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자원 개미군단-48화 (47/189)

48화. 아카시아 숲 (5)

말벌족의 진영을 뭉개고 있는 피어레스로 인해 킬러 퀸들이 무수히 죽어 나가자 베르크가 나섰다.

베르크는 킬러 퀸 사이에서도 제라크와 비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일반적인 킬러 퀸들보다 훨씬 강한 무투파였다.

베르크와 피어레스의 말벌창이 충돌했다.

캉!

하드 워커를 탄 피어레스와 맞붙은 베르크는 자신이 힘에서 밀리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놀랍군. 울트라도 아닌 개미족이 나보다 강한 힘을 지니다니…….”

피어레스 또한 부족한 힘으로 자신의 공격을 곧잘 막아내는 상대의 창술에 감탄하며 전신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두 존재가 격돌할 때마다 공기가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갔다.

쾅! 쾅!

높은 수준의 공방이 이어지자, 주변 병력이 자연스럽게 물러나며 결투장이 만들어졌다.

피어레스는 하드 워커의 기동력과 높이라는 이점을 가지고도 베르크를 쉽사리 제압할 수 없었고, 오히려 자신의 공격이 읽히면서 베르크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애송이, 경험이 부족했구나.”

우세를 점한 베르크도 피어레스의 외골격을 뚫지 못해 승부가 쉽게 갈리지 않았다.

장기전이 되어가는 결투를 지켜보던 메르스가 은밀히 접근하여 피어레스의 뒤를 노리려 하자, 전황을 살피고 있던 헤르피아가 그녀를 막아섰다.

“결투를 방해하려는 건가?”

자신이 포위됐음을 느낀 메르스가 긴장하며 말했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모든 걸 잃는다. 그런 상황에서 결투라니… 사치라고 생각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인 헤르피아가 병력을 물리며 말했다.

“승리가 약속된 전쟁이라면 이 정도 사치는 괜찮을 듯하군.”

메르스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헤르피아의 태도에 실소를 머금었다.

“네놈, 날 너무 만만히 보는 것 같은데…….”

“만만히 본다라… 넌 연합체 수장 중에서도 최약체로 꼽히는 메르스가 아닌가? 특기가 뒤치기인 녀석에게 내가 직접 나서 준 것만으로 고평가라 생각하는데?”

빠직.

격분한 메르스가 헤르피아를 향해 돌진했다.

기습적인 공격으로 헤르피아의 말벌창을 쳐 낸 메르스.

‘가슴이 열렸다.’

승리를 확신한 메르스가 헤르피아의 심장을 향해 창을 뻗었다.

퍽!

회심의 일격이 헤르피아의 왼팔을 부쉈지만, 일격에 끝내지 못한 메르스의 자세가 무너지며 무방비 상태가 됐다.

가디언의 무식한 방어력에 경악한 그녀를 헤르피아가 차갑게 가라앉은 갈색 동공으로 내려다봤다.

“결투를 즐기는 취미는 없다. 그저 네놈을 최단 시간에 정리하기 위해 팔 하나를 내줬을 뿐.”

“너… 설마, 일부러…….”

회심의 일격이란 언제나 방어를 도외시하는 법.

그걸 노린 헤르피아가 팔을 내준 것이었고, 메르스가 급히 창을 당겨와 방어하려 했지만, 헤르피아가 한발 앞서 내리쳤다.

퍽!

어깨가 박살 난 채 무릎을 꿇게 된 메르스.

헤르피아는 그녀의 머리를 날리기 위해 창을 젖히며 말했다.

“대규모 전장에서의 뛰어난 지휘 능력만큼 무서운 것도 없지…….”

메르스는 마지막 순간 실소를 머금었다.

“우습군… 동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날 알아봐 준 게 고작 개미족이라니…….”

헤르피아가 메르스의 머리를 부순 후 뒤돌아서며 읊조렸다.

“다음부턴 상대가 틈을 보이더라도 자신의 빈틈부터 경계하도록.”

메르스가 사망하며 그를 따르던 킬러 퀸과 자이언트 킬러비들이 혼란에 빠졌다.

“헤르피아 부대 돌격!”

헤르피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벌족을 몰아붙였다.

* * *

베라크와 피어레스가 격돌할 때, 제라크는 자신의 연합체 병력을 데리고 포병대에게 돌진했다.

“저놈들을 처리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어.”

저공비행으로 거리만 좁히면 포병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듯했지만, 제라크는 개틀링 워커가 뿜어내는 연사포에 날개를 잃고 바닥을 굴렀다.

