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수련의 시작
3차 진화종의 포텐셜이 높다는 건 언젠가 진화할 내게도 좋은 이야기였다.
간부들에겐 충분한 상급 영양과 함께 마력 강화액이 주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디, 세크리, 머쉬파, 피어레스, 나우피어 등이 고치가 됐고, 고맙게도 모두가 인간형 개미로 진화해 줬다.
‘꿀과 설탕수를 충분히 먹여 두길 잘했어.’
“큭, 내가 가디언이라니…….”
피어레스만은 울트라로 진화하지 못한 걸 침울해했다.
하이 포션 워커였던 메디는 메딕 앤트가 됐다.
메딕 앤트는 워커맨 수준의 흑색 외골격을 지녔고, 눈동자, 머리카락, 배 무늬 등이 초록색이었다.
‘저건 촉수인가?’
메디의 꼬리뼈 부근에는 개미 배 외에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네 개의 뾰족한 촉수가 있었다.
능력으론 염화, 마신어, 독 내성, 생체 투시가 있고, 섭취한 식물에서 약성과 독성을 추출할 수 있었다.
추출 과정은 개미 배에서 일어나고, 배출은 촉수로 했다.
촉수는 배출뿐 아니라 흡입까지도 할 수 있었다.
엑스레이가 되는 눈, 추출기가 되는 배, 주사위와 석션이 되는 촉수.
‘첨단 의료 기기잖아!’
“치료다! 치료! 이건 속을 뜯어 고쳐야겠는걸!”
“잠… 잠깐만. 난 그 정도로 다치지 않… 크악!”
메디의 진화로 부상자의 사망률이 급감함과 동시에 2, 3차 진화종이 급증했다.
세크리는 워커맨으로 진화했다.
워커 퀸과 워커맨은 눈동자, 무늬, 머리카락 등이 금색이고, 개미 배의 크기에서 차이가 났다.
“죄송해요. 워커맨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럴 리가. 넌 머리가 좋잖아.”
워커맨의 능력으론 염화와 마신어 외에 특별한 게 없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며칠 동안 관찰해 보니, 세크리의 계산과 이해력은 나의 상식을 초월해 있었고, 손재주 또한 남달랐다.
거기다 도구를 쥐여 주면 뭐든 잘 다루기까지.
나는 이것이 워커맨의 능력이란 확신이 들었다.
‘도구를 제작하고 활용하는 능력이야.’
페어리 워커인 머쉬파는 하이 페어리로 진화했다.
외형의 변화로는 외골격 비중이 조금 늘었고, 갈색 무늬에 빛이 들어왔다.
‘반딧불 같군’
거기다 귀엽게 느껴지던 외모도 성숙함이 더해졌다.
진화한 머쉬파는 만능 가루의 활용 폭이 늘었다.
“다크 님, 이거 봐요. 이렇게 빛을 반사할 수도 있어요.”
“빛을 굴절시키는 능력인가? 잘 쓰면 모습을 감출 수도 있겠는걸?”
“네? 그래 봐야 더듬이 감각에 잡힐 텐데요. 의미 없지 않아요?”
“활용도가 높은 능력이야. 잘 연구해 봐.”
피어레스는 가디언으로 진화했다.
능력은 괴력과 방어력.
그동안 스마트 워커들이 무거워서 쓰지 못한 말벌창을 피어레스는 가볍게 휘둘렀다.
휘익! 휘익!
“나무창처럼 잘 부러지지도 않고, 이거 괜찮네요.”
“대단하네.”
나우피어는 눈동자, 머리카락, 배 무늬가 은색인 소드 앤트로 진화했고, 능력으론 뛰어난 쌍검술과 쾌속한 스피드를 가지게 됐다.
“다크 님, 어때요? 똑같이 조각했어요. 여기 선물이요.”
“어… 고마워.”
둥지 공인으로 무투파 장로급 전력을 지닌 나우피어였지만, 짧은 쪽의 직도를 이용한 조각이 취미였다.
