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자원 개미군단-60화 (59/189)

60화. 흑탑의 하수인

인간 측에서 수성만 했다면 좀 더 오래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측은 식량과 물자가 부족한 건지 속전속결을 원하는 듯했고, 고블린들이 물러날 때마다 기병들을 출격시켰다.

‘하긴, 시간은 인간의 편이 아니야.’

그러던 어느 날 기병들이 돌진하여 고블린 군단의 대장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들의 노림수가 성공했다면 고블린 군단의 와해로 이어졌겠지만, 무식하게 강한 고블린 한 마리에 의해 기병들이 역관광 당했다.

‘저건 뭐야? 설마 저게 고블린 군단장인가?’

기병들이 패퇴하여 숲으로 도주하자, 인간 측의 사기가 가라앉았고, 지휘 계통이 무너졌는지 예전 같은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삐걱거리던 상황에서 신장이 2.5m쯤 되는 자이언트 홉 고블린 부대가 거대한 통나무로 성문을 치자 인간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했고, 그 틈에 일부 고블린이 성벽을 점령하며 승패가 갈렸다.

‘끝났어.’

그렇게 인간 측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성이 함락되자, 각 방위의 성문이 열리며 인간들이 튀어나왔다.

그 후, 성의 안과 밖에서 고블린에 의한 지옥도가 펼쳐졌고, 그곳은 짙은 흑마력으로 가득 찼다.

인간들의 결말을 어느 정도 확인하게 된 나는 급히 숲으로 돌아갔고, 북쪽 외곽을 정리하고 있던 피어레스 부대와 합류했다.

“페스트, 궁기병 부대를 불러 줘!”

“네!”

나는 성을 함락하며 흩어진 인간들을 사냥하느라 정신이 팔린 고블린들의 뒤를 쳤다.

“화살을 아껴라! 코피스를 꺼내라!”

적의 수를 줄일 마지막 기회라 생각한 나는 소모성 무기와 내구성이 떨어지는 장창을 아꼈고, 탈것인 하드 워커의 무력으로 고블린들을 압살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북쪽 영역 안과 밖으로 종횡무진하며 고블린을 학살하던 중, 고립된 채 고블린들과 전투 중인 인간 무리를 발견했다.

수는 약 40명.

말은 타고 있지 않았지만, 무장 정도를 보면 숲에 들어온 기병들이 분명했다.

‘말을 잃고 고블린들에게 포위된 건가?’

그들 중 반수는 매우 짙은 색의 마력이 보이는 게 가디언 이상으로 강해 보였다.

그러니 수적으론 밀리고 있다지만, 고블린을 상대로 고전할 정도는 아닐 텐데…….

‘마력도 고갈된 듯하고, 부상자도 많아.’

자세히 살펴보니 누적된 피로와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듯했다.

“사격으로 고블린만 저격하라!”

슈슉. 슈슉.

고블린이 정리되고 우리를 마주한 인간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엇에 놀랐는지는 모르나,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고블린을 줄여야 했던 나는 길을 서둘렀다.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 * *

다크에게 구해진 인간들은 개미족의 무장과 체계적인 지휘에 놀란 나머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크가 떠나고, 중년의 기사가 어린 소년의 상태를 살폈다.

“비에타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그런데… 방금 내가 뭘 본 거야?”

기사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비에타가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이젤 경, 말해 줘! 방금 내가 본 게 대체 뭐야?”

기사 바르젠트 아이젤은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건… 상급 몬스터입니다.”

바르젠트의 말에 비에타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뭐? 상급 몬스터? 몬스터가 상급쯤 되면 동족을 타고 다니며 활을 쏘는 거야? 눈이 있으면 보라고! 저건 철촉 화살이잖아! 그리고 상급이면 기사급이라는 건데, 그런 것들이 떼거리로…….”

비에타가 패닉에 빠진 듯하자, 옆에 있던 젊은 기사가 그의 양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말했다.

“비에타 도련님, 진정하십시오!”

“파스티아 경…….”

“도련님 말씀대로 단순한 몬스터가 아닐 겁니다.”

게이론 파스티아는 자신의 추측을 비에타에게 말해 줬다.

“아마 흑탑과 관계된 몬스터일겁니다.”

“흑탑이라고?”

흑탑이란 금기에 손을 댄 마법사 집단이었고, 그 위험성으로 인해 대륙의 공적이 된 조직이었다.

“흑탑의 충술사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파스티아 경은 고블린 로드도 흑탑과 관계있다고 보는 거야?”