“멈추지 마라!”

각오한 일이었기에 몸을 일으켜 땅을 박차려 했으나, 제라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큭.”

바닥을 구를 때의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

포룸이 포병대 인근 바닥에 접착포를 쏘아 댔고, 접근해 온 적들의 발을 묶은 것이었다.

끈적거리는 접착액에 발이 묶인 제라크는 포병대의 표적이 됐고, 절체절명의 순간 다리 한 짝을 포기한 채 전장을 이탈해야 했다.

포병대 자체가 미끼이자 함정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챈 말벌족들은 기병대 본진을 공략하려 했지만, 난전 속에서도 진을 유지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말벌족을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개미지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메르바는 개미족의 진을 깨트리기 위해 십인장급 워커맨 여럿을 처치했지만, 그 자리를 다른 십인장이 채워 버리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유기적인 움직임이 가능한 것이 다크 때문이라는 걸 일찍이 알아차린 메르바는 무리해 가며 적진 돌파를 감행했다.

정예병을 잃어 가며 다크에게 도달한 메르바는 다급했다.

‘빨리 끝내야 한다!’

적진 한가운데라는 부담감이 작용하여 통성명도 없이 맹공을 퍼부었지만, 하드 워커인 베슬리와 함께하는 다크를 쓰러뜨리는 건 쉽지 않았다.

‘적진에서 단독으로 상대해도 만만치 않은 둘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니…….’

메르바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하겠단 각오로 일부러 빈틈을 보였지만, 다크는 요지부동이었고, 그와 창격을 마주할 때마다 심적인 위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창술도 조잡하고, 힘과 스피드도 베르크 아래야. 그런데 이 기분은 뭐지?’

다크의 보라색 동공을 마주한 메르바는 상대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무감정한 눈으로 자신을 본다고 느꼈다.

‘저 녀석, 전력이 아니다! 날 가지고 놀고 있어!’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어릴 적에나 몇 번 느껴 본 두려움이란 것을…….

‘놈에겐 우린 단순한 장난감에 불과한 거야!’

패닉에 빠진 그가 도주하려 하자, 그의 앞길을 다급히 달려온 게르피아가 막아섰다.

“올 때는 마음대로 왔을진 몰라도… 갈 때는 머리를 두고 가라.”

“잡병 따위가!”

쾅!

* * *

말벌족 연합체들이 인근 공터에 모여들었단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그동안 뿌려 둔 씨앗을 수확하기로 했다.

“전군 돌격!”

놈들이 모인 곳은 잡초가 무성한 평지였고, 기의병과 포병을 써먹기엔 나쁘지 않은 지형인데…….

애초에 이곳은 내가 총력전을 펼치기 위해 준비해 둔 장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준비된 장소에서 예견된 적을 맞이하는 것이니.

승리를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투창도, 포격도, 거창 돌격도 모두 순조롭게 먹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전 상황에 접어드는 듯 보였으나, 이 또한 내가 준비해 둔 함정이었다.

나는 하위 군체를 늘리면서 지능이 오른 개미들에게 하나의 전법을 가르쳐 뒀다.

그건 열 마리씩 밀집대형을 이룬 채, 각 방위를 점해 서로 유기적으로 협동하는 산개진(散開陣)이었다.

이름만 산개진으로 지었지, 실상은 진 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처리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진 안으로 들어온 말벌족은 다수의 공격을 받아 끔살 당했다.

나는 진이 무너지지 않게끔 예비로 빼 둔 병력을 적절한 곳에 투입했고, 말벌족이 쓸려 가는 모습을 느긋이 지켜봤다.

‘이겼네.’

시간문제라 여기던 중, 피어레스가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별동대를 이끌고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왜 위험하게 저런 짓을…….’

그 모습에 살짝 당황했지만, 말벌족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어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포병대를 노리던 말벌족 별동대가 있었지만, 그것 또한 함정.

놈들은 힘도 써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모든 것이 내 의도대로 잘 굴러가고 있는데, 십인대를 쉽게 쓸어버린 킬러 퀸이 정예병을 이끌고 날 향해 돌진해 왔다.

‘저 녀석이 메르바인가?’

십인장들이 메르바가 데려온 킬러 퀸들을 상대하는 동안, 원치는 않았지만, 수장 대 수장의 대결이 펼쳐졌다.

놈의 창격은 매우 강하고 빨랐다.