간부들이 진화하는 동안에도 많은 개미가 탈피를 거쳐 진화하거나 고치가 됐다.
그러나 모두 무사히 진화한 건 아니었다.
고치의 절반은 그대로 썩어 버렸고, 탈피 과정에서 죽은 개미도 여럿 있었다.
개미족에게 3차 진화는 큰 리스크를 동반하는 듯했다.
‘뭐야? 고치를 틀면 절반은 죽잖아!’
겨울이 왔을 무렵 킬러 퀸 영양을 섭취한 600마리의 개미 중 150마리가 진화했고, 150마리가 진화 도중 죽었다.
의외인 건 자이언트 솔져 대부분이 울트라로 진화했다는 것이었다.
고치를 거쳐 진화하는 인간형 개미와 달리 탈피를 통해 진화하는 울트라는 도중에 죽을 확률이 비교적 낮았다.
‘울트라가 흔해졌잖아.’
어제의 전우가 진화하려다가 죽어 있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불안감이 커져갈 때, 디그파와 마고트가 진화했다.
‘휴… 무사히 진화해서 다행이야.’
둘은 각각 하이 페어리와 워커맨이 됐다.
간부들이 진화할 때마다 나 또한 강해졌지만, 뒤처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못했다.
‘캐리도 나와 같은 기분이려나?’
장로 중에서 아직 2차 진화종인 건, 나와 캐리뿐.
그런 캐리가 하이 워커로 진화하면서 내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내가 꼴찌라니…….’
엘리트였던 자존심이 상했지만, 냉정은 잃지 않았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해.’
나는 지금의 내 상태를 점검해 봤다.
말벌족과의 전쟁으로 내 마석은 수십 번에 걸쳐 한계를 확장해 왔고, 지금에 이르러선 더는 커지지 않았다.
‘마력 총량을 키우는 수련은 의미가 없어졌어.’
양적 수련을 마쳤으니 질적 수련만이 남았다.
순간 블러리와 포스의 대련이 떠올랐다.
‘역시 제어력을 키워야겠지…….’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기 전, 다른 녀석들의 진화를 살펴봤다.
‘분명 룰이 있어.’
솔져로 태어난 개미는 통상 빅 솔져로 진화했지만, 간혹 턱 사용 숙련도가 높은 개미는 시절 솔져로 진화했다
‘솔져들의 진화 트리는 워커와는 조금 달라.’
빅 솔져는 자이언트 솔져로 진화하고 시절 솔져는 블레이드 솔져로 진화한다.
솔져의 2차 진화에는 예외가 없었다.
자이언트 솔져는 통상 울트라로 진화했지만, 간혹 꿀을 충분히 섭취하거나 지휘력이 높은 개미는 가디언이 된다.
‘진화 도중의 사망률은 가디언이 제일 높았어.’
솔져들의 진화 트리를 생각해볼 때 진화에는 일반 진화와 특수 진화가 있는 것 같았다.
워커들의 진화 트리는 솔져보다는 복잡했다.
스몰 워커의 통상 진화는 빅 워커였고, 턱의 숙련도가 높다면 시절 워커, 노동량이 극심하다면 미니 워커, 약초를 다루다 보면 포션 워커, 영양 제조 숙련도가 높으면 팩토리 워커가 됐다.
빅 워커의 통상 진화는 자이언트 워커였고, 지능이 높다면 스마트 워커, 정찰 생존율이 높다면 플라이 워커, 산성액 방출 숙련도가 높다면 액시드 워커가 된다.
시절 워커는 모두 자이언트 시절 워커로 진화했다.
미니 계열의 솔져가 발생하지 않듯 시절 워커가 최강종인 블레이드로 진화하진 못했다.
미니 워커는 페어리 워커로만 진화한다.
포션 워커는 통상 자이언트 포션 워커로 진화하여 생산량을 늘렸지만, 지능이 높은 포션 워커는 하이 포션 워커로 진화하여 약성을 강화했다.
