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논공행상(論功行賞)
고치가 된 일리아나와 제르다코.
그들의 진화는 여왕들처럼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일리아나가 고치에서 나왔고, 다음날 제르다코도 고치에서 나왔다.
일리아나는 케어와 같은 계열인 워커맨으로 진화했고, 제르다코는 포스와 같은 계열인 가디언으로 진화했다.
“너마저 수호종이라니…….”
“죄송합니다, 포스 님.”
포스와 제르다코는 자신들이 울트라로 진화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면서, 수호종이 된 이유가 설탕수와 꿀인 것 같다며 무투파 개미들에게 달콤한 영양의 섭취를 금지시켰다.
“무력 특화종으로 진화하고 싶다면 고기 영양을 주식으로 삼아라!”
나 또한 무투파 개미로 여겨져 달콤한 영양을 금지당했지만, 인간형으로 진화하고 싶었기에 몰래 먹었다.
가을이 끝나기 전에 서쪽 전선의 개미들이 복귀했다.
둥지를 오가는 채집 개미들이 없어 영역 방어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약 600마리의 개미가 서쪽으로 갔는데, 돌아온 개미는 고작 200마리.
함정까지 파 가며 싸웠음에도 피해가 상당했다.
‘고블린들도 만만치 않았나 보네.’
이제 둥지의 인구는 1000마리 이하로 떨어졌고, 그중 400마리가 스몰 워커였다.
게다가 600마리의 군체원들도 부상자가 절반이 넘어 사실상 200마리의 개미가 둥지를 지탱하고 있었다.
버섯 농장, 사탕수수 농장, 굼벵이 사육장, 지렁이 사육장 등등, 시설들은 건재하나 투입할 인력이 없는 상황.
일단 스몰 워커들을 가용했지만, 0차 진화종은 노동 효율이 떨어졌다.
“다크 님, 장로분들이 지원 요청을 해 와요.”
“누가 제일 급한 것 같아?”
“포메온 님이요. 경비 개미가 전멸했다고…….”
“피어레스, 무력 부대를 이끌고 포메온을 지원해 줘.”
“네!”
말벌족의 사체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일리아나가 부대장급과 부관급 개미를 산란방에 불러들였다.
“이번 침공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상당량의 상급 영양을 확보할 수 있었어.”
상급 영양은 3차 진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다만, 모든 개미에게 공평하게 돌아갈 순 없었다.
“그러니 공로에 따라 차등 분배 하려고 해,”
그래서 필요한 게 논공행상이었다.
포스, 페르, 케어, 일리아나, 제르다코는 3차 진화를 달성했기에 0순위 공로자에 등극했음에도 주어지는 상이 없었다.
“난 입도 아니야? 왜 날 빼는 거야?”
거기에 대해 페르가 불만을 토했지만, 지금 같이 군체가 위태로운 시국에는 장로들의 권한이 여왕을 앞섰다.
“페르 님, 지금 우리에게는 한 마리라도 더 많은 3차 진화종이 필요해요. 그러니 내년까지만 참아 주세요.”
“나도 상급 영양을 먹고 싶다고! 그럼 다크가 데리고 있는 인간들이라도 가져와!”
페르가 투정부렸지만, 다행히 내겐 인간을 내줄 수 없는 명분이 있었다.
“페르 님, 그럼 난방은 누가 돌리죠? 거기다 기의병 무기의 열처리는…….”
“쳇,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페르가 삐졌지만, 논공은 계속됐다.
1등 공로자로는 동쪽 숲 일부를 회복해 낸 나와 고블린 촌락 열두 개를 홀로 초토화시킨 블러리, 기지를 발휘해 고블린 침공을 막아 낸 트라이와 언더리페, 60마리 규모의 말벌족을 학살한 나우피어가 등극했다.
“일리아나 님, 제겐 영양을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다크…….”
나는 자체적으로 확보해 둔 상급 영양이 있어 겸양을 살짝 떨었고, 그에 감동한 장로들이 내게 아홉 번째 장로직을 주기로 했다.
“다크 님이 장로라니!”
메디를 비롯한 간부들이 기뻐해 주니 나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특별한 능력을 각성한 장로를 각성 개미라 했지.’
같은 1등 공로자인 언더리페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언더리페님의 각성 능력은 뭐에요?”
3장로이니 당연히 각성 개미일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없다. 각성 개미는 일리아나와 제르다코 뿐이야.”
“아…….”
각성 개미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2등 공로자로는 포메온, 메가피르, 게르피아, 메디, 피어레스가 지명됐다.
“피어레스는 이해가 가지만, 전공도 없는 하이 포션 워커가 나보다 공이 크다니… 조금 이상하군!”
