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도약의 준비
세 여왕이 내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개미족의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금세 이성을 되찾은 케어가 나에 대해 말해 줬다.
“하프 데몬으로 진화했구나. 내성에 특화된 종이란다.”
3차 진화종의 수명이 80년 정도란 것을 알려 준 케어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다루는 흑마력의 깊이는 나조차 알 수 없구나.”
케어의 설명은 그것으로 끝났다.
‘오늘따라 짧네.’
페르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선 말했다.
“네게서 엄청 불길한 느낌이 들어.”
“그런가요?”
더듬이 인사를 나누고 나니 페르의 말이 바뀌었다.
“자세히 느껴보니 포근한 느낌이 있네. 뭐, 특이하지만 나쁘지 않다는 의미야.”
포스는 반짝이는 갈색 눈으로 내게 말했다.
“도전하면 받아 주겠다.”
“괜찮습니다.”
나의 즉답에 포스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산란방에는 제르다코를 포함해 가디언 여섯 마리와 일리아나를 포함한 워커맨이 열한 마리가 있었다.
‘산란방을 지키는 인원이 반으로 줄었어.’
그들과 더듬이 인사를 마친 나는 장로들과 부대장급 솔져들이 모이는 걸 기다려야 했다.
가디언 하나, 울트라 하나, 또 울트라 하나…….
‘전부 진화했나 보네.’
세크리에게 듣기는 했지만, 조금 놀랐다.
그리고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수가 적어.’
인사를 나누며 둥지 상황을 파악했다.
‘역시.’
3차 진화 때, 고치를 튼 개미들 중 절반이 죽었고, 탈피를 통해 진화한 개미는 90%가 살았다.
그렇게 수가 줄어든 부대장급 개미는 친위대와 내 세력을 제외하면 가디언이 세 명이었고, 울트라가 열네 마리였다.
‘이게 다라고?’
나의 환영회가 끝나자 울트라들은 식량을 아끼기 위해 구석에 찌그러졌고, 가디언 셋이서 어디를 사냥터로 삼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가디언으로 진화한 제르피아와 헤르피아는 게르피아에게 돌아가지 않고, 피어레스와 함께 날 지켰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번 봄에는 세 가디언을 주축으로 사냥 개미들이 움직일 것 같았고, 울트라들은 경비대와 협조하여 둥지를 지키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세력을 제외한 둥지 병력은 자이언트 워커 100마리와 하드 워커 40마리뿐이라 가디언 셋이서 50인대를 구성하기에는 열 마리가 부족했다.
“피어레스, 지금 우리 쪽 상황은 어때?”
“하드 워커 120마리와 워커맨 50마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페스트의 정찰대가 건재하고, 포병대는 포룸을 포함해 3차 진화종 다섯 마리가 전부에요.”
말벌족을 상대로는 포병대 또한 비대칭 전략 무기에 가까웠는데,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아 안타까웠다.
“하드 워커가 70마리나 남는군.”
기의병은 50기밖에 운영할 수 없지만, 지금은 나의 전력이 군체 전력을 상회한 상황이다.
군체 인구는 2000마리를 넘겼으나, 대부분 빅 워커였다.
거기다 빅 워커 대다수가 생산에 투입되어 사냥 개미가 부족했다.
‘받쳐 주는 빅 워커 없이 고급 병종만으로 괜찮을까?’
그런 상황에서 하드 워커 20마리를 차출당했다.
“다크, 이해해 줘. 부대장급 가디언 셋에게 50인대를 만들어줘야 해.”
일리아나가 미안해했지만, 말벌족을 상대로 하드 워커의 단독 운영은 비효율적이라 내주어도 상관없었다.
‘방어 특화종인 하드 워커라면 고블린 상대로 충분히 무쌍할 수 있어. 하지만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말벌족이 상대라면 이야기가 달라…….’
“다크는 작년처럼 말벌족을 견제해 줘. 그리고 가디언인 게아, 네아, 데아가 50인대를 이끌고 서쪽 고블린을 막아 줘.”
메가피르와 게르피아는 포메온 혼자서 감당이 힘든 울트라 열두 기의 지휘 역으로 지목됐다.
각자에게 역할이 주어진 후 일리아나가 해산을 알리자 게르피아가 내게 다가왔다.
“다크, 우린 한동안 경비대 소속으로 지내게 됐다. 그러니, 제르피아와 헤르피아를 맡아다오.”
제르피아와 헤르피아도 불만은 없어 보였다.
“네, 그럴게요.”
게르피아는 웃음기 가득한 페로몬을 풍기며 날 지나치며 말했다.
“잘 부탁한다.”