한 방만 맞으면 골로 갈 정도였고, 움직임도 잘 읽히지 않아 특기인 카운터를 먹일 수 없었다.

1대 1이었다면 세 합 만에 목이 달아나겠지만, 나의 탈것인 베슬리는 워커 중에서도 무투파로 손꼽히는 녀석이었고, 1대 1 전투에선 내게도 밀리지 않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위아래로 이루어진 합동 방어는 두 배 이상의 시너지를 보였다.

어떻게든 버텨내면 진 안에 갇힌 습격자들을 처리한 십인장들이 가세해 올 터.

‘이런…….’

버티기로 들어갔지만, 메르바의 현란한 창술은 예상 이상으로 위협적이었다.

몸에 상처가 하나둘 늘며 붉은 피가 튀었지만,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나의 정신은 명경지수와도 같이 평온했다.

‘나도 붉은 피를 흘리는군.’

창격을 막아 내던 중, 메르바가 내게서 공포를 느낀다는 걸 감지했다.

‘왜지?’

나는 1초를 버티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 있는데, 생사기로에 선 내가 아닌 날 압도한 놈의 공포감이 짙어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다.

‘그러고 보니…….’

하프 데몬으로 진화한 후로 잦은 오해를 받았고, 날 두려워하는 존재가 많아졌다.

잠깐 딴 생각을 좀 했더니 상처가 더 늘었다.

‘안 되겠다. 물러나야겠어.’

슬슬 버티는 것도 한계라 생각될 무렵, 놈이 동공 지진을 일으키더니 도주하려 했고, 다급히 합류한 게르피아가 그 앞을 막아섰다.

게르피아가 고전하며 메르바를 막는 사이 습격자들을 정리한 십인장들이 합류했다.

“재밌느냐! 재밌었느냐!”

뭐가 그리 억울한지 내게 원망을 퍼붓던 메르바는 십인장들의 합공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피어레스가 마지막 남은 연합체 수장인 베르크를 제거하면서 말벌족은 지휘관을 상실했다.

“쓸어버려라!”

기병대가 패닉에 빠진 말벌족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연막과 흙먼지가 걷히자 잔혹한 현장이 드러났다.

300기의 기의병이 당했지만, 킬러 퀸 120마리와 자이언트 워커 2,200마리를 쓸어버렸으니.

대승이었다.

지친 개미들이 널브러지자, 주변 숲이 흔들리더니 말벌족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수고했다, 개미족.”

어딘가에 매복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50마리의 킬러 퀸과 1,000마리의 자이언트 킬러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네놈들을 제물 삼아 이 몸이 아카시아 숲의 지배자임을 알리겠다!”

놈들은 연합체와 반목하는 신세대의 킬러 퀸들이었고, 어부지리로 숲의 패권을 차지하려 한 것인데…….

‘신 연합이라고 하던가?’

이들은 말벌족의 마지막 세력이다.

연막을 경계한 신 연합의 군세가 지상에 내려와 개미족을 포위했다.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는 법이지.”

놈들은 우릴 비웃으며 조롱했지만, 개미족 누구도 흥분하지 않았다.

헤르피아가 염화를 보내왔다.

[다크 님, 슬슬 그걸 발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정말 쓰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지.]

헤르피아에게 나의 마지막 카드를 발동하게 했다.

‘기대되는군. 너희들의 표정이 뭉개지는 순간이.’

놈들이 접근해 왔을 때 지반이 흔들렸다.

“피해라! 날개를 펼쳐!”

땅이 푹 꺼졌다.

말벌족은 날개를 펼쳐 위기를 모면했고, 대비하고 있던 개미족은 바닥과 함께 떨어졌다.

땅 밑으로 떨어진 개미족은 미리 준비한 굴로 몸을 숨겼고, 분지가 된 그곳에는 나만이 남게 됐다.

나는 당황한 그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희들. 꿀벌족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아?”

나도 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 그냥 물어봤다.

“놈이 시간을 끌려고 한다! 놈의 말은 무시하고 도주한 개미족을 쫓아라!”

“눈치 한 번 빠르네. 그런데 말이야. 하늘 좀 보지 않을래?”

상공에는 허니 퀸들과 자이언트 허니비들이 꿀벌을 끌어모으고 있었고, 아카시아 숲 전역에서 꿀벌족 무리와 꿀벌들이 합류하고 있었다.

말벌족 몇 마리가 흩어지라고 명했지만, 꿀벌족들은 듣지 않았고, 숲의 꿀벌을 계속 끌어모았다.

무한자원 개미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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