서쪽 전선에서 복귀한 부대장급 솔져 하나가 이의를 제기하자 장내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들 같은 생각이야?”
일리아나의 질문에 솔져들이 하나둘 나섰다.
“난 메디 덕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의료 개미가 회복시킨 사냥 개미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것 같군. 만약 의료 개미들이 없었다면 네 놈의 부대는 일찍이 해체됐을 텐데 말이지.”
제르피아와 헤르피아도 가세했다.
“메가피르 님과 게르피아 님도 메디의 치료 덕에 살 수 있었다.”
“설마 네놈은 지금 메가피르 님과 게르피아 님이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여론의 몰매를 맞은 솔져가 급급히 사과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내가 실언했다. 메디를 공로자로 인정한다.”
솔져들의 인정을 받은 메디가 감격하자 케어가 기특해했다.
“메디, 난 네가 1등 공로자라 생각한단다.”
“케어님… 감사합니다.”
나머지 장로들과 부대장급 솔져들이 3등 공로자가 됐고, 부관급 솔져들이 4등 공로자, 이번 사태에서 살아남은 개미들이 5등 공로자로 모두에게 상급 영양이 조금씩은 주어졌다.
논공행상이 끝나고 나의 장로 임명식이 이어졌다.
장로들이 하나씩 내게 다가와 더듬이를 엮었다.
“1장로 일리아나, 다크를 아홉 번째 장로로 인정한다.”
“2장로 제르다코, 다크를 아홉 번째 장로로 인정한다.”
여덟 명의 장로, 그리고 세 여왕에게 인정을 받자 군체와 하나가 된 느낌과 함께 힘이 흘러들어왔다.
‘군체와 내가 연결된 거야.’
장로가 무엇인지, 장로가 되고서야 알게 됐다.
더불어 장로라는 직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예전의 내가 바보 같아졌다.
‘이게 바로 장로의 힘…….’
장로는 군체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두뇌이자 무력의 중추기도 했다.
‘간부들의 페로몬도 짙어졌어.’
낙수 효과를 누리듯 간부들이 강해진 게 느껴졌다.
“장로가 된 걸 축하한다. 다크.”
자존심 강한 자이언트 솔져들이 내게 머리를 숙여 오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장로가 된 기념으로 한 마디 해주는 게 어때? 앞으로의 포부 같은 거 말이야.”
일리아나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나는 부하들을 떠올리며 개미들의 니즈에 맞게 최고의 스피치를 선보였다.
“우리는 이미 풍족하다! 하지만 너희는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끼겠지!”
개미의 일 욕심은 끝이 없다.
“군체에 충분히 공헌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것도 안다.”
그들의 군체에 대한 사랑 또한 깊다.
“나는 군체를 끊임없이 개혁할 것이다! 따라오지 못하는 녀석은 버리고 간다!”
그들이 원하는 장로는 단순했다.
“개혁은 군체를 발전시킬 것이고,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수많은 일감이 생겨나겠지. 다만, 변화에는 큰 희생이 따른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과로사하는 그런 지옥 같은 풍경을 상상해 봐라!”
기계처럼 갈려 나가는 지옥이야말로 개미들이 원하는 유토피아.
“그것이 장로가 된 내가 너희들에게 가져다 줄 미래다!”
장내의 개미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페로몬을 뿌렸고, 여왕들과 장로들은 날 대견해 했다.
그리고 난 이날부터 무덤지기 다크 대신 개혁의 장로 다크라고 불리게 됐다.
논공행상과 임명식이 끝나고, 나는 각 부서를 돌며 둥지 정상화에 힘썼다.
“쉬지 말고 이쪽 좀 도와줘.”
“난 부대를 정비해야 한다.”
“네 부대는 이미 해체됐잖아. 사냥 개미가 충원되는 동안은 둥지 일 좀 돕자.”
“하지만… 난 부대장급 사냥 개미인데…….”
“난 장로인데.”
“알겠다. 돕겠다.”
장로임을 내세우면 동급이던 솔져조차 일꾼으로 부릴 수 있었다.
‘좋아. 인력이 충원될 때까지 솔져들을 굴리는 거야.’
개미들에게 분배된 상급 영양의 효과로 개미들이 하나둘 진화하기 시작했다.
자이언트 워커인 언더리페는 탈피를 거쳐 진화했다.
“케어 님, 전 무슨 종으로 진화한 건가요?”
“지휘 특화종인 하이 워커구나.”
하이 워커는 자이언트 솔져 정도의 크기였고, 가끔 배 쪽 갈색 무늬에서 빛이 들어왔다.
‘자체 발광 능력인가?’
