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자원 개미군단-61화 (60/189)

61화. 귀족 사회, 익스퍼트 유리

신장 155cm 정도인 내 외모에는 별다른 위압감이 없다.

그러나 나의 마안은 상대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흑발 청년 유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나를 마주한 그는 긴장한 채 식은땀을 흘렸고, 두려움을 애써 감추며 말을 이었다.

“난 하녀의 소생으로 태어난 서자이긴 하나, 남부 최연소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

그는 나의 반응을 차분히 살피며 말했다.

“그러니 내 재능에 투자해라. 내게는 최상급 익스퍼트까지 오를 수 있는 자질이 있다.”

그의 몸에서 공포와 불안의 마력이 넘실댔지만,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맞섰다.

‘대단하군.’

일대일로 마주하고도 내 마안을 견뎌낸 존재는 많지 않았다.

“만약 내가 벨레삭 백작령의 영주가 된다면, 이곳 남부 대산림을 금지로 지정하여 흑탑이 조용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마.”

자신에게 재능이 있으니 투자하라니…….

담보도 없는 공수표.

물론 저쪽은 우리를 흑탑이라 착각하고 있기에 던진 제안이겠지만,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불가침 조약이라.’

긍정적으로 검토하곤 싶었지만, 세 가지 의문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과연 서자가 가문을 이을 수 있는 것인지, 익스퍼트면 그들의 사회에서 어느 정도 위치인지, 흑탑의 마법사들은 또 무엇인지…….

흑탑의 하수인을 자칭해 버린 이상 흑탑에 대해선 물어볼 순 없다.

대신 서자인 유리가 백작가를 이을 수 있는지 떠보기로 했다.

“흑탑은 네놈이 가문을 이을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아. 그런 네게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

정곡이라도 찔렸는지 그가 이를 악물며 답했다.

“현 가주는 바르킨 벨레삭이다.”

유리는 백작을 향한 적의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귀족이 되려면 그만한 능력을 증명해야 하지.”

루리아에게 듣기론 장자 승계 원칙이 있다고 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귀족들의 작위 계승은 조금 다른 듯했다.

백작은 세 명의 부인과 네 명의 첩을 두고 있으며 자식들이 많았지만, 자식 중에 익스퍼트가 없어 소영주 자리가 공석인 상태였다.

“고맙게도… 벨레삭 백작의 자식 중 나를 제외하면 무재를 타고난 자가 없다. 그래서 서자인 내게 기회가 온 것이지.”

‘일부다처제에다가 능력주의라…….’

셋째 부인의 자식인 비에타 반 벨라삭이란 녀석이 경쟁자로 떠오르곤 있지만, 유리는 자신이 좀 더 앞선다고 말했다.

“그러니 가문을 이을 수 있다!”

확신에 찬 듯한 말투와는 달리 동공이 흔들리는 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

‘실력은 있지만, 서자란 한계에 부딪혔나 보군.’

이야기가 길어졌더니 놈이 마안을 견디기 힘들어하여 감옥에 돌려보냈다.

‘판단이 서지 않아. 인간들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어.’

나는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을 하나씩 불러와 왕국의 상황과 백작가의 상황을 캐물었다.

“몬스터 따위에게 해 줄 말은 없다. 죽여라.”

유리처럼 처음부터 협조적인 녀석은 없었다.

“다크 님, 제가 인간에게 올바른 태도를 알려 줘도 될까요?”

별 생각 없이 세크리에게 맡긴 기사와 병사들은 어딘가로 끌려갔다 온 후, 묻지 않은 가정사까지 말해 줄 정도로 태도가 바뀌었다.

덕분에 나는 왕국, 귀족, 기사에 관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왕 아래로 두 명의 후작과 다섯 명의 백작이 있는데, 이들은 작위를 내릴 수 있는 대영주에 해당했다.

‘땅을 내주고 군역과 의무를 부과하는 봉건제, 그리고 오등작인가? 하지만 공작은 없다는 게 좀 신기하군.’

남작, 자작, 백작, 후작, 공작으로 이어지는 귀족제를 오등작이라 하는데, 이곳 세계에는 남작 아래로 준남작이 있었고, 봉토와 성씨를 받지 못한 기사 신분이 존재했다.

‘작위를 잇지 못한 귀족 자녀도 수두룩하고 말이야.’

기사는 준귀족 대우를 받았고, 작위를 잇지 못한 귀족들의 자녀는 이름과 성씨 사이에 드, 반, 폰 등을 끼워 혈통을 나타냈다.