한동안 둥지 상황을 파악하며 시간을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봄이 왔다.
가디언 녀석들은 50인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다크 님, 저희도 출격할까요?”
피어레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워커맨들은 장비 생산에 투입하고, 하드 워커들은 후임 양성에 주력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피어레스가 시무룩해 했지만, 50기의 기의병으로 말벌족 토벌에 나섰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 일단 둥지를 지키며 힘을 키울 생각이었다.
‘지금 몸에도 적응해야 하고 말이야.’
전생의 기억 덕에 육체를 다루는 건 어려울 게 없지만, 넘쳐 나는 힘과 흑마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연구가 필요했다.
‘나무창은 너무 가벼워.’
내게 맞는 무기를 찾다 보니, 말벌 창을 휘두르게 됐다.
휘익! 휘익!
인간형 개미들의 공통 특성인지 창을 다루는 게 나날이 익숙해졌다.
‘무기에 주입하면… 이런 느낌이군.’
흑마력으로 무기를 강화하는 방법도 터득하여 전투력이 급증했다.
이젠 나 한 몸 지킬 수 있을 듯했지만, 선봉에서 창을 휘두르는 건 피어레스의 역할이지 내 역할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이것저것 익히는 동안 똑똑한 빅 워커들에게 설탕수와 마력 강화액을 충분히 먹여 진화를 독촉했다.
“지금의 너희들은 쓸모없는 애벌레다! 하지만, 본 조교의 훈련을 거치면 역전의 개미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지금부터 대답은 악으로만 한다!”
“악!”
세크리의 하녀 부대가 조교가 되어 빅 워커들을 가르쳤다.
“마력이 차는 대로 모두 비워라! 마석의 한계치를 키우는 거다! 진화하기 전까진 일할 생각하지 마라!”
“악!”
튼튼한 빅 워커들도 따로 모아 진화를 독촉했다.
그들의 훈련은 하드 워커들이 맡았는데, 소규모로 사냥을 나가기도 하여 메디가 바빠졌다.
충분한 스마트 워커와 자이언트 워커의 수가 확보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벌족도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테니,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고블린들과 인간들은 잘 지내려나.’
한동안 바빴던 터라 두 종족에 대해 신경 쓰질 못했다.
먼저 고블린 거주지를 찾아가 봤다.
서쪽 전선에서 간혹 잡혀 오는 암컷 고블린을 모았더니, 지금에 이르러선 50마리가 됐다.
마신어 덕분에 3차 진화종부터는 고블린과 말이 통했다.
“고블린들의 수장 겸 제사장입니다. 상위종 개미님께선 무슨 일로 오셨나요?”
키카는 없고, 한껏 꾸민 젊은 암컷 고블린이 날 맞이했다.
“넌?”
“전 제사장님이 돌아가셔서 지금은 제가 고블린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고블린의 수명은 이삼 년 남짓이라 초기에 잡아온 고블린은 모두 죽어 세대교체가 일어난 듯했다.
“이름이 뭐야?”
“없습니다. 편하신 대로 불러 주시면 됩니다.”
“그래. 그럼 넌 이제부터 키카다.”
이름을 받고 부복하여 감사를 표하던 키카가 나를 힐끔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둠을 품고 계시는 듯한데… 혹시 제사를 지내드려도 괜찮을까요?”
전대 키카는 다짜고짜 제사부터 지냈는데, 이번 키카는 예의가 바른 듯했다.
“제사를 지내면 너희에게도 좋은 건가?”
그동안 궁금한 걸 물어봤다.
“저희 고블린은 마의 존재를 받드는 것으로, 고카구카 님의 힘과 지혜를 하사받습니다.”
“고카구카?”
“저희의 신입니다.”
신이라는 게 정말 있을까 싶었고, 만약 있다 하더라도 고블린이 믿는 신이니 무조건 악신이란 생각이 들었다.
‘선입견은 좋지 않아.’
모르니까 오해하는 거다.
그래서 고카구카에 대해 물어봤다.
“고카구카 님은 고블린이 지배하는 세계의 왕이자 신이며, 마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해요.”
신에 대해 말하는 키카의 눈은 광신도의 눈처럼 번뜩였다.
“마의 군단을 이끌기도 하는 고카구카 님이 중간계에 내려오면 고블린들에게 지혜와 힘을 주고 세상을 정복하죠! 고카구카 님과 함께하면 원하는 걸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고카구카 님은 신선한 엘프 고기를 제일로 좋아하고, 다음은 인간 고기라고 해요.”
“음, 그렇구나. 정말 대단한 신이네.”
