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각자의 사연
말이 많아 보이는 데이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자, 10대 중반의 두 소녀가 울먹이며 나서려는 걸 연장자인 두 사람이 붙들었다.
안 봐도 뻔한 상황이다.
내가 데이지를 죽일 것으로 오해한 듯했다.
체념한 듯 다가온 데이지를 옆에 앉힌 나는 다른 인간들도 불러와 빙 둘러앉게 했다.
원형으로 둘러앉게 된 나와 인간들 사이에 테이블이 놓였다.
“세크리, 돼지고기랑 설탕수 좀 가져와. 설탕수는 나무 컵에 담아 와야 해.”
“네!”
세크리가 떠나고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인간들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그저 테이블만 바라봤다.
잠시 후, 빅 워커들이 죽은 멧돼지 한 마리를 가져왔다.
‘조금 크네. 뭐 괜찮겠지.’
피를 빼둔 고기라 적당히 잡아 뜯어서 돌칼로 정돈하는데, 그 모습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는지 인간들이 흐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흠…….’
가정적인 모습을 어필하여 호감도를 높이려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한 번 빼든 칼을 도로 넣을 수도 없었다.
고기 정돈을 마치고 암염을 깨트려 바른 후 오븐에 넣고, 밭에서 적당한 채소들을 뽑아 깨끗이 씻어 왔다.
지글지글.
고기의 기름이 빠지며 구워졌고, 속까지 충분히 익었을 때 쯤 꺼냈다.
그러고 나서 흑마력이 주입된 손으로 뜨거운 고기를 한 점씩 발라 세크리가 가져온 나무 그릇에 담아 줬다.
고기 한 접시와 설탕수 한잔, 그리고 쌈 채소까지.
만찬을 두고도 제사를 지내는 그녀들을 어떻게 먹일까 고민할 무렵.
꼬르륵.
시선을 모은 소녀에게 웃어 주며 고기를 권했다.
이를 시작으로 나와 세크리는 인간들과 함께 식사했고, 며칠간 함께 지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들은 나와 세크리에 대한 공포를 잊었고,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좋아.’
나와 세크리는 뛰어난 기억력을 발휘하여 그녀들의 언어를 단시간에 학습했다.
“세크리, 다른 하녀 개미들에게도 인간들의 언어를 익혀 두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나는 학습한 언어로 그녀들에게 물어봤다.
“나 귀엽지 않아?”
자의식 과잉 같은 질문으로 여길 수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심미관이 어떤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투박한 가디언을 제외한 인간형 개미는 기본적으로 미형이야. 그리고 외관상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지. 그런데도 이런 반응이라니… 고블린처럼 우리에게 무언가 느끼는 건가?’
나의 질문에 그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무섭다고 말했다.
“뭐가 무섭냐고요? 그야… 개미족은 사람을 잡아먹으니까요.”
“눈!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 그냥 다 무서워요!”
“더듬이가 섬뜩해요.”
인간은 약한 것 치곤 영양 등급이 높다.
‘말벌족의 자이언트 킬러비와 애벌레 수준이야.’
그러니 개미족은 그녀들에게서 식욕을 느끼는 반면, 피식자라고 할 수 있는 그녀들은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는 듯했다.
게다가 사회적으로도 개미족, 고블린, 오크와 같은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과 적대감을 학습해 온 것 같았다.
‘이거… 좋지 않아.’
대화가 통한다면 좋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상황상 적대 관계가 확실했다.
개미족이 북쪽으로 영역을 넓힌다면 인간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너희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있을까?”
나는 개미족의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인간 사회의 정보를 얻기 위해 그들의 과거를 물었고, 루리아의 사연을 듣게 됐다.
“전… 과거 용병이었어요…….”
“돈만 주면 뭐든 해 주고, 주로 전투에 종사하는 그 용병?”
“…네.”
놀랐다.
루리아의 힘으론 개미족에게 전혀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은데, 과거 용병이었다니…….
‘인간이… 약한 건가?’
“…전 클라우드 왕국의 수도 테헤라 인근 농가의 세 번째 딸이었어요.”
루리아는 마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고 자랑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름 괜찮은 농가에서 태어난 그녀가 용병이 된 계기는 천 짜기를 못해서였다.
“여자는 천 짜기를 잘해야 장남에게 시집갈 수 있는데… 전 재능이 없었어요.”
농지를 이어받을 장남 이외의 남자는 모두 실패자.
천 짜기를 못하는 여자는 밥벌레.
조혼 풍습도 있어 여자는 만 14세에 성인식을 치렀고, 남자는 만 16세에 성인식을 치르며 부모가 적당한 혼처를 만들어줬다.
‘흠… 상당히 낙후됐어.’
집에서 구박만 받다 농지도 없는 남자에게 시집갈 운명이던 루리아는 성인이 되기 전에 가출을 결심했다.
