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아카시아 숲 (4)
그동안 얌전하던 개미족이 테라스의 영역을 침공했다.
“감히!”
테라스는 주력 부대인 킬러 퀸 50마리와 자이언트 킬러비 1,000마리를 대동하여 격전지로 향했다.
전장은 이미 연기가 자욱했다.
“지상으로 내려가 붙는다!”
십인장급 기의병으로 인해 킬러 퀸들도 무쌍을 찍지 못했으나, 말벌족의 예비대가 하나둘 합류하며 물량으로 압도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연막이 무한하지 않다는 걸 테라스는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밀어붙여라!”
테라스는 큰 피해 없이 개미족을 몰아냈다.
‘다행이야. 방어선이 뚫릴 뻔했어.’
이대로 개미족을 내버려 둬선 안 된다고 느낀 테라스.
‘계획을 미뤄야겠어. 일단 놈들부터 몰아내자.’
테라스는 개미족 토벌을 결심했지만, 혼자서는 벅찬 감이 있었다.
“녀석들에게 도움을 청해야겠지. 그럼 제물이 필요할 텐데… 이참에 나와 비등한 그 녀석을 제거하자.”
테라스는 개미족이 차지한 구역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연합체 수장들을 찾아갔다.
“제라크, 놈들은 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해. 지금 처리해 두지 않으면, 너희도 위험할 수 있어. 나와 함께 놈들을 처리하자.”
“흠… 나보다 네가 더 급한 것 같은데. 굳이 내가 도와야 할까? 차라리 자이네로에게 도움을 청해 보는 게 어때?”
“알겠어. 자이네로를 설득해 볼 테니, 너도 메르스와 베르크를 끌어들여 줘.”
“메르바는?”
“우리가 모였는데, 적당한 희생양은 있어야겠지.”
“호… 역시 테라스야. 키에라를 몰아낸 수완은 여전해.”
테라스가 대 개미족 연합을 결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개미족은 그의 영역을 수시로 들쑤셨다.
“젠장.”
대 개미족 연합이 결성될 무렵, 테라스의 주력 부대는 반토막 났고 서쪽 영역은 엉망이 돼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테라스의 음모를 알아챈 메르바가 총력을 끌어모아 서진했다.
개미족과 메르바 사이에 낀 테라스는 제라크, 메르스, 베르크, 자이네로 등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상황을 지켜보던 그들은 테라스를 처리하고 영역을 가르기로 했다.
“잘 가라, 테라스.”
“날 배신하다니! 죽어서도 저주하마!”
“하하, 실컷 저주해라.”
공중에서 연합체 수장들에게 당한 테라스는 추락하는 와중에 키에라가 죽기 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잘 들어라! 놈들은 검은 연기를 피워내는 사신, 아카시아 숲의 말벌족이 하나가 되지 않는 한 놈들을 이길 순…….’
퍽.
피떡이 된 그녀는 키에라의 말이 사실이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배신자 놈들… 개미 밥이나 돼라!’
테라스가 죽으면서 그녀의 영역은 무주공산이 됐다.
그러한 테라스의 영역에서 적당히 이득을 취한 개미족은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히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라스의 영역은 다섯 조각으로 찢겼다.
그러고 나서 연합체들이 끊임없이 싸우는 전장이 됐다.
연합체들은 합의점을 찾아 영역을 가르려 했지만, 개미족이 침공해 오면서 자이네로의 영역이 급속이 넓어졌다.
이대로 합의할 수 없게 된 연합체 수장들이 자이네로를 제거하게 됐고, 남은 연합체들도 의심 암귀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전쟁이 계속됐다.
수일간 이어진 전쟁으로 말벌족의 피해가 누적됐고, 그들이 전쟁할 여력을 상실했을 때쯤, 상황을 지켜보던 다크가 한마디 했다.
“개판이네.”
* * *
“분명히 인간형 말벌인데, 지능이 피어레스 수준이야…….”
힘의 균형을 깨트려 두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일리아나와 트라이도 말벌족이 자멸해 가는 걸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두 예상한 거야?”
일리아나의 물음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 주며 알아서 해석하도록 내버려 뒀다.
“다음은 이쪽을 치죠.”
여섯 개의 부대가 동북 방향으로 진군하여 제라크를 괴롭혔다.
동족 간의 소모전으로 쇠약해진 제라크 연합체는 우리를 막아낼 전력이 없었다.
제라크가 무리해서 병력을 끌어모았지만, 기껏해야 킬러 퀸 서른 마리와 자이언트 킬러비 1,000마리 정도.