들어보니 고블린을 앞세워 세계를 재앙 속에 밀어 넣고자 하는 악신이 분명했다.
나의 허락 하에 제사가 진행됐고, 제물은 감옥에 있던 수컷 고블린이 쓰였다.
막대한 흑마력을 보충하게 된 나는 키카에게 물어봤다.
“수컷은 없어도 괜찮아?”
그 말에 키카는 살짝 당황하더니 답했다.
“저희가 부락에 있을 때 당한 걸 생각하면 저것도 귀한 대접이에요.”
고블린의 사회에선 암컷은 수컷의 주체 못할 욕정의 발산 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소중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렇구나.”
조금 어린 암컷 고블린이 내게 수컷 고블린의 살코기를 가져오다가 넘어졌고, 초록 피가 내 몸에 튀었다.
순간 키카를 비롯한 암컷 고블린들이 석화라도 걸린 듯 경직된 채 핼쑥해졌다.
내 옆을 지키던 세크리는 상황을 이해 못했지만, 나는 그들이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공포의 마력이네.’
나는 넘어진 채 떨고 있는 꼬마 고블린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죽이지 않으니 안심해라.”
꼬마 고블린은 내게 몇 번이나 절하곤 멀찍이 도망갔고, 키카가 감사를 표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키카의 과민한 반응에 나는 세크리를 쳐다봤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이런 반응은 저도 처음 봐요.”
고블린들은 날 유독 두려워했다.
“키카, 왜 다들 날 두려워하는 거지?”
“그건… 개미님에게선 무엇이든 잠식해 버릴 듯한 깊은 어둠이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고블린들은 내게서 공허를 엿본 듯했다.
“그리 두려워할 거 없어. 나도 다른 개미들처럼 너희를 괴롭히려는 건 아니니까.”
한동안 가죽을 손질하고 있는 고블린을 지켜봤다.
‘물을 뿌려 가며 돌로 치고 문질러 살점과 털을 없애는 방식이라니… 예전부터 느꼈지만, 가죽을 망가트리고 있어.’
제대로 된 무두질은 모르지만, 대략의 원리는 알았다.
생가죽에는 단백질, 지방, 염분, 털 등이 남아 있어 쉽게 썩는다.
부패를 막고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게 무두질이니…….
“키카.”
“네!”
“지방을 떼어 낸 가죽을 잿물에 담그게 해.”
“잿물은 왜…….”
“그럼 털이 빠질 거야. 털이 빠지면 인간들의 도움을 받아 훈제하고 균을 없애.”
균에 대한 개념이 없는 키카였지만,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이해했다.
“그러고 나선 기름과 함께 문지르거나 쳐서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거야. 기름이 없다면 미끈거리는 식물을 찾아 봐.”
페달이 달린 무두질용 가죽 압착기를 만들어줄까도 생각했지만, 인력이 충분해 보여 기계의 제공을 미뤘다.
“필요한 도구가 있으면 여기 세크리에게 말해 둬. 그럼 만들어 줄 테니까.”
“네? 다크 님의 그림자이신 이 분에게 부탁을요? 저희가 감히 어떻게…….”
키카가 긴장하며 한 말에 세크리는 내심 기뻐하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다크 님의 명령은 절대적. 그러니 따르기만 하면 된다. 네놈들의 조잡한 도구는 당장 바꿔 줄 테니. 이리 주도록.”
“감사합니다.”
가죽 공방의 공정을 개선해 준 나는 난방 시설이 있는 인간 서식지에 가봤다.
“여긴 덥고 습해서 자주 못 왔어요.”
세크리가 더듬이를 흔들며 한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인간은 북쪽 고블린 촌락에서 구출해온 여섯 명뿐이었고, 루리아가 20대 중반, 나머지도 10대 중반이거나 후반 정도에 불과해 보였다.
루리아의 머리는 적갈색이었고, 나머지는 짙은 갈색 혹은 옅은 갈색이었다.
나와 세크리를 본 소녀 하나가 어찌할 줄 몰라 루리아를 찾았다.
“루리아! 개미야. 그것도 상위종 개미야.”
“소리 낮춰, 데이지. 개미족은 소리에 민감하단 말이야.”
“어… 미안.”
그동안 그들의 언어를 들어 왔기에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루리아는 몸짓을 섞어 가며 내게 용건을 물었는데, 그녀의 음성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로, 왔나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인간들은 개미족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군. 좀 더 호기심을 보일 줄 알았는데.’
워커 퀸을 비롯한 인간형 개미는 기본적으로 귀여운 소녀형이다.
그런 내게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일단 언어를 익혀야겠어. 그러려면 말을 터야 하는데…….’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