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진화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아무것도 없으니 뭐든 담을 수 있고, 무엇이 담겨도 아무것도 아닌.
무엇도 아니니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무엇이 돼도 무엇도 아니게 되는, 공허.
공허를 떠올리며 움직인 흑마력은 딱히 목적이 없어도 제어하기가 좋았고, 흡수라는 목적에선 혼돈 이상의 효율을 보였다.
리스크 없는 하이 리턴.
단점이라면 강화 효율이 매우 떨어진다는 점이었지만, 안정성 면에서 탁월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겠지.’
방향을 정한 나는 심상 수련을 통해 지닌 흑마력을 다듬었다.
수련을 지속할수록 흡수 효율이 폭증했고, 흑마력과의 연결이 매우 공고해지면서 제어력이 상승해 갔다.
‘이 방향이 맞아.’
확신이 들었다.
이제 잡념을 지우고 수련할 뿐.
심상을 단련한다는 게 인간이었다면 매우 어려울 테지만, 욕구가 적고 일평생 삽질만 시켜도 좋아할 개미족 특성상 한 가지에 집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공허. 공허. 공허.
비움. 비움. 비움.
포용. 포용. 포용.
무(无). 무(无).
공허의 마력은 제어가 쉽기에 언제든 끌어모을 수 있어 굳이 마석에 담아둘 필요가 없었다.
‘굳이 부족한 그릇에 담아둘 필요는 없지. 신체 곳곳에 퍼트려 두자.’
어느 순간 마석이란 그릇을 버렸다.
쌓인 흑마력을 전신에 뿌려 두고 알아서 흑마력을 흡수하도록 내버려 두니, 눈덩이가 굴러가듯 마력이 늘어났다.
그렇게 나를 지우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전신 세포를 가득 채운 공허의 흑마력이 폭발하더니 마력 폭풍을 일으켜 대기의 마력을 빨아 먹었다.
‘어?’
대기의 마력을 양껏 빨아들여 거대해진 흑마력이 나를 덮쳤다.
지금 잡념에 빠지면 제어되지 않은 마력이 흩어지며 그 반동으로 찢길 것 같아 공허의 심상에 집중했다.
흑마력 일부가 실의 형태로 뭉쳐 고치를 형성했고, 그 안에 있는 나는 막대한 흑마력에 쪼개지며 재생되길 반복하다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다.’
되뇌던 심상대로 나를 이루던 모든 것이 녹아 액체가 됐다.
내가 액체가 됐다는 걸 어떻게 아는지, 액화된 내가 어떻게 생각이란 걸 하고 있는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의문에 파고들다간 영영 깨어날 수 없을 것 같아 그저 공허의 심상에만 집중하며 폭증한 흑마력을 잡아 두는데 전력을 다했다.
찰나 같은 영원,
영원 같은 찰나.
그러한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액화한 몸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육체를 만드는데 그동안 쌓아온 흑마력이 모두 소진됐지만, 아깝진 않았다.
‘살았다.’
액체 상태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기쁜데, 익숙한 손발의 감각까지 느껴지자 나는 더욱 기뻤다.
‘인간형이야.’
더듬이도, 개미 엉덩이도, 이마에 보조 눈도 있지만, 손가락, 발가락, 눈, 코, 입, 귀, 머리카락 모두 전생에 있던 것.
‘각종 마력이 선명히 느껴져.’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게 느껴지고, 보이지 않던 게 보였다.
마치 감각의 한계를 한 차원 넘어선 듯한 기분.
고치를 이룬 흑마력을 흡수하여 마석을 어느 정도 채운 나는 고치를 찢고 나왔다.
진득한 액체가 몸에 묻어 나왔지만, 두 눈을 통해 들어오는 환한 시야에 기분이 좋아졌다.
몸을 일으키니 인간형으로 진화한 열 마리의 간부가 모두 날 향해 부복했다.
“축하드립니다.”
세크리가 간부 대표로 인사하며 내게 이마를 들이밀었다.
“모두 다크 님이 깨어나길 기다렸어요. 이제 곧 봄이 올 거예요.”
세크리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 줬다.
“다크 님이 진화하는 동안 말벌족 침공에서 살아남은 부하들이 진화에 돌입했어요. 절반이 진화에 실패해 죽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3차 진화종이 됐어요.”
“그렇구나.”