600기의 기의병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둥지를 토벌하고 다니니 제라크가 총력전을 걸어 왔다.
“두고 보자 개미족 놈들!”
그러나 처음 기세와 달리 기의병의 투창과 포병대의 폭격에 깜짝 놀란 제라크는 붕괴하기 직전의 병력을 데리고 도주해 버렸다.
제라크의 영역을 꿀꺽한 내게 허니 퀸들이 찾아왔다.
“제라크를 쫓아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 상전을 받들게 된 허니 퀸들은 불안해하며 내게 꿀과 애벌레를 상납했다.
“저희는 화원을 가꾸고 꿀벌을 키우는 능력이 있어요. 그리고 고품질의 꿀을 생산할 수도 있고, 이렇게 애벌레도…….”
토벌당할 것을 걱정한 허니 퀸들이 자신들의 유용함을 설명했다.
“응. 너희들이 유용하다는 건 충분히 알겠으니까, 그렇게 떨지 않아도 돼.”
나는 꿀벌족이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애벌레를 돌려주며 말했다.
“나는 노예가 필요한 게 아니야.”
“저희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역사에서 배운 노예란 존재는 대가를 받지 않기에 생산 의욕이 적고, 관리 인력을 붙여야 해서 없느니만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드러나진 않았지만, 지금의 꿀벌족은 말벌족의 과도한 수탈로 생산 체계가 무너져 있었다.
지원이 없다면 이번 겨울을 나기 힘들 텐데…….
전략자원인 꿀을 대량으로 확보하기 위해선 꿀벌족의 상황을 개선해 둘 필요가 있었다.
“우린 말벌족처럼 너희를 수탈하지 않을 거야.”
나의 설명이 부족한 건지 오해가 발생했다.
허니 퀸들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저희를 수탈하지 않고…….”
“요리해 먹겠다는 말씀이군요.”
“애벌레를 돌려준 건 자라면 먹겠다는 의미고요.”
“차라리 노예로 부려 주세요. 더 열심히 꿀을 만들게요…….”
뭘까, 최근 들어 느끼지만 다들 날 악역으로 모는 걸 좋아했다.
‘뭐가 문제인 거지?’
장내가 부산스러워져 말을 이을 수 없던 나는 세크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환히 웃으며 나서준 세크리.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말벌족 수천을 몰살한 개혁의 장로 다크 님이시다. 너희 따위에겐 일말의 관심도 없으니, 닥치고 다크 님이 정해 주는 운명을 받아들여라!”
“.......”
세크리는 허니 퀸들이 절망하게끔 만들어 부산스럽던 장내를 가라앉혔다.
자신이 만든 결과를 뿌듯해한 세크리가 칭찬을 원하는 얼굴로 날 돌아봤다.
어이가 없었지만, 웃는 얼굴에 창을 휘두를 순 없으니…….
‘믿을 개미가 없네.’
나는 장내의 흑마력을 흡수하여 허니 퀸들의 부정 감정을 줄여 봤다.
하지만 부정 감정이라는 게 쉽사리 없어지진 않는다.
“돌려 말하지 않을게. 난 공생을 원해.”
“공생이라면… 예전처럼 저희가 보호비를 상납하면 되는 건가요?”
보호비 명목으로 꿀을 얻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설탕수를 제공하여 생산력을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공짜로 줄 생각은 없다.
“우린 설탕수를 줄 테니 너희는 꿀을 제공해 줘. 비율은 1대 1이야. 거부권은 없어.”
하급 영양인 설탕수와 중급 영양인 꿀.
그들에게 몹시 불리한 불평등 거래였지만 본래 거래란 힘의 논리에 의해 갑과 을이 결정되고, 이 자리에선 그들의 생살여탈권을 지닌 내가 절대 갑이었다.
그러니 불평등 계약이라 할지라도 눈물을 머금고 감수해야 하는데…….
“흑흑…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을게요.”
“열심히 일할게요.”
예상과 다른 반응에 조금 얼떨떨했으나, 결과가 좋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나와 허니 퀸 간에 약속의 증표로는 서류가 오가는 대신, 찐한 더듬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제라크의 영역을 안정시킨 나는 슬슬 다음 행보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페스트가 소식을 전해왔다.
“다크 님, 연합체가… 연합체가… 한자리에 모였어요.”
메르바를 중심으로 제라크, 메르스, 베르크가 대 개미족 연합을 결성했다.
이미 예견한 상황이었고, 오히려 내 예상보다 훨씬 늦은 결합이었다.
“그럼 슬슬 우리도 마지막 작전에 돌입하자.”