“그때는 친하게 지내던 동네의 언니와 동생도 함께했어요.”
열두 살인 그녀와 함께한 건 열세 살과 열한 살의 여자아이.
루리아 일행은 도시의 빈민가에 숨어들어 밤을 보냈고, 낮에는 용병 길드에서 일을 받았다.
“길드에서 나무패를 받았어요. 생애 처음으로 받은 신분패였죠.”
루리아가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곤 감상에 젖자, 나는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좋았어요. 현실을 알기 전까지는요.”
우드급으로 시작된 용병 생활은 매우 즐거웠다고 한다.
채집하고, 심부름하고, 청소도 하고, 예쁜 옷을 빌려 파티에 참석도 해 보고, 아저씨 용병들에게 술도 얻어 마시고…….
루리아 일행은 다른 용병 아저씨들이 술과 여자로 탕진하는 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아 용병 길드에서 가르치는 무기술의 기초를 배웠다.
“전 휴대가 편한 레이피어, 두 친구는 각각 단검술과 방패술을 배웠어요.”
무기술을 배우는데 돈이 많이 들었지만, 최소한의 무력을 갖춰 승급 의뢰를 수행할 수 있었고, 브론즈급 용병이 된 그녀들은 창고를 빌려 지낼 수 있게 됐다.
“그때는 저희도 언젠가 실버급 용병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루리아 일행의 한계는 브론즈까지였고, 벌어들인 돈은 창고 대여료와 장비 손질로 모두 나갔다고 한다.
“단검을 쓰던 친구는 고블린 사냥 중에 투척용 단검을 아끼다 당했고, 방패를 쓰던 친구는 도주 중에 뒤처져서 버려졌어요.”
동료를 잃는 건 용병에게 흔한 일.
루리아는 두 친구를 잃은 후에도 새로운 파티에서 용병 일을 계속했고, 자신을 챙겨 주던 브론즈급 선배 용병과 결혼하게 됐다.
“열아홉 살에 결혼이면 늦은 편이지만, 용병 기준에선 늦은 편은 아니었어요. 남편이 모은 돈도 좀 있어서…….”
결혼 적령기를 한참이나 놓친 20대 중반의 남자와 결혼한 루리아는 수도와 멀리 떨어진 촌구석 영지로 내려와 그동안 모은 돈을 털어 농지를 빌렸다.
루리아로선 장남 일가의 눈칫밥을 먹으며 천이나 짜야 할 운명에서 농지를 빌릴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된 셈이었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농사가 망하며 막대한 빚을 지게 된 루리아.
남편이 어떻게든 돈을 벌어 오겠다며 나갔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루리아는 자신의 몫이 되어 버린 빚을 갚기 위해 다시금 레이피어를 잡았고, 녹슬어 버린 실력으로 파티원에게 민폐를 끼치다 고블린 소굴에 버려졌다.
“평범한 이야기에요.”
과거의 이야기를 모두 쏟아낸 루리아가 각오 서린 눈으로 날 바라봤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는 움찔하더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저희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요. 여기서 어떻게든 적응해야 해요.”
나는 나보다 키가 큰 루리아의 머리를 만져 주며 생각했다.
‘스물한 살이었구나.’
생각보다 훨씬 어렸다.
다른 아이들은 말하길 싫어하는 듯하여 강요하진 않았으나, 그들의 대화를 통해 대략적인 과거를 알 수 있었다.
15세의 비안느와 세리카는 북쪽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고, 22세의 줄리아는 숲속 사냥꾼의 아내였다.
23세의 비앙카는 이마에 노예 인장이 박힌 탈주 노예고, 제일 어린 13세의 꼬맹이 데이지는 고아였다.
다들 각자의 이유로 먹고살기 위해 숲속에 발을 들였고, 운 나쁘게 변을 당했다.
사냥꾼의 아내인 줄리아가 말했다.
“저희가 무사히 돌아간다 해도 마을에선 받아 주지 않아요.”
숲에서 변고를 당한 여자는 돌아갈 곳마저 잃는 게 이곳 세계였다.
‘역시 미개해…….’
그동안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정보를 추렸다.
이곳은 클라우드 왕국에 속한 대산림이다.
왕국의 영주들은 대영주에게 충성하며, 대영주는 왕에게 충성한다.
‘사회 체계는 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비슷해.’
영지끼리의 교역도 크게 없어 상업이 낙후됐다.
‘남녀의 역할이 다르고, 직업도 다양하지 못한 것 같아.’
그러한 이유로 이곳의 평민들은 매우 빈곤했다.
경제력이 처참하단 건 충분히 알았으니, 무력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용병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등급 부분에 대해서 말이야.”
“네.”
자세히 들어 보니 용병이 약한 게 아니라 루리아가 약한 것이었다.