게이론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아무리 흑탑이라도 최상급 몬스터인 고블린 로드를 인위적으로 발생시킬 방법은 없어요.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대륙은 일찍이 멸망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고블린 로드는 자연 발생했고, 흑탑 놈들이 개미 몬스터 부대를 만들어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소린데… 대체 왜 우릴 구해 준 거지?”

비에타의 의문에 중년 기사 바르젠트가 답했다.

“그건 비에타 님이 벨라삭 백작가의 일원임을 알아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비에타 님에게 변고가 생겼다면 대규모 조사단이 파견됐을 테니…….”

“그 말은 놈들도 무언가 준비하고 있고, 시간을 벌려 한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50년 전에도 비슷한 짓을 했죠. 그때의 대재앙을 재현하려는 게 아닌지요.”

바르젠트의 말에 기사들과 비에타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고블린 로드와 흑탑, 도대체 여기가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바르퀴르 자작이 무언가 숨기고 있던 것 같아.”

비에타의 말에 바르젠트가 반박했다.

“그건 아닐 겁니다. 그랬다면 이번 전투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가진 않았을 테니까요.”

“뭐, 됐어. 패전 책임은 바르퀴르 자작에게 덮어씌우고, 우린 돌아가서 상황을 보고하자.”

“흑탑 건은 보고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교단과 제국의 관심을 받고 싶진 않아. 그래도 아버지께는 말해 둬야겠지.”

흑발 소년 비에타는 도주 중 숲에서 낙마한 배다른 형제를 떠올리곤 비릿하게 웃었다.

“그놈이 죽었다는 것도 보고해야 하니, 이대로 전장을 이탈한다.”

“동쪽으로 우회하여 바나보나 남작령을 거쳐 가시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다크에게 구해진 일단의 무리가 숲을 빠져나가기 위해 이동을 개시했다.

* * *

사냥 중에 게르피아와 헤르피아가 합류했고, 나머지 가디언들도 이쪽으로 오는 중이었다.

“너희들은 저쪽을 청소해라, 화살을 아끼고 코피스를 써라!”

한참이나 사냥하여 북쪽 숲에 산개해 있던 고블린 부대를 어느 정도 정리했다.

고블린을 사냥하던 중 많은 인간을 구해 줬지만, 숲에서 죽은 인간이 훨씬 많았다.

우릴 본 인간들은 하나같이 경악하여 말을 잇지 못했고, 우리가 떠나자 웅성거리더니 고블린을 피해 아카시아 숲 쪽으로 이동하여 숲을 빠져나갔다.

“고블린 사체는 줍지 마라!”

무장한 인간의 영양 등급이 고블린보다 훨씬 높았기에 인간 시체를 통째로 챙기는 걸 우선시했다.

‘대부분 상급 영양들이야. 소수지만 최상급도 섞여 있어. 이건 무조건 챙겨야 해.’

최상급 영양은 나도 처음 본다.

군침이 돌았지만, 할 일이 있어 보류했다.

시체를 주우며 다니다 보니, 부상으로 버려진 인간들도 발견했다.

중무장한 중년과 청년, 가끔 경무장한 소년들도 있었다.

깨어 있는 인간은 반항이 거셌기에 창으로 후려쳐 기절시킨 후 응급조치를 해 줬다.

“이들은 둥지로 데려간다!”

“네!”

인간들이 타던 말도 200마리 정도 획득했는데.

이곳의 말은 전생 시절의 말보다 훨씬 크고 힘이 좋았다.

말의 영양 등급은 대부분 중급이었지만, 간혹 상급 영양이 있었다.

둥지로 돌아온 나는 하녀 개미들에게 지시하여 인간 시체의 무장을 벗기게 했다.

“장비는 내 창고에 두고, 시체는 쿠쿠에게 보내.”

메디를 불러와 부상자들을 치료한 후, 밧줄로 꽁꽁 묶어 감옥에 뒀다.

“세크리, 경비대에게 하드 워커를 지원받고, 혹시 모르니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워커맨을 감시로 붙여 둬.”

“네.”

인간들을 처리한 나는 여왕들과 일리아나를 찾아가 내가 본 상황을 보고해 줬다.

“고블린이 인간들의 성을 점령했어요. 많은 수의 여자를 확보했을 테니… 엄청나게 불어날 거예요.”

놈들이 가진 전력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 주니, 장내가 가라앉았다.

“다크, 네 말대로라면 100인대 규모의 자이언트 홉 고블린, 홉 고블린 주술사, 홉 고블린 라이더, 홉 고블린 사제가 있다는 것인데… 하나하나가 수장급인 그들을 규합하려면, 고블린 로드가 있어야 한단다.”

케어의 말에 장로들이 당황했다.