드는 왕실의 혈통, 반은 대영주의 혈통, 폰은 귀족의 혈통.

당연히 서자인 유리는 평민에 지나지 않아 유리 반 벨레삭이라 칭할 수 없었다.

클라우드 왕국은 여섯 개의 인접국이 있지만, 세 곳과는 산맥과 강으로 막혀있어 교류가 없었고, 북서쪽의 사막 왕국 아슬란에 마석을 비롯한 다양한 물품을 수출하여 제국에서 유행하는 각종 사치품을 수입했다.

‘자원을 수출하고 사치품을 수입한다니. 이 나라… 괜찮은 건가?’

북쪽의 포카이 왕국과 북동의 다슬리 왕국과는 마찰이 잦아 두 후작이 방파제 역할을 했고, 벨레삭 백작은 클라우드 왕국 남서쪽의 대영주로 몬스터 웨이브를 저지할 의무와 남부 대산림의 개척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의 백작은 남부 개척에 관심이 없어.’

벨레삭 백작 밑으로 8명의 자작, 64명의 남작, 그리고 수백의 준남작과 기사가 있으나, 백작이 상비군으로 데리고 있는 기사와 병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헬리오스 제국이라…….’

이곳에는 제국에 의해 만들어진 대륙법이 있어 왕을 포함한 귀족들은 신분에 따른 기사, 기병, 병사 수에 제한이 있고, 국경에 병력을 배치할 때도 제국의 허락이 필요했다.

‘대제국 아래에서 살아가는 속국 신세군.’

그러니 귀족들은 제국의 눈치를 봐가며 대륙법에 따른 명예로운 전쟁을 통해 땅과 이권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렇다고 인간들이 약한 건 아니었다.

일단 귀족의 자녀들은 다섯 살부터 검을 휘두르기 시작해 기사가 되기까지 혹독한 수행을 거쳤고, 몬스터를 상대론 대륙법에 따른 예의와 절차는 필요치 않았다.

경지에 관한 정보도 얻었다.

갓 검을 잡기 시작한 자를 비기너라 하고, 어느 정도 숙련되어 고블린 사냥에 나설 정도가 되면 유저라 불린다.

본격적으로 마나를 느끼고 신체 강화에 사용하면 오크 정도의 무력을 얻게 되고, 오러 유저라고 불렸다.

오러를 압축해 무기에 두른 게 소드 오러였고, 소드 오러를 발현한 자를 익스퍼트라 했다.

비기너, 유저, 오러 유저, 익스퍼트.

개미족의 무력과 비교하자면…….

비기너는 1차 진화종인 빅 워커.

유저는 2차 진화종 중 최약체인 스마트 워커.

오러 유저는 자이언트 워커.

익스퍼트는 3차 진화종인 가디언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익스퍼트는 다시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으로 나뉘었고, 그대로 기사의 경지를 나타내는 셈이었다.

백작성에는 기사 1백, 기병 4백, 보병 2천이 있다.

매우 적은 병력으로 보이지만, 백작이 소집령을 발동하면 가신들이 모여들어 기사 500, 기병 2천, 보병 1만이란 군단이 만들어지고, 용병들까지 추가로 합류한다고 한다.

자작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만, 백작쯤 되는 놈이 개미족을 토벌한다고 설치면…….

‘난감하겠어.’

숲에서 싸운다면 지진 않겠지만, 인간들은 개미족의 약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기름과 불을 사용할 거란 말이지.’

나 또한 인간들의 약점을 잘 아니 비슷한 규모의 군대에게 패할 것 같진 않지만, 백작의 뒤엔 왕국이 있고, 왕국 뒤에는 제국이 있으니, 건드려서 이로울 건 없다.

‘유리의 제안도 나쁘진 않아. 백작이 지금은 대산림에 관심이 없다고는 해도, 언제든지 마음이 바뀔 수도 있고, 후계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모르니까.’

문제는 유리가 처한 상황이었다.

“세크리, 유리를 데려와 줘.”

유리의 지지 세력은 대부분이 대산림과 닿아 있는 남부의 귀족이라고 했다.

그런데 유리의 스승이자 장인어른인 바르퀴르 자작이 이번 고블린과의 일전에서 전사하여 유리는 지지 세력의 한 축을 잃었다.

이대로 유리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비에타의 생모인 3부인의 정치질에 휘말려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테고, 고블린과의 전쟁이 길어지면 나머지 지지 세력도 잃을 판국.

유리가 제거되면 백작의 후계자라 할 만한 사람이 비에타만 남게 되는데.