‘뭐, 꿀을 충분히 먹인 의료 개미 중에는 하이 포션 워커가 더 많지만…….’
2차 진화종인 팩토리 워커는 통상 자이언트 팩토리로 진화하지만, 지능이 높으면 네트리처럼 하이 팩토리로 진화하여 영양 품질을 높였다.
자이언트 워커는 가디언으로 진화하는 경우가 없었고, 통상 하드 워커로 진화하며, 지능과 지휘력이 높은 경우 하이 워커로 진화했다.
통상 진화와 특수 진화.
솔져와 워커.
‘알 것 같아.’
나는 동족 포식의 본능을 극복하여 블랙 워커가 됐다.
블랙 워커는 흑마력을 쌓는 종이었고, 흑마력은 흔한 마력과 달리 주변 생물의 부정적 감정에서 발생하며 살행을 통해서도 쌓을 수 있다.
그런 흑마력의 특성 덕에 말벌족을 학살하여 대량의 흑마력을 쌓아왔다.
‘살행을 통해 쌓는 흑마력과 호흡을 통해 얻는 흑마력이 같을까?’
진화에 대한 의문이 해소된 나는 흑마력에 대해 깊게 고찰했다.
‘인간에게서 파생된 흑마력과 고블린에게서 파생된 흑마력이 같을까?’
자연 속 마력이 다양성을 갖추고 있듯, 흑마력 또한 다양성을 갖추고 있었고, 나는 다양하게 뒤섞인 흑마력을 체내에 순환시켜 정제해 왔다.
정제된 흑마력은 나와 긴밀히 연결되어 몸속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지만, 외부로 내보내면 다양한 흑마력과 섞여 연결이 끊어졌다.
‘지금 내 제어력으론 신체 강화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제어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흑마력과의 연결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하고, 정제되지 않은 흑마력에 대한 간섭력도 높일 필요가 있었다.
‘차근차근 해 보자.’
한동안 수련에 들어갈 것을 세크리에게 알린 나는 흑마력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제어력을 끌어올리는 수련을 시작했다.
‘정제되지 않은 흑마력에 대한 간섭은 어려워.’
‘정제 속도를 올려야 해.’
‘…그렇다면 좀 더 효율적인 정제 방법을 찾아야 해.’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고, 그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수련이 이어질수록 풀어야 할 과제가 첩첩산중으로 쌓이기만 할 뿐, 해결책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동안 난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
흑마력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며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이는 작지 않은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난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 봐야 해! 마력과 흑마력이 무엇인지 보고 느껴야 해!’
식음을 전폐하고 절전 모드에 들어간 나는 기감을 예리하게 다듬었다.
무아지경에 빠져든 나는 마력과 흑마력을 관찰하며 나와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관조할 수 있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를수록 나의 기감이 예리해졌다.
‘정제된 흑마력과 정제되기 전의 흑마력에는 차이가 있어.’
‘어떤 흑마력을 정제하냐에 따라 달라.’
‘정제한 게 아니야… 나와 연결된 흑마력을 섞는 거였어!’
‘일반 마력과 흑마력은 어떻게 다른 거지?’
‘흑마력 사이에서도 다름이 있고, 마력들도 다양해. 이들의 차이를 아는 게 중요할까?’
깨달음은 불현듯 찾아오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와 반대로 시시때때로 번민에 빠졌다.
“아냐, 뭔지를 알아야 수련 방향을 잡을 수 있어. 방향이 옳아야 내가 원하는 진화를 선택할 수 있는 거야!’
마력의 발생 과정.
흑마력의 발생 과정.
흑마력의 흡수 과정.
하나씩 알아 갈수록 기감이 확장됐고, 흑마력과의 연결이 수월해졌다.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마력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렸다.
‘그렇군. 그동안 착각하고 있었어.’
평소에 개미들이 느끼는 마력은 속성 마력이다.
