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고블린 로드, 그리고 왕급 존재들
땅을 박찬 포스가 고블린 로드에게 달려들었다.
고블린 로드는 돌진해 오는 포스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갈색과 녹색 빛을 두른 주먹의 격돌.
버스를 향해 돌진한 승용차가 찌그러져 튕겨나듯이 포스가 박살난 채 멀찍이 날아갔다.
포스를 정리한 고블린 로드는 눈빛만으로 다가오는 하드 워커들을 멈추게 한 후, 내 쪽을 바라봤다.
놈의 어그로가 나에게 튀려던 순간, 포스가 몸을 일으키며 입가의 피를 닦아 냈다.
“…어딜 보는 거지?”
놀란 고블린 로드가 눈을 크게 뜨고서 포스를 바라봤다.
“평범한 마기로 마강기를 받아 낸 것이냐?”
미소 띤 포스가 비틀거리며 물었다.
“쿨럭쿨럭! 그게 마강기란 것인가?”
로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포스에게 물었다.
“뭐가 그리 즐겁지?”
“네놈은 즐겁지 않나?”
“잠력을 쥐어짠 나와 그런 내 앞에 있는 네놈… 우리 둘 다 곧 죽을 터인데, 이런 상황에 즐거울 수 있겠나?”
“나는 즐겁군. 강자와 우열을 가리는 게 말이야.”
“우열?”
당장 달려가 포스를 구해야 옳았지만, 장내의 마력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포스와 로드의 공간만이 분리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다른 개미들도 이를 느꼈는지 접근을 망설였다.
그 찰나의 망설임으로 나는 포스를 구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포스가 땅을 박차 로드와의 거리를 좁혔다.
“승부다! 고블린!”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 주겠다.”
포스는 아슬아슬하게 고블린 로드의 주먹을 피했지만, 충격파만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아 밀려났고, 다시 자세를 다잡고 로드의 빈틈을 찔렀지만 마력 갑옷을 뚫지 못한 채 주먹만 박살 났다.
포스는 실시간으로 당하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웃으며 초근접전을 치렀고, 그런 포스를 상대하는 고블린 로드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늦었어.’
짧은 접전으로 포스는 이미 치명상을 여러 차례 입었고, 가진 마력 이상을 쏟아냈다.
잠력을 끌어다 쓴 로드도 얼마 가지 않아 탈진할 듯하니, 이 결투의 행방이 어떻든 종착지는 정해졌다고 생각했으나…….
‘마력이… 마력이 포스에게 모여들고 있다!’
격돌 끝에 자신을 불태운 포스가 땅에 고랑을 파며 밀려났다.
“…지금의 내 힘으론 네놈에게 닿을 수 없나 보군.”
로드는 간신히 의식을 붙잡고 있는 포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고블린 로드 데카이저.”
타들어 간 장작처럼 외골격이 탈색된 포스가 짙게 웃으며 말했다,
“…가드 퀸 포스.”
“잘 가라.”
고블린 로드가 초록 섬광이 되어 포스에게 돌격한 순간, 나는 포스의 변화를 감지했다.
쾅!
숲을 흔드는 굉음이 터지며 충격의 여파가 개미들을 흔들었고, 격전의 중심지에는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개미들은 한순간이지만, 의식이 끊겼다 이어지며 여왕 중 누군가가 진화했음을 인지했다.
‘몸이 가벼워졌다! 이건 포스가 진화한 거다!’
또 한차례 굉음이 터지며 충격파와 함께 먼지가 걷히자, 포스와 로드의 격전지가 드러났다.
‘포스의 부상이 전부 회복됐어.’
절체절명의 순간, 진화를 통해 부상을 완전히 회복한 포스.
이전보다 확연히 두꺼워진 외골격은 3차 진화 형태의 약점인 엉덩이까지 완전히 뒤덮여 있었고, 군데군데 보석이 박혀 화려해 보였다.
게다가 이제 눈 아래도 마스크처럼 덮여 보호받게 되었고, 갈색 머리카락은 더욱 풍성해졌다.
또한 빛나는 문양이 전신에 새겨져 있어 마치 SF 영화에 나오는 기갑 전사를 연상시켰다.
‘체급은 고블린 로드와 비슷해졌어!’
문제는 마력.