내가 무념무상의 수련에 들어가고 약 2개월이 흘러 고치가 됐고, 고치로 지낸 시간도 30일은 걸렸다고 한다.
다른 장로들에 비해 고치 상태로 오래 있었지만, 여왕들에 비해선 짧은 편이었다.
간부들과 더듬이 인사를 주고받으며 3차 진화를 이룬 페스트, 포룸, 쿠쿠를 확인했다.
“다크 님, 정찰 개미 중 저만 에어 워커로 진화했어요. 나머지는 탈피를 거쳐 스카이 워커가 됐고요.”
페스트 외에도 고치를 튼 정찰 개미가 있긴 했으나, 모두 진화 도중 죽었다고 한다.
에어 워커는 푸른색 눈동자, 무늬, 머리카락을 지닌 인간형 개미로 두 쌍의 개미 날개가 있었다.
능력으론 에어 컨트롤이 있지만, 개미형인 스카이 워커보다 비행 능력과 탐지 능력에서 떨어진다고 했다.
‘공기를 다루는 능력이라니!’
쓰기에 따라선 굉장한 능력임을 직감한 나는 페스트에게 에어 컨트롤의 활용법 몇 가지 알려 줬다.
기류를 만들어 비행 속력을 높인다거나, 공기막으로 소리를 차단한다거나…….
“이렇게도 되는군요.”
“활용하기에 따라선 굉장할 거야.”
인간형으로 진화한 포룸은 자신을 액시드 거너라 소개했다.
“날 제외한 포병대원은 캐논 워커와 개틀링 워커로 진화했다.”
인간형이긴 한데, 양손 대신 총구가 있어 혼자선 밥도 못 먹었다.
“캐논 워커는 사거리가 길고 강력하다. 개틀링 워커는 근접한 녀석들을 학살할 수 있다. 나는 다양한 기술을 구사할 수 있다.”
액시드 거너의 능력은 체내에 분비되는 각종 화학 물질을 융합한 뒤, 다양한 액체를 만들어 방출하는 것이었다.
살상용 산성포, 포획용 접착포, 추적용 마킹포…….
“지금의 난 약하다. 하지만,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렇구나.”
포룸도 페스트와 마찬가지로 높은 잠재력을 가진 듯했다.
팩토리 워커였던 쿠쿠는 치프 앤트로 진화했다.
치프 앤트의 꼬리 쪽에는 메딕 앤트의 얇고 뾰족한 촉수와는 다른 네 개의 지렁이 같은 촉수가 달려 있었다.
치프 앤트의 촉수는 입을 대신하여 음식을 섭취하거나, 소화액과 영양을 분출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팩토리 워커는 자이언트 팩토리로 진화했어요.”
간혹 네트리와 같은 하이 팩토리도 나왔지만, 이들은 지금 산란방 전속 요리사로 차출됐다고 한다.
간부들의 상황은 파악했는데, 정작 내가 무엇으로 진화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개미 배의 무늬가 보라색인 걸 보면,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도 보라색일 듯했다.
‘외골격은 짙은 흑색이고, 비중은 워커맨과 같아.’
힘이 강해진 건 물론이고, 마음이 예전 이상으로 평온하다는 걸 느꼈다.
‘드디어 진화했어. 그것도 인간형 개미로…….’
평범한 개미들에게 손은 턱보다 못한 신체 일부겠지만, 내게는 그 의미가 조금 달랐다.
“아아.”
성대까지 확인하여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을 때, 페르가 염화를 보내왔다.
[다크, 너 정신은 멀쩡하니? 막 파괴 충동 같은 건 없어?]
다크 워커이던 시절 흑마력을 운용하면 그런 증상이 있었지만, 그리 심한 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공허의 마력 덕분인지 차분하기만 했다.
[없습니다. 무슨 일이죠?]
[정말 괜찮은 거야?]
[네.]
[그럼 산란방으로 잠시 와 볼래?]
평소와 다른 느낌의 호출.
‘축하의 의미로 부른 것 같지가 않아.’
느낌이 좋지 않아 간부들에게 몇 가지 준비를 시킨 나는 산란방으로 향했다.
* * *
다크의 진화를 느낀 페르가 말했다.
“다크가 진화했어.”
산란방의 인원들이 기뻐할 때, 케어만은 달랐다.
“왜 그래?”
페르의 물음에 케어가 두 여왕에게 염화를 보냈다.
[그동안 너희들이 오해할까 봐 비밀로 한 게 있어.]
[그게 뭔데?]
[알아야 하는 건가?]
[다크에 관한 거야.]
케어는 공주이던 시절 배운 개미족의 역사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주 오래전 마계의 개미가 이곳 중간계로 넘어왔어.]
마계에서 넘어온 그들은 레서 어비스가 주축인 군체였고, 흑마력이 부족한 대륙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개미족이 됐다.
[그 후로도 번성한 일족 사이에선 다크 계열의 개미가 종종 발생했지.]
격세유전의 발현처럼 다크 계열은 꾸준히 발생했고, 동족 포식이 가능한 그들은 둥지 발전을 저해하는 동족 암살에 동원됐다.
[다크 계열 개미는 무언가 죽일수록 강해졌고, 한때는 집행종이라 불리기도 했어.]
뛰어난 속성 내성을 갖추고 있어 잘 죽지도 않는 그들이 레서 어비스로 진화하게 되면, 물리 내성까지 갖춰 군체 최강이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강한 워커가 군체에 있다는 건 환영할만한 이야기지만…….]
케어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건 대상이 정상일 때의 이야기야.]
개미족 군체에선 가끔 동족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려 하는 개미가 발생한다.
그러한 개미를 미친 개미라 하는데, 다크 워커는 미친 개미의 발생률이 높았고, 대체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미친 개미가 됐다.
무적의 개미가 미친 개미가 되면, 군체는 망한다.
[그래서 다크 워커가 발생하면 그가 재앙일지 영웅일지 판단해야 하고, 진화 직후에는 특히나 조심해야 했어.]
과거 마계종, 내성종, 불사종, 포식종, 집행종 등등 다양하게 불리던 다크 계열은 그 위험성 때문에 발생 즉시 제거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발생하지 않게 됐다.
[그런 블랙 워커가 생겼을 때는 정말 놀랐어. 너희가 블랙 워커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에 더 놀랐고…….]
케어가 숨기고 있던 진실을 듣게 된 페르가 발끈했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내가 태어난 군체는 약소 군체였어! 거기다 미친 개미면 제거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포스도 있는데…….]
포스도 불안해하는 케어를 달래 줬다.
[걱정하지 마라. 다크가 미친 개미가 되면 내가 제거하면 그만이다.]
그 누구도 포스가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포스는 빅 퀸 시절부터 무적의 개미라 불릴 정도로 강력했으니, 다크의 3차 진화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페르가 자신의 페로몬 능력을 어필하며 말했다.
[나와 포스가 연계하면 갑각왕 헤라클레스도 적수가 아니야. 거기다 제르다코, 일리아나까지 가세하면 4차 진화종도 문제없어. 그러니 다크가 정말 미친 개미가 되면 그때 처리하면 그만이야.]
[그래, 너희를 두고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어.]
[넌 걱정이 너무 많아.]
[그래도 조심해야 해, 마계종인 다크 계열은 진화할수록 난폭해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장로가 미친 개미면 그것도 문제니까. 빨리 확인해 보자.]
페르는 만약을 대비해 제르다코와 일리아나를 대기시킨 후 다크를 불렀다.
얼마 후 다크가 산란방에 들어섰다.
페르는 다크의 페로몬을 확인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난폭하기는커녕, 차분하잖아!’
케어 또한 예상과 다른 다크의 모습에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레서 어비스가 아니야. 신 여왕 교육 때도 들어본 적이 없는 종이야!’
케어가 감정 능력을 끌어올려 다크를 살폈다.
워커치곤 월등히 높은 능력치가 보였지만, 전설처럼 압도적인 능력치는 아니었다.
‘가디언 수준의 능력치와 높은 속성 내성이 다야. 마력도 그리 높지 않지만… 뭔가 이상해.’
케어가 감정하는 동안 페르는 다크의 페로몬을 살폈는데,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당황했다.
“넌 뭐냐?”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다크의 반응에 페르는 황당해하며 케어에게 염화를 보냈다.
[이 녀석! 이상해! 뭔가 이상하다고! 이 녀석의 페로몬에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순간 케어는 자신이 느끼고 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잠재력이 보이지 않잖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응당 보였어야 할 마력 상한치가 깨져 보였다.
케어와 페르가 다크를 보며 경악할 때, 포스는 또 다른 이유로 놀랐다.
‘이 녀석… 마력을 완전히 갈무리했어.’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