름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전부터 장로 후보로 여겨지던 자이언트 솔져가 둘이나 있었어. 메가피르와 게르피아, 두 놈 모두 힘으로는 둥지 최고라 할 수 있는 녀석들이지.”
블러리가 둥지 내의 다른 장로 후보들을 거론했다.
“놈들뿐만이 아니야. 장로가 되고 싶어 하는 자이언트 솔져는 차고 넘치지. 그들이 이번 장로 선발 시험에 참여하지 않은 건, 내가 있기 때문이었어.”
블러리는 날카로운 앞발로 섬뜩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놈들은 날 피했지만, 넌 당당히 맞섰다.”
사실 맞서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선전포고를 해 오는데, 피했다간 뭔 짓을 할지 몰라 적당히 상대하는 시늉을 해 줬을 뿐.
“아홉 번째 장로가 되려면, 지금보다 훨씬 높은 성과를 내야 될 거야.”
수많은 개미의 꿈이자 목표.
그게 바로 장로였다.
“넌 내가 인정한 몇 안 되는 개미다. 너라면 자이언트 솔져들을 제치고 아홉 번째 장로가 될 수 있겠지.”
블러리는 날 아홉 번째 장로로 점찍은 듯했다.
‘장로… 귀족 계급이라 할 수 있는 솔져들이 탐낼 만큼 좋은 자리인가?’
나는 둥지 내에서 불편 없이 지내고 있다 보니, 장로직이 크게 와닿진 않았다.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만이야.’
겨울이 되자 사냥감이 줄었다.
사냥 개미와 정찰 개미가 둥지에 틀어박혔고, 외부에서 반입되는 식량이 없자 운반 개미, 해체 개미 등도 겨울잠을 준비했다.
가만히 두면 대부분 개미가 겨울잠에 들 것 같았다.
겨울 동안 쉬게 둘 수는 없으니, 일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세크리, 창고의 영양은 충분해?”
“네! 한차례 수확한 사탕수수도 있어서 설탕수도 충분해요.”
“그럼… 한번 써 보자.”
봄과 여름에 축적한 영양 창고를 열어 할 일 없는 개미들을 끌어모아 공사 현장으로 보내 버렸다.
“할 일 없으면, 공사나 해라!”
생산되는 식량과 창고의 영양이 소진되는 만큼 공사 현장이 확대됐고, 둥지 공사의 총 책임자인 언더리페는 난생처음 겪는 확장 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땅을 파라! 돌을 날라라! 벽을 무너트리고 기둥을 세워라! 거기, 리페파는 위쪽 보수를 맡아라! 디그파와 미니 워커들은 날 따라다니며 천장과 기둥을 강화해라! 자이언트 워커들은 나와 함께 지하 5층을 넓힌다!”
언더리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겨우내 확장 공사에 힘썼다.
자이언트 워커 전원이 동원된 둥지 공사는 과할 정도의 열기를 뿜어내며 나의 영양 창고를 축냈다.
***
한겨울, 거대 굼벵이가 번데기가 되기 직전.
수컷 굼벵이와 작은 굼벵이는 식량 창고로 보내지고, 잘 성장한 암컷 굼벵이들만 번데기가 되어 갑각충 산란처로 옮겨졌다.
중급 수준인 굼벵이 영양은 따로 관리되어 아직 3차 진화를 이루지 못한 포스의 특식으로 나가거나, 자이언트가 될 가능성이 높은 빅 솔져나 빅 워커에게 주어졌다.
겨울이 끝나갈 때 쯤, 다크가 축적한 영양도 바닥이 드러났고, 과열된 공사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거대 공동을 창조해 냈다.
“여긴 도대체…….”
지하 5층 공사 현장에 방문한 일리아나의 의문성에 언더리페는 침묵했다.
“언더리페… 도대체 뭘 하려고 이렇게 만든 거야?”
높아도 너무 높은 천장과 탁 트인 공동.
“나도 모르겠다. 파다 보니 이렇게 됐을 뿐.”
마력 농도는 풍부했지만, 공사 책임자인 언더리페조차 용도를 알 수 없는 거대 공동은 개미족의 거주처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다시 메울 수도 없고…….”
난감해하는 일리아나에게 언더리페가 사과했다.
“미안하다. 여긴 포기하고 지하 6층을 뚫겠다.”
***
개미족에게 버려진 지하 5층 공동은 공사 팀의 스폰서였던 내 차지가 됐다.
나는 그곳에 지렁이를 풀어 토양을 가꾸기 시작했다.
‘이 정도 높이면 숲에 보이던 거대 나무를 키워도 되겠어.’
지금이야 숲에서 땔감과 톱밥을 구해 오고 있지만, 숲의 자원은 유한하니, 추후 부족해질 나무 자원을 지금부터 심어 둘 생각이었다.
기왕 심을 거면 당도가 높은 과일이 열리면서, 잎은 약재로 쓰고, 나무는 목재로 사용되는… 버릴 부위가 없는 나무를 심고 싶었다.
‘역시 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게 최고지.’
***
개미족 지하 깊숙이 위치한 곳.
“블러리 님이 여덟 번째 장로가 됐다고 합니다.”
가수면 상태에 있던 자이언트 솔져 메가피르가 깨어났다.
“녀석이 드디어…….”
“그리고 포스 님을 마지막으로 세 여왕이 모두 고치를 틀었어요.”
메가피르가 시베리아 호랑이만 한 몸을 들썩였다.
“여왕들이 드디어…….”
“네. 게르피아 님과 다른 자이언트 솔져님들도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렇군.”
그동안 군체의 식량을 아끼기 위해 숨죽이고 있던 자이언트 솔져들이 봄에 맞춰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봄이 오기 전 포스가 고치를 틀었고, 날이 따뜻해지자 그동안 본 적 없는 자이언트 솔져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저 녀석들 뭐지? 친위대는 아닌 것 같은데?’
페로몬에서 풍기는 위압감이 그동안 봐 온 자이언트 솔져들과는 격이 달랐다.
‘저건… 그래. 장로가 되기 전의 블러리 같아.’
그들은 여왕들이 진화하면 아홉 번째 장로가 필요해질 것이라며 부대원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블러리가 말해 준 메가피르와 게르피아도 그중 하나였다.
‘저 녀석들이 블러리 바로 아래 서열이던 놈들이군.’
개미족 전체가 치열한 전공 경쟁에 돌입하는 분위기였다.
‘한동안 시끄럽겠어.’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