발광 능력 이외에는 염화를 잘 다뤘고, 워커에게 작용하는 체력 회복 페로몬, 신체 강화 페로몬, 소통 강화 페로몬, 진화 촉진 페로몬, 소집 페로몬 등이 있었다.
‘현장 감독과 신인 육성에 특화된 능력이야.’
거기다 뛰어난 페로몬 감지력으로 인력이 부족한 곳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공사 개미 절반은 지렁이 사육을 지원하고, 나머지 절반은 사탕수수 수확을 도와라!”
나는 하이 워커로 진화한 언더리페의 지원 덕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팩토리 워커인 네트리는 하이 팩토리로 진화했다.
네트리의 외형적 변화로는 몸이 조금 커지고, 분홍 무늬가 가끔 빛을 발하게 됐다.
하이 팩토리가 생산한 영양은 50% 정도 품질 보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태어나는 스몰 워커가 우량해졌고, 1차 진화 또한 빠르게 이루어졌다.
네트리는 영양의 압축과 숙성으로 진화를 촉진시키는 돌을 만들 수 있는데, 개미들은 그걸 진화석이라 칭했다.
하급 영양으로 1차 진화석.
중급 영양으로 2차 진화석.
상급 영양으로 3차 진화석.
물론 진화석은 진화를 촉진시키는 매개체일 뿐이고, 자이언트 계열이나 스마트 계열에는 효과가 있지만 특수종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겨우 숨만 붙어 있던 메가피르와 게르피아는 포메온과 비슷한 시기에 진화하여 목숨을 건졌고, 셋은 무투파 개미족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울트라가 됐다.
‘무식하게 큰 개미가 뭐가 좋다고… 단단해 봐야 불로 지지면 죽는 건 매한가지인데…….’
울트라의 탄생으로 산란방에선 축하 파티가 벌어졌고, 포메온의 높은 콧대가 한층 더 높아졌다.
“제르다코, 언제 한 번 붙어 볼까?”
“각성도 못한 주제에 까불지 마라.”
곰보다 더 큰 덩치의 울트라는 먹기도 많이 먹었다.
연비가 좋지 않아 둥지에선 반쯤 절전 모드로 지내야 했고, 그렇기에 전투 상황을 제외하면 매우 느리게 움직여야 했다.
트라이와 블러리는 고치를 거쳐 진화했다.
트라이는 모두가 예상한 대로 워커맨으로 진화했고, 블러리는 인간형 개미인 소드 앤트로 진화했다.
소드 앤트는 워커맨보다 외골격 비중이 살짝 높으며 개미 배의 무늬는 은색이었고, 태생적으로 두 자루의 각기 길이가 다른 흑색 직도를 지녔다.
가디언인 제르다코도 우습게 여기는 포메온조차 블러리의 광기 가득한 은빛 동공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처럼 쭈그렸다.
“포스 님, 저랑 한판 붙어 보시죠!”
하극상이 벌어졌지만 당사자인 포스는 기뻐하는 눈치였고,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여왕들과 장로들의 입회하에 포스와 블러리의 대련이 시작됐다.
쌍검의 블러리가 나의 감각을 넘어선 속도로 움직이며 포스를 공격했다.
포스는 방어적인 자세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고, 주변 공기가 연쇄적으로 터지며 폭음을 일으켰다.
나로서는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3차 진화종인 여왕과 장로들은 보이는 눈치였다.
‘나만 못 보고 있어.’
제르다코와 포메온의 말소리가 들렸다.
“끝났군.”
“포스 님의 상대가 되려면 갑각왕인 헤라클레스 정도는 돼야지.”
제르다코에게 물어봤다.
“지금 무슨 상황인가요?”
“간단하다. 블러리의 공격은 포스 님에게 통하지 않고, 포스 님의 공격은 블러리에게 먹히고 있다.”
아무리 봐도 포스가 일반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데…….
내가 아리송해 하자 케어가 친절히 설명해 줬다.
“아무리 포스라도 속도 중심인 소드 앤트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단다.”
이어진 설명으로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마력을 움직여 타격 부위를 막아 내고 있는 거지. 그와 동시에 압축한 마력을 허공에 터트려 블러리에게 타격을 주고 있단다.”
마력을 그 정도로 다룰 수도 있다니…….
“극한의 마력 제어력을 갖춘 포스만이 가능한 기예야.”
“그렇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블러리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쓰러진 그는 웃고 있었다.
블러리와 포스의 대련을 보며 느꼈다.
2차 진화종과 3차 진화종 사이에 존재하는 두꺼운 벽과 무투파 인간형 개미의 압도적인 전투력을…….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