베테랑 용병인 실버급은 스마트 워커보다 훨씬 강하고, 도시에 몇 없는 골드급 용병 파티는 자이언트 솔져 무리를 사냥할 수 있다.
“미스릴급 용병은 기사와 동등한 수준으로 오러를 다룰 수 있어요.”
“오러?”
“네.”
오러는 인간 전사들의 수련 방식으로 쌓은 마력을 뜻했다.
“오러를 다루는 기사급 용병은 초인처럼 강해요.”
“얼마나 강한 거야?”
“음… 트롤도 잡을 수 있을 텐데… 아마 울트라만큼은 강할 거에요.”
클라우드 왕국은 역사가 깊지도 않을 뿐더러 약소국이었으나, 그들이 가진 기사단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역시, 인간과의 접촉은 위험해.’
부족한 정보로 생각해 볼 때, 인간은 벌집이다.
건드리면 얼마나 몰려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풀 플레이트 메일도 있다는 걸 보면 야금술도 상당할 거야.’
군체가 지속해서 성장한다면 언젠가 인간 문명과 충돌할 날이 필연적으로 오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선 대비해 둬야 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야. 일단 말벌족부터 처리하자.’
말벌족을 처리하면 두 가지 이점이 있다.
하나는 꿀이 흐르는 아카시아 숲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상급 영양인 킬러 퀸을 확보해 3차 진화종 개미를 늘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인간들에게서 충분한 정보를 캐낸 나는 그들의 거주지와 식사를 개선해 줬다.
워커맨들을 시켜 나무 집을 만들게 했고, 건초와 가죽으로 침대도 만들어 줬다.
나무와 돌로 만든 주방 도구, 삽, 곡괭이, 낫, 도끼 같은 생필품도 지원했다.
식사에 관해선 정기적으로 고기를 보내 주기로 했고, 밀 농사를 도와주기로 했다.
의복에 대한 문제도 있었지만, 그건 지하 5층의 뽕나무가 좀 더 자라면 해결해 줄 생각이었다.
“그럼 한동안 바쁠 거야. 보고할 게 있으면 워커맨인 프레드에게 말해 둬.”
떠나기 전 워커맨으로 진화한 하녀 개미 프레드를 그들의 보호자로 붙여 줬다.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들의 진심 어린 감사를 받았다.
그들의 감사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의 운명이 내게 달린 건가?’
앞으로 그들과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좀 더 깊이 생각하기로 한 나는 무덤 인근에 마련한 휴식처로 돌아가 최근 게르피아에게서 해임당한 제르피아와 헤르피아를 불렀다.
“너희들과 직속 관계를 맺고 싶어.”
중갑을 입은 여기사 같은 둘은 기다렸다는 듯 이마를 들이밀었다.
남은 세 자리 중 두 자리는 워커맨인 엔지와 하이 페어리인 리페파로 채웠다.
“감격이에요!”
“감사합니다! 다크 님!”
그러고 나서 엔지에게 엔지니어 부대를 만들게 하여 사탕수수 압착기의 관리부터 기계적인 지식을 전수했고, 리페파에겐 보수 전문 페어리 부대를 만들게 하여 디그파가 공사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 남은 직속 부하 자리는 나의 전용 탈것이 되어준 하드 워커 베슬리에게 줬다.
장로인 나의 직속 부하는 성장이 빨라지고 능력치 버프를 받게 된다.
그들의 활약과 성장은 내게도 영향을 미치니, 둥지에 공헌도가 높은 부하를 직속으로 삼아 두면 이점이 많았다.
시간이 흘러 여름이 왔다.
그동안 나는 엔지니어 부대와 함께 목공소를 손봤다.
페달이 달린 회전 기계를 배치하여 나무를 쉽게 갈 수 있게 된 것만으로 생산 효율은 극대화됐다.
공정도 세분화시켜 생산의 체계를 다듬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둥지는 소모성 장비의 생산 체계를 갖췄고, 스마트 워커 150마리와 자이언트 워커 300마리를 확보했다.
3차 진화종으로 구성된 기의병 50기 중 서른다섯 기는 후임 양성에 투입하고, 열다섯 기는 십인장으로 승진시켜 2차 진화종 기의병을 거느리게 했다.
포룸의 포병대 역시 액시드 워커들이 충원되며 50인대 규모를 갖췄다.
“피어레스! 제르피아! 헤르피아! 너희를 오십인장으로 임명한다! 포룸, 너는 포병대로 이들을 지원해 줘! 메디는 의료 개미 열 마리를 지원해 줬으면 해!”
세 가디언에게 55기의 기의병을 배속시켜 동쪽 숲 탈환을 명한 나는 포메온과 함께 말벌족의 습격을 대비했다.
‘한 번 더 와 보시지. 이번에는 제대로 묻어 줄 테니까.’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