기사들과 병사들에게서 얻은 정보로 볼 때, 비에타란 놈은 남부 대산림에 관심이 많다.

‘개척한다고 설치기라도 하면 내가 곤란해져.’

그러니 유리가 살아서 백작위를 이어 주면 좋겠지만, 백작에게 인정받지 못한 서자가 작위를 이을 확률은 매우 낮았다.

유리를 테이블에 앉힌 나는 그에게 말했다.

“흑탑에선 널 지원하기로 했다.”

그가 백작위를 잇지 못하더라도 비에타의 대항마로 오래도록 살아 줬으면 했다.

“정말인가?”

나의 하녀인 워커맨들이 고블린 귀로 가득한 자루를 가져와 유리에게 건넸다.

“이건?”

기사들이 고블린 귀를 토벌의 상징으로 여긴다고 하여 준비한 것이었다.

“어때? 이 정도면 네 전공을 증명할 수 있겠나?”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화체의 귀도 다수 섞여 있군. 이걸 가져가면 꽤 큰 전공이 되겠지.”

전공을 증명할 물건도 챙겨 줬으니 본론을 말했다.

“고블린과의 전쟁이 장기화하면 네 세력은 오래 버틸 수 없겠지.”

모두 기사와 병사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유리는 고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놈 말대로다. 전쟁이 길어지면 날 지원하는 영주들이 힘을 잃게 돼.”

고블린과의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기 위해서라도 놈들의 수장인 고블린 로드를 처리해야 한다.

문제라면 개미족에게 고블린 군단을 토벌할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

그래서 필요한 게 인간들의 조력인데…….

“고블린을 성채에서 몰아내기만 해라. 숲에 들어온 고블린은 우리가 처리해 주겠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고블린 로드가 목격된 이상, 백작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인간들이 고블린을 먼저 쳐 준다면, 우린 어부지리를 노리면 됐다.

“남은 건 네 몸값 문제군. 내 주인이 만족할 만한 대가를 제시해 줬으면 좋겠어.”

어차피 보내 줄 거지만, 기왕이면 이들의 관습에 따라 몸값을 챙기고 싶었다.

“말과 갑옷. 그리고 함께 잡혀 온 기사와 병사들을 무사히 돌려보내 준다면 두 개의 마을을 통째로 넘겨주겠다.”

“땅은 필요 없다.”

“그렇다면 실험체용 노예가 필요하겠지. 노예 200명. 그 이상을 원한다면 내가 작위를 받을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

“좋다. 200으로 하지.”

나는 유리와 함께 감옥으로 갔다.

먹을 걸 제대로 안 줬는지 굶주린 기사와 병사들이 마흔 명이나 있었다.

그중 유리를 따르는 자는 서른 명 정도였고, 기사 열 명에게선 배신의 마력이 물씬 풍겼다.

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들도 동료인가?”

“아니… 흑탑의 지원을 들키지 않으려면 처리해야 할 놈들이다.”

“그렇군. 그럼 이들은 내가 정리하지.”

유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에게 버려진 열 명의 최상급 영양은 경비를 서던 하드 워커들의 턱에 꿰뚫린 뒤, 식량 창고로 옮겨졌다.

살육의 현장을 목격한 서른 명의 인간이 긴장했지만, 유리가 나와 모종의 관계를 맺었음을 말해 주며 인간들을 진정시켰다.

“눈을 가리고 하드 워커의 등에 타라. 그럼 인간들의 영역으로 데려다주겠다.”

아직 무장을 돌려주지 않았기에 기사와 병사들은 내 말에 순순히 따라야 했다.

그렇게 나는 인간들을 아카시아 숲 북쪽 영역 밖까지 데려다줬다.

나는 유리의 안대를 풀어 주며 말했다.

“너희들이 가져온 말과 무장은 여기 있다. 저쪽으로 가면 인간들의 영역이니 위험은 없을 거야.”

말에 실린 고블린 귀를 확인한 유리는 매우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대로 노예 200명을 보내지.”

“천천히 보내도 상관없다.”

떠나는 유리에게 인간의 언어를 학습한 하이 페어리 두 마리를 붙여 줬다.

“때가 되면 이들을 통해 연락해라.”

유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하이 페어리들이 투명화 능력으로 모습을 감추자 표정이 밝아졌다.

“조금 떨어져 지낸다면 웬만한 기사급도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하겠군. 준비되면 연락하지.”

유리를 떠나보낸 나는 둥지로 돌아갔고, 궁기병을 출격시켜 영역 내의 고블린 소탕을 명했다.

무한자원 개미군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