그래서 나는 흑마력이 어둠 속성 마력의 일종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흑마력은 속성 마력과는 달라.’
속성 마력은 마력과 속성이 합쳐진 에너지였지만, 흑마력은 그렇지 않았다.
‘흑마력은 속성 마력에 부정 속성이 더해진 거야,’
부정 속성이란 생물의 부정적인 감정 혹은 개념에서 발생하는 속성을 의미했다.
공포, 질투, 탐욕, 절망, 증오, 원망 같은 감정이나 죽음, 어둠, 파괴 같은 개념.
그러한 이유에서 흑마력은 속성 마력의 성질을 한층 더 강화한 상위 호환 격인 마력이었고, 그 다양성은 속성 마력의 종류와 부정 속성의 종류를 곱한 것만큼이나 많았다.
무수히 다양한 흑마력이 뒤섞인 나의 마력은 성질을 알 수 없는 혼탁 그 자체.
‘혼탁이라…….’
그동안 내가 정제했다고 생각한 것도 그저 체내에 떠도는 흑마력을 기존 흑마력과 섞는 과정에 불과했다.
흑마력이 천천히 불어날 때는 괜찮지만, 급속히 불어날 때 제대로 섞어 주지 않으면 흑마력에 대한 제어력이 감소했다.
‘쌓을수록 제어가 힘든 힘이라니.’
지금까지는 쌓이는 속도가 느렸고,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쌓일수록 가속도가 붙는 흑마력의 특성상 제어력의 강화는 쉽지 않았다.
‘일찍 알아서 다행이야.’
파괴적인 힘일수록 제어되지 않았을 때 위험성이 크다.
반대로 말해 제어만 된다면 흑마력은 매우 뛰어난 무기였다.
‘내 생각에 반응을 보인단 말이지.’
흑마력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목적의 부여.’
얼마나 어디로 움직일지, 움직여서 뭘 할 것인지, 마력을 흡수할지, 아니면 신체 강화에 쓸지.
목적이 명확할수록 마력을 움직이는 감각이 명확해졌고, 반복할수록 마력이 빠르게 반응해줬다.
특정한 의념에 꾸준히 노출된 흑마력은 목적성이 분명한 특화 마력으로 변해갔다.
이는 나라는 존재에 맞게 최적화를 이루는 과정 같았다.
철저히 제어된 하나의 생각에 맞춰 흑마력을 최적화하는 건 상당한 정신력과 시간을 쏟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수련이다.
한 가지 목적에 특화된 흑마력은 제어하기가 매우 쉬우며, 흑마력을 쌓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제어력 감소 현상도 적었다.
‘최적화가 중요하긴 한데…….’
다만, 어떤 의념으로 흑마력을 최적화하냐에 따라 특화되는 성질이 달라지니 신중히 정해야 했다.
공격, 방어.
강화, 약화.
가속, 감속.
압축, 팽창.
변화, 유지.
방출, 흡수.
다양한 개념을 떠올리며 흑마력의 반응을 지켜보니, 목적성이 강화될수록 상반된 목적으로 움직일 때 힘들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예를 들어 공격에 특화된 흑마력은 방어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라.’
다양한 개념을 시도해 보던 중, 혼돈이란 개념으로 마력을 움직여 보곤 깜짝 놀랐다.
‘굉장해.’
혼돈을 생각하며 움직인 흑마력은 기존 방식보다 뛰어난 흡수 효율과 강화 효율을 보여 줬다.
‘…아쉬워.’
목적성이 맞을 때는 뛰어난 효율을 보이지만, 흡수와 파괴를 제외한 목적으론 제어가 매우 힘들었다.
대단하지만 제약이 있는 힘.
그 제약이 너무 커서 채택할 수 없었다.
‘모든 흑마력은 기본적으로 흡수란 성질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기본에 충실한,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제어가 잘 먹히는 개념을 찾던 중 무언가 떠올린 나는 깊은 사고에 빠져들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