갓 진화한 포스에게선 마력을 느낄 수 없는 반면, 고블린 로드에게선 아직도 압도적인 마력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블린 로드가 내지른 녹색 주먹이 진화한 포스의 손에 가볍게 잡혔다.
쾅!
총격파가 일대에 퍼져나갈 때, 포스의 입 부근 외골격이 좌우로 열렸다.
“정정하지. 마스터 가드 퀸, 포스다.”
“설마… 네놈도 왕급인가?”
진화한 포스를 본 고블린 로드가 조급해하며 연속 펀치를 날렸지만, 포스는 미소 띤 표정으로 모두 막아 냈다.
그것도 손바닥으로…….
퍼퍼퍼퍼퍽!
공격하고 있는 것도, 밀어붙이고 있는 것도 로드 쪽이었지만, 정작 한 발자국씩 밀려나고 있는 것은 고블린 로드였다.
‘포스가 압도하고 있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을 듯하여 긴장이 풀리려는데, 숲의 마력이 심상치 않았다.
“헉… 헉…….”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을 모두 쏟아낸 고블린 로드는 탈진했고, 그의 근육과 피부가 급속히 쪼그라들더니 볼품없는 노인 고블린의 모습으로 변했다.
“무력마저 밀리다니… 내가… 졌다.”
털썩
고블린 로드가 패배를 시인하며 전투가 끝났지만, 포스의 투기는 여전히 강렬했고, 나 또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곳으로 모이고 있어!’
강렬한 마력을 지닌 존재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서쪽 숲이 울린다.
“뭔가 오고 있다! 부상자는 이송하고 남은 개미는 방어 대형을 취해라!”
그때, 서쪽에 포진해 있던 개미들이 짙은 녹색 마력의 존재에게 쓸려 나갔고, 북쪽에서도 강렬한 흑색 마력의 존재가 접근하고 있었다.
‘고블린 로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이야!’
그리고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상공에는 인간형 잠자리 몬스터가 팔짱을 낀 채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의 뒤편 거목 위에선 인간형 사마귀 몬스터가 포스를 주시했다.
‘저 두 녀석은 잠력을 끌어 올린 고블린 로드 수준이야.’
남쪽에서 거미줄을 치며 날아오는 거미 여인, 그녀의 맞은편에서 느긋이 날아오는 장수풍뎅이 중갑 전사.
‘모르겠다. 이 녀석들의 마력은 거대하다기 보다는… 섬뜩해.’
이곳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하는데, 포스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존재를 느낀 숲의 지배자들이 오고 있군.]
[포스 님, 둥지에 먼저 돌아가 계세요. 여긴 제가 맡아볼게요.]
[아니, 놈들은 날 찾아오는 거다. 그러니 여기서 만나보겠다.]
숲의 지배자들과 마주한다면 포스가 온전한 상황이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상황은 나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쾅!
5m 거구의 헐크 같은 놈이 포스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최근에 조금 특이한 고블린 로드가 찾아와서 교육 좀 해 줬더니… 이번에는 왕급 개미가 나올 줄이야.”
퍼억!
그놈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고블린 로드를 걷어차 버리며 말했다.
고블린 로드는 마치 길거리에 널린 쓰레기처럼 날아갔지만,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엔 거인의 존재감이 너무도 컸다.
“나는 서쪽 산맥 너머에 사는 오거 오그르트다. 너희 마충들과 달리 태생부터 우월한 오거라 할 수 있지.”
오그르트는 수다스러웠지만, 그가 품은 강렬한 마력은 이곳에 모인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왕급이 만나는 자리에 잠자리와 사마귀는 왜 있는 거지?”
오그르트의 말에 하늘의 잠자리 몬스터와 나무 위의 사마귀 몬스터가 긴장하며 기척을 숨겼고, 나의 옆으로 거미 여인이 떨어져 내리더니 여유롭게 한마디 했다.
“놔둬… 쟤들도 끼고 싶나 보지.”
“나르본느, 네놈이 영역 밖으로 나오다니 별일이군.”
“오그르트, 네놈이야말로…….”
갑각왕이라 여겨지는 신장 2m의 전신 갑주로 덮인 인간형 장수풍뎅이 몬스터가 포스와 오거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오거, 거미왕. 네놈들에게 내 영역을 허락한 기억은 없다. 용건만 해결하고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나, 갑각왕 헤라클레스가 상대해 주겠다.”