* * *
다크는 불평등 계약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크의 생각이었고, 오랜 세월 뺏기기만 한 꿀벌족에게 있어 다크의 제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그로 인해 개미족에 대한 호평이 아카시아 숲에 사는 꿀벌족 전체를 강타했고, 개미족의 우호 세력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벌족은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 눈치채지 못한 채, 패퇴한 제라크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됐다.
말벌족치곤 욕심이 적은 메르스가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제라크를 찾았다.
“어떻게 된 거야?”
“힘도 못 써보고 당했어. 다음은 너희 차례야. 이대론 개미족에게 멸종당하게 생겼다고!”
“알았으니까. 놈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려 줘.”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우리 중에선 그나마 네가 제일 잘 알 테니까.”
제라크를 통해 정보를 얻은 메르스는 개미족에 대한 위험성을 충분히 깨달았다.
“그랬단 말이지…….”
무력보단 성공적인 줄타기로 생존해 온 메르스는 이번 기회에 메르바에게 줄을 대기로 했다.
“일단 베르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메르바에게 찾아가자. 우리가 굽히고 들어가면 그년도 쉽사리 내치진 않을 거야.”
“하필 고집불통 할망구인 메르바에게 굽혀야 한다니.”
“메르바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 그러니 우리 셋이서 이번처럼 쓸데없이 싸우지만 않으면 영역을 넓힐 기회가 올 거야.”
메르스는 생각했다.
‘일인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이곳은 충분히 풍요로워. 그러니 개미족만 몰아내면 평화가 찾아올 거야.’
그녀가 떠올린 평화란 꿀벌족을 괴롭히며 보내는 일상이었다.
얼마 후 메르스는 제라크와 베르크를 데리고 메르바를 찾았다.
메르바 또한 그들의 합류를 기꺼워했고, 함께 개미족을 퇴치하기로 했다.
개미족 기지 인근 공터에 연합체들의 총력이 모여들었다.
베르크, 메르스가 각각 30마리의 킬러 퀸과 500마리의 자이언트 킬러비를 데려왔고, 제라크는 10마리의 킬러 퀸과 200마리의 자이언트 킬러비와 함께 왔다.
그나마 세력이 가장 큰 메르바는 50마리의 킬러 퀸과 1,000마리의 자이언트 킬러비를 데리고 합류했다.
총합 킬러 퀸 120마리와 자이언트 킬러비 2,200마리.
쇠약해진 그들이 끌어모을 수 있는 총력이었다.
“많이도 줄었군. 그래도 개미족 정도는 충분하겠지.”
메르바는 이대로 개미족을 들이칠 생각이었는데, 개미족이 연막을 피워 올리며 습격해왔다.
돌격해 오는 기의병을 마주한 메르바는 비릿하게 웃었다.
“가는 수고를 덜어 주는군.”
제라크, 베르크, 메르스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연막이 꺼질 때까지 지상에서 싸워라!”
“서넛이서 한 놈을 공격해야 해!”
“투창 공격에 대비하라!”
돌진해 온 기의병이 적당한 거리에서 멈추더니 말벌족 진형을 향해 투창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먼 거리에 포진한 포병대가 산성포를 쏘아 올렸다.
병력 차가 상당하여 손쉽게 쓸어버릴 줄 알았던 메르바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비겁한 놈들!”
흥분한 메르바에게 메르스가 다가왔다.
“메르바, 돌격 명령을 내려 줘. 이대로 단숨에 거리를 좁혀서 승부를 보지 않으면 피해가 커질 거야.”
“좋다! 전군 돌격!”
말벌족이 저공비행으로 기의병을 향해 쏘아졌다.
기의병들은 투창기를 내려 두고 거창 돌격을 시전 했다.
쾅!
두 세력이 자욱한 먼지를 피워 올리며 힘겨루기를 시작했고, 그 승자는 개미족이었다.
거창 돌격으로 말벌족을 쓸어버리던 개미족이 추진력을 다하자 난전 상태에 돌입했다.
전황을 살피던 메르바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밀리고 있다!”
투창 공격, 포병 폭격, 그리고 이어진 거창 돌격에 쓸리면서 말벌족의 진형은 완전히 붕괴한 반면, 개미족은 난전 중에도 서로 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협력하고 있었다.
거기다 선봉에서 날뛰는 세 마리의 가디언과 후방의 포격 지원까지.
개미족의 조직력에 놀란 메르바는 적진 중심에 있는 보라 머리를 주목했다.
“저놈이군.”
무한자원 개미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