고블린 로드의 출현은 옐로우 로커스트 이상의 재앙이었고, 그 존재는 개미들의 천적과도 같았기에 개미족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정말 고블린 로드가 나타났다면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일리아나와 트라이가 부정했지만, 케어는 고블린 로드 없이 이만큼 고블린이 불어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고블린 로드가 출현했음을 확신했다.

“그러니, 우린 앞으로 어떻게 생존할지를 의논해야겠구나.”

케어는 개미족의 전통적인 대처법을 알려 줬다.

“고블린 로드의 수명은 50년 남짓이란다. 그리고 야행성이라 낮에만 조심스럽게 활동하면 멸종은 면할 수 있겠지…….”

케어가 서쪽 산맥의 개미들처럼 규모를 줄여 버티는 방법을 제시했지만, 이는 50년 동안 빛을 보지 말고 숨어 살자는 말과 같았다.

‘잡몹인줄 알았던 고블린이 이렇게 뛰어날 줄은 몰랐지만, 그건 개미족도 마찬가지야.’

놈들도 이번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봤다.

그러니 우리 군체를 노린다면 그건 아마 내년 봄이다.

남은 시간은 가을과 겨울, 약 반년.

“아직 시간이 있어요. 그동안 대 고블린 전략을 생각해 볼게요.”

“우리도 생각해 볼게.”

나와 장로들이 대 고블린 전략을 세워보기로 했는데,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겨울이 지나면 고블린들은 분명 몇 배로 불어나 있을 거야.’

맘 같아서는 지금 당장 총력으로 밀어붙이고 싶지만…….

그랬다간 잘해 봐야 공멸이다.

‘우리 힘만으론 고블린을 상대할 순 없어.’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외세의 힘이 필요했다.

‘갑각충 녀석들이 도와 주면 쉬울 텐데.’

놈들은 땅에 붙어 사는 종족에게 관심이 없었다.

거미족이 떠오르긴 했지만, 대화하러 가다가 암습당하거나 대화 중에 암습 당하거나… 그런 암울한 미래만이 떠올랐다.

어쨌든 말만 통할 뿐, 생각이 통하지 않는 녀석들이라 함께 공투한다는 건 상상이 가질 않았다.

‘거미 여인이라면…….’

상당한 무력을 지닌 그녀라면 높은 지능을 갖췄을 확률이 높고 대화가 통할지도 모르나, 그녀를 만나기 위해선 거미족 영역에 발을 들여야 하니.

결국 거미족의 암습을 견뎌 내며 어디 있는지 모를 존재를 찾아야 한다.

‘씁쓸하네.’

개미족에겐 친구가 없다.

꿀벌족이 있긴 하지만, 이들은 친구라기 보단 꿀 셔틀…….

거기다 아카시아 숲도 아니고 오크나무 숲을 위해 온몸을 불살라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을 때, 감옥에 배치한 하녀 개미가 염화를 보내왔다.

[다크 님, 인간들이 저희보고 주인을 뵙고 싶다고…….]

[주인?]

[벨레삭 가문의 서자 유리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합니다.]

이곳 세계의 가문을 말해줘 봐야 내가 알 리가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린지 원.’

그래도 상대가 대화를 청해 오니, 만나 보기로 헸다.

‘가기 전에 정보를 모아 가자.’

나는 루리아를 찾아가 벨레삭 가문에 대해 물어봤다.

평민인 루리아는 귀족 가문에 대해 아는 게 없었지만, 벨레삭 백작령이 남부의 중심 도시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남부에서 영향력이 있는 대영주겠군.’

그런 가문의 서자면…….

어느 정도 위치인지 아리송했다.

‘그런데 여왕도 아니고 주인을 불러오라니, 알 수가 없네.’

세크리에게 유리라는 서자를 데려오게 했다.

무장이 해제당한 유리는 균형 잡힌 몸매의 흑발 청년이었고, 짙은 푸른 마력을 품고 있는 최상급 영양이었다.

꿀꺽.

나는 길쭉한 테이블 끝에 그를 앉혔고, 본론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뭔가를 기다렸다.

“뭘 기다리는 거지?”

나의 물음에 그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너도 대륙 공용어를 할 줄 아는군. 나는 너희들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잠시 동안 침묵하니, 그가 알아서 이해한 듯 헛소리를 지껄였다.

“모습을 드러내진 않겠다는 거군? 테이밍한 몬스터를 대리인으로 삼을 줄이야… 역시 흑탑이란 건가?”

유리는 나의 뒷배에 흑탑이란 조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주인에게 전할 말은 뭐냐?”

원활한 정보 수집을 위해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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