저돌적인 헤라클레스의 태도에 나르본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오그르트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거대한 몽둥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래서 무투파들이 좋아.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하려는 게 내 스타일이란 말이지.”
오그르트와 헤라클레스가 각을 세우자 짜릿한 마력이 일대를 채웠고, 이러한 압박 속에서 모여든 개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진정해라! 놈들이 포스 님을 공격하는 순간, 모두 함께 덮친다!”
나는 언제든 포스를 도울 수 있도록 부대를 지휘했지만, 사실 고블린 로드와 동등하거나 상회하는 존재들을 상대로 일반 개미들이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잘못하면… 말 그대로 개미 목숨이 되는 거야.’
맘 같아서는 36계 줄행랑을 펼치고 싶었으나, 나르본느가 나를 유심히 뜯어보고 있어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움직이면 당한다!’
숲의 최강자들이 모여 개판 5분 전인 상황인데, 북쪽에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전사 하나가 개미족을 쓸어버리며 다가왔다.
‘저 녀석은 뭐지? 몬스터의 특징적인 부분이 보이지 않아.’
전신에 검은 기운을 내뿜는 흑색 갑주는 마치 뭔가에 빙의된 갑옷이 홀로 움직이는 듯했다.
거대한 흑색 대검을 휘두르던 그는 흉흉한 살기를 뿌리며 개미족 포위망 안으로 들어왔다.
‘이 녀석도 고블린 로드 이상이야.’
당연히 모여든 모두가 흩뿌려진 살기에 반응하여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나르본느와 흑색 갑주에게서 친숙한 느낌을 받았다.
‘흑마력이다!’
둘이 사용하는 마력은 다름 아닌 흑마력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흑색 갑주가 대검을 바닥에 박아 넣고는 양팔을 흔들어 보였다.
일종의 적의가 없음을 나타내는 듯한데, 그는 여전히 살기와 흑마력을 흩뿌리고 있었다.
‘뭐지? 기운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흑색 갑주를 상대로 경계를 풀 정도로 간 큰 존재는 없었…….
“저 녀석, 마력 제어가 안 되나 본데?”
나르본느를 필두로 오거, 헤라클레스, 포스가 차례로 경계를 풀었다.
“다 모인 것 같군. 난 마스터 가드 퀸 포스다!”
포스가 자신을 소개하자, 오그르트가 접근해서 압도적인 덩치를 과시했다.
“그래, 개미. 내 소개는 들었을 거고, 저기 날아다니는 녀석과 숨어 있는 사마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둘 다 별 볼 일 없어서 말이야. 그런데 넌 어떨지 모르겠군.”
오그르트의 존재감이 장내를 짓눌렀지만, 공허의 마력으로 일대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는 나와 4차 진화를 통해 고블린 로드 이상으로 강해진 포스에겐 이러한 압박이 통하지 않았다.
“붙어 보면 알겠지.”
포스의 미소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오그르트의 앞에서 당당한 포스의 태도에 숲의 최강자들은 놀람, 흥미, 걱정, 경멸 등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포스와 오그르트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나 또한 개미들을 사지로 밀어 넣을 준비에 들어갔다,
‘젠장,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생겼군.’
최악의 경우, 포스라도 구출할 계획을 세울 때, 나르본느가 나섰다.
“네놈이 여기서 날뛰면 우릴 모두 상대해야 할 텐데? 감당할 자신 있으면 해 보던가.”
주변을 둘러본 오그르트는 흥이 가셨다며 거대 몽둥이를 바닥에 내려 뒀다.
“벌레들도 뭉치니 무섭군.”
오그르트가 물러서며 평화가 찾아온 듯하여 가슴을 쓸어내리던 내게 정찰대 소속의 하이 페어리가 다가와 흑색 갑주의 정체를 알려 줬다.
“다크 님, 저 갑주가 저번에 보고 드린 엄청 강한 인간이에요. 혼자서 고블린 군을 학살하는데… 고블린 로드도 피할 정도였어요.”
나만 들었다면 쉬쉬했을 텐데…….
이곳에 모인 존재들은 귀가 밝았다.
무